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대한제국 침략의 원흉을 총살하다"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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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2=김삼웅, 『안중근 평전』, 시대의 창, 2014. | |참고문헌2=김삼웅, 『안중근 평전』, 시대의 창, 201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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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중근 의사 자서전』'''은 안중근 의사가 | + | '''『안중근 의사 자서전』'''은 안중근 의사가 5개월 동안 뤼순감옥에 투옥되어 있을 당시, 200여 개가 넘는 유묵과 함께 쓰여진 책이다. 이 책은 자서전 외에 『동양평화론』과 『인심결합론』, 유묵과 당시 대한매일신보 게재 기사, 그리고 최후 공판 기록 등을 실었다. |
안중근 의사는 독립운동가로서뿐 아니라 세계평화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준 선각적인 지도자였다. 하얼빈 의거 말고도 국채보상운동, 교육사업, 의병전쟁 등 수많은 구국 운동에 참여했고, 『동양평화론』을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를 주장했다. 그가 주장한 동양 평화에 대한 지론은 100여 년이 지난 지금에 적용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동아시아의 현재와 미래의 ‘평화구도’와 공동체 모델로 인식되는 대단히 선구적인 것이었다. | 안중근 의사는 독립운동가로서뿐 아니라 세계평화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준 선각적인 지도자였다. 하얼빈 의거 말고도 국채보상운동, 교육사업, 의병전쟁 등 수많은 구국 운동에 참여했고, 『동양평화론』을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를 주장했다. 그가 주장한 동양 평화에 대한 지론은 100여 년이 지난 지금에 적용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동아시아의 현재와 미래의 ‘평화구도’와 공동체 모델로 인식되는 대단히 선구적인 것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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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3=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안중근과 동양평화론』, 채륜, 2010. | |참고문헌3=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안중근과 동양평화론』, 채륜, 201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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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영원히 타오르는 불꽃』'''은 2009년과 2010년에 걸쳐 안중근 하얼빈 의거를 기념하기 위해 열린 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된 논문을 수정ㆍ보완하여 실은 것이다.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는 물론, 동양평화론에 대해 다루고 있다. |
'''『이토 히로부미와 안중근』'''은 안중근의 생애 및 1909년 중국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한 사건에 대해 다루었다. 2장에서는 국내에서의 활동, 3장에서는 본격적인 해외활동을 다루었으며, 4장에서 하얼빈 역에서의 총살 사건을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5장은 뤼순감옥에서의 생활과 재판과정을 다루었다. | '''『이토 히로부미와 안중근』'''은 안중근의 생애 및 1909년 중국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한 사건에 대해 다루었다. 2장에서는 국내에서의 활동, 3장에서는 본격적인 해외활동을 다루었으며, 4장에서 하얼빈 역에서의 총살 사건을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5장은 뤼순감옥에서의 생활과 재판과정을 다루었다. |
2018년 3월 13일 (화) 11:41 판
안중근: 대한제국 침략의 원흉을 총살하다
하얼빈 역에 울린 총성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安重根, 1879∼1910)은 대한제국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총살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 황제와 대한제국을 압박하여 을사늑약을 맺고, 헤이그 밀사 사건을 빌미로 황제를 퇴위시킨 침략의 원흉이었다. 반대로 일본에서는 근대화에 앞장선 존경받는 인물이었으므로 한민족의 기개를 보여준 안중근의 거사는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사건이었다.
어린 시절 응칠이란 이름으로 불렸던 안중근은 을사늑약 체결 다음 해인 1906년 진남포에서 삼흥학교(三興學校)와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해 인재를 양성하는 데 힘을 쏟았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 관서지부장으로 참여하였던 안중근은 이 해 7월 한일신협약이 체결되자 국내에서는 독립운동에 한계가 있다고 느껴 북간도로 망명하였다. 그 후 러시아로 옮겨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며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해 애국사상 고취와 군사 훈련을 담당하였다.
1909년 3월 안중근은 황병길(黃丙吉) 등 열두 명과 함께 단지회(斷指會)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이토 히로부미와 을사5적 중 우두머리인 이완용(李完用)을 암살하기로 피로써 맹세하였다. 열두 명의 회원은 각자 왼손 약손가락 첫 관절을 잘라[단지, 斷指] 그 피로 태극기 앞면에 ‘대한독립(大韓獨立)’이라 쓰고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또 3년 이내에 이를 성사하지 못하면 자살로 국민에게 속죄하기로 약속하였다.
일본은 1904년에 있었던 러일 전쟁에서 승리해 랴오둥[遼東] 반도와 뤼순[旅順] 항을 차지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전리품으로 얻은 만주를 시찰하기 위해 1909년 10월 12일 도쿄를 떠났고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체프를 만나 동아시아 세력 확장 문제 등을 논의하기 위해 하얼빈에 들를 예정이었다.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를 태운 특별 열차가 하얼빈에 도착하였다. 이토는 열차 안에서 코코프체프와 약 25분 동안 회담을 마치고 차에서 내렸다. 이토가 러시아 장교단을 사열하고 환영 군중 쪽으로 발길을 옮길 때 안중근이 뛰어나오며 권총을 쏘았다. 안중근은 일본군과 군중 앞에서 “코레아 우라(대한국 만세)”를 세 차례 외친 뒤 현장에서 의연한 태도로 러시아 경찰에 체포당했다. 세 발의 총탄을 맞은 이토는 열차 내로 옮겨져 응급처치를 받았지만 30분 만에 사망하였다.
일본인도 존경한 안중근
러시아 검찰관의 예비 심문에서 안중근은 “나는 대한국인 안응칠이고 나이는 31세”이며 “대한의군 참모중장 겸 특파독립대장으로 독립전쟁 중 적의 괴수를 처단 응징했다”라고 밝혔다. 또 이토가 대한의 독립 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 평화의 교란자이므로 대한의용군사령의 자격으로 총