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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일본과 중국을 넘나들었던 해상왕국의 번영, 백제''' | *'''제목: 일본과 중국을 넘나들었던 해상왕국의 번영, 백제''' | ||
− | ===「온조설화」와 「비류설화」 | + | ===「온조설화」와 「비류설화」=== |
온조왕은 서기 18년에 한강의 중류인 현재 서울 지역에 백제를 건국하였다. 『삼국사기』에는 백제가 건국되는 과정을 담은 건국설화 두 건이 기록되어 있는데, 내용이 서로 차이가 있어 흥미롭다. 각각 「온조설화」와 「비류설화」로 전해지는 그 내용은 온조와 비류가 고구려왕 주몽이 아들이며 서로 형제간이라는 부분에서는 공통점을 지닌다. 다만 「온조설화」에서는 백제의 건국을 온조가 주도하여 도읍지를 하남 위례성(서울)에 정하였다고 전하고 있는 반면, 「비류설화」에서는 비류가 백제의 건국을 주도하여 지금의 인천인 미추홀에 도읍을 정했다고 이야기하고 있어 다소 차이를 보인다. | 온조왕은 서기 18년에 한강의 중류인 현재 서울 지역에 백제를 건국하였다. 『삼국사기』에는 백제가 건국되는 과정을 담은 건국설화 두 건이 기록되어 있는데, 내용이 서로 차이가 있어 흥미롭다. 각각 「온조설화」와 「비류설화」로 전해지는 그 내용은 온조와 비류가 고구려왕 주몽이 아들이며 서로 형제간이라는 부분에서는 공통점을 지닌다. 다만 「온조설화」에서는 백제의 건국을 온조가 주도하여 도읍지를 하남 위례성(서울)에 정하였다고 전하고 있는 반면, 「비류설화」에서는 비류가 백제의 건국을 주도하여 지금의 인천인 미추홀에 도읍을 정했다고 이야기하고 있어 다소 차이를 보인다. | ||
2017년 11월 20일 (월) 14:58 기준 최신판
1차 원고
삼국 가운데 (고구려 및 신라와 함께) 한 나라인 백제는 서기 18년에 온조왕이 당시 마한 연맹체에 속해 있던 오늘날의 서울 지역에서 건국하였다. 되었다. 4세기까지 백제는 서서히 영토를 확장하여 오늘날의 서울과 인천, 경기도에 해당하는 한강 유역 일대를 차지하였다. 4세기 후반에 마한의 성읍 국가들을 통합하여 한반도의 남서부 절반을 완전히 장악하였고, 나아가 전성기인 375년에는 오늘날의 평양 부근까지 팽창하기에 이르렀다. 475년 한강 유역 일대를 고구려에 빼앗긴 뒤, 6세기와 7세기에 걸쳐 신라와 영토를 빼앗고 빼앗기는 전쟁을 벌였다. 660년 백제는 나당 연합군에 멸망당하고, 그 영토는 당나라의 보호령이 되었다가 672년에 신라에 완전히 귀속되었다.
강력한 해상 왕국으로 알려져 있는 백제는 야마토 정권의 일본과 광범위한 교역을 하면서 일본에 한문과 (백제의 국교인) 불교 및 각종 기술을 전수하였다. 오늘날 백제 유적은 서울, 경기도, 충청남도, 전라북도 등지에 남아 있으며, 그 중 유네스코 백제 역사유적지구에서는 왕릉과 성곽, 절을 볼 수 있다. 가장 상징적인 백제 유물로는 백제 금동대향로와 백제 금관 및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금귀고리와 여러 장신구를 들 수 있다. 서울에는 몽촌토성과 풍납토성 같은 백제 시대의 흙성이 남아 있다.
연구원 검토
검토의견 | |
• 1. “건국하였다. 되었다.” : “건국하였다.”가 옳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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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원고
- 제목: 일본과 중국을 넘나들었던 해상왕국의 번영, 백제
백제는 서기 18년에 온조왕에 의해 한강의 중류인 현재 서울 지역에서 건국되었다. 삼국사기에는 백제가 건국되는 과정을 담은 건국설화가 두건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두 가지 내용이 서로 차이가 있어 흥미롭다. 각각 「온조설화」와 「비류설화」로 전해지는 그 내용은 온조와 비류가 고구려왕 주몽이 아들이며 서로 형제간이라는 부분에서는 공통점을 지닌다.
다만 「온조설화」에서는 백제의 건국을 온조가 주도하여 도읍지를 하남 위례성(서울)에 정하였다고 전하고 있는 반면, 「비류설화」에서는 비류가 백제의 건국을 주도하여 지금의 인천인 미추홀에 도읍을 정했다고 이야기 하고 있어 다소 차이를 보인다.
이것은 초기 연맹체 단계의 백제가 온조와 비류에 의해 주도되는 부여계통의 집단에 의해 구성되었으며, 그들이 각각 자신을 중심으로 한 건국설화를 전승시키면서 형성된 특징인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무엇이 진짜 백제의 건국설화인지는 아직도 논란이 있으나, 중요한 것은 두 가지 설화가 모두 스스로 백제 왕실의 계통이 고구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이로써 백제는 고구려를 연결고리로 부여에 공통적으로 소급되면서, 함께 부여와 연결된 계통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백제는 대략 3세기에 접어들면서 차츰 고대국가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다.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지배체제와 법령 등을 마련하면서 국가의 통치체제를 형성해 가던 백제는 한강유역과 경기도를 거쳐 충청도 중부지방에 위치하고 있던 목지국을 정복하는 등 점차 세력을 넓혀가게 되었다.
이어 4세기 후반에는 마한의 모든 성읍국가들을 통합하면서 마한 전 영역과 한반도 남서부 전체를 장악하였다. 나아가 375년에는 오늘날 평양 부근으로까지 세력을 확장시켰는데, 이때 백제를 저지하기 위해 출전했던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는 등 그 기세가 매우 강성하였다. 이때가 백제의 전성기로 근초고왕의 치세였다.
전성기 때 백제는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한반도 남서부 전역과 황해도에서부터 대동강에 이르는 방대한 영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한반도를 넘어 바다건너 일본 큐슈 지방과 요서, 진평과 같이 중국의 해안가 지역으로까지 진출하면서 세력 확장의 교두보를 마련하고 있었다. 이렇게 삼국 간 경쟁에서 백제는 가장 먼저 전성기를 맞으며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475년 고구려가 대대적인 남하정책을 추진하면서 백제는 도읍인 하남 위례성이 함락당하고 한강 유역을 상실하고 만다. 이를 회복하고자 6세기 신라와 동맹을 체결하여 고구려에 대항하였지만, 성왕 때 일으킨 대대적인 군사작전에서 신라와 연합해 한강 유역을 회복했음에도 불구하고 신라의 배신으로 다시 빼앗기면서 이제는 고구려와 손을 잡고 신라와 맞서게 된다.
이로써 6세기에서부터 7세기에 걸쳐 백제는 신라와 치열하게 대립한다. 급기야 격렬한 백제의 공세에 위기를 느낀 신라는 중국의 당나라와 동맹을 체결하고 고구려-백제 동맹체제와 맞서게 된다. 결국 백제는 660년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당시 도읍이었던 사비성이 함락당하면서 멸망하였다. 이후 백제의 영토는 당나라의 웅진도독부로 편입되었다가 672년 신라에 완전 귀속되었다.
전성기 때 바다를 건너 일본과 중국까지 세력을 확장할 만큼 강력한 해상 세력을 구축한 백제는 일본의 야마토 정권과 밀접하게 교류하면서 큰 영향을 주었다. 일본에게 한자, 불교 및 각종 선진 문물과 기술 등을 전수한 것은 바로 백제였으며, 일본은 백제로부터 전해 받은 문물을 바탕으로 한 단계 높은 수준의 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이처럼 고대 시기 한국과 일본은 교류가 긴밀하였으며, 그 흔적들은 지금까지도 일본 곳곳에 유물과 유적으로 남아 있다.
현재 백제의 흔적들은 통치영역이었던 서울과 경기도, 충청도와 전라도 곳곳에 남아 있다. 부여와 공주 같은 백제의 옛 도읍지에는 왕릉과 성곽 등 백제의 유적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 이를 중심으로 백제의 유적지는 전체가 ‘백제 역사유적지구’의 이름으로 묶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그 밖에 백제 왕릉에서 출토된 금동대향로와 금관, 금귀고리와 여러 장신구들이 국립공주박물관과 국립부여박물관 등에 보존되어 있다. 특히 도굴이 되지 않은 체로 발견된 공주의 무령왕릉에서는 엄청난 양의 유물들이 출토되어 백제 문화의 화려함을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최근에는 백제의 초기 도읍지였던 하남 위례성의 몽촌토성과 풍납토성 등에 대한 발굴과 보존의 노력도 함께 이뤄지고 있다.
교열본
- 제목: 일본과 중국을 넘나들었던 해상왕국의 번영, 백제
「온조설화」와 「비류설화」
온조왕은 서기 18년에 한강의 중류인 현재 서울 지역에 백제를 건국하였다. 『삼국사기』에는 백제가 건국되는 과정을 담은 건국설화 두 건이 기록되어 있는데, 내용이 서로 차이가 있어 흥미롭다. 각각 「온조설화」와 「비류설화」로 전해지는 그 내용은 온조와 비류가 고구려왕 주몽이 아들이며 서로 형제간이라는 부분에서는 공통점을 지닌다. 다만 「온조설화」에서는 백제의 건국을 온조가 주도하여 도읍지를 하남 위례성(서울)에 정하였다고 전하고 있는 반면, 「비류설화」에서는 비류가 백제의 건국을 주도하여 지금의 인천인 미추홀에 도읍을 정했다고 이야기하고 있어 다소 차이를 보인다.
이것은 초기 연맹체 단계의 백제를 온조와 비류가 주도하는 부여계통의 집단이 구성하였으며, 그들이 각각 자신을 중심으로 한 건국설화를 전승시키면서 형성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무엇이 진짜 백제의 건국설화인지는 아직도 논란이 있으나, 중요한 것은 두 가지 설화가 모두 백제 왕실의 계통이 고구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이로써 백제는 고구려를 연결고리로 부여와 연결된 계통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백제의 전성기
백제는 대략 3세기에 접어들면서 차츰 고대국가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다.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지배체제와 법령 등을 마련하면서 국가의 통치체제를 형성해나갔다. 백제는 한강유역과 경기도를 거쳐 충청도 중부지방에 위치하고 있던 목지국을 정복하는 등 점차 세력을 넓혀가게 되었다.
이어 4세기 후반에는 마한의 모든 성읍국가들을 통합하면서 마한 전 영역과 한반도 남서부 전체를 장악하였다. 나아가 375년에는 오늘날 평양 부근으로까지 세력을 확장시켰는데, 이때 백제를 저지하기 위해 출전했던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는 등 그 기세가 매우 강성하였다. 이때가 백제의 전성기로 근초고왕의 치세였다.
전성기 때 백제는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한반도 남서부 전역과 황해도에서부터 대동강에 이르는 방대한 영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한반도를 넘어 바다건너 일본 큐슈 지방과 요서, 진평과 같은 중국의 해안가 지역으로까지 진출하면서 세력 확장의 교두보를 마련하고 있었다. 이렇게 삼국 간 경쟁에서 백제는 가장 먼저 전성기를 맞으며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나당연합군에 굴복하다
그러나 475년 고구려가 대대적인 남하정책을 추진하면서 백제는 도읍인 하남 위례성이 함락당하고 한강 유역을 상실하고 만다. 이를 회복하고자 6세기 신라와 동맹을 체결하여 고구려에 대항하였다. 하지만 성왕 때 일으킨 대대적인 군사작전에서 신라와 연합해 한강 유역을 회복했음에도 불구하고 신라의 배신으로 다시 빼앗기게 된다. 그러자 이제는 고구려와 손을 잡고 신라와 맞서게 된다.
이후 6세기에서부터 7세기에 걸쳐 백제는 신라와 치열하게 대립한다. 급기야 격렬한 백제의 공세에 위기를 느낀 신라는 중국의 당나라와 동맹을 체결하고 고구려-백제 동맹체제와 맞서게 된다. 결국 백제는 660년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당시 도읍이었던 사비성이 함락당하면서 멸망하였다. 이후 백제의 영토는 당나라의 웅진도독부로 편입되었다가 672년 신라에 완전 귀속되었다.
일본에 전한 백제 문화
전성기 때 바다를 건너 일본과 중국까지 뻗칠 만큼 강력한 해상 세력을 구축한 백제는 일본의 야마토 정권과 밀접하게 교류하면서 큰 영향을 주었다. 일본에게 한자, 불교 및 각종 선진 문물과 기술 등을 전수한 것은 바로 백제였으며, 일본은 백제로부터 전해 받은 문물을 바탕으로 한 단계 높은 수준의 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이처럼 고대 시기 한국과 일본은 교류가 긴밀하였으며, 그 흔적들은 지금까지도 일본 곳곳에 유물과 유적으로 남아 있다.
현재 백제의 흔적들은 통치영역이었던 서울과 경기도, 충청도와 전라도 곳곳에 남아 있다. 부여와 공주 같은 백제의 옛 도읍지에는 왕릉과 성곽 등 백제의 유적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 이를 중심으로 백제의 유적지는 전체가 ‘백제 역사유적지구’의 이름으로 묶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그 밖에 백제 왕릉에서 출토된 금동대향로와 금관, 금귀고리와 여러 장신구들이 국립공주박물관과 국립부여박물관 등에 보존되어 있다. 특히 도굴이 되지 않은 채 발견된 공주의 무령왕릉에서는 엄청난 양의 유물들이 출토되어 백제 문화의 화려함을 증명하였다. 그리고 최근에는 백제의 초기 도읍지였던 하남 위례성의 몽촌토성과 풍납토성 등에 대한 발굴과 보존의 노력도 함께 이뤄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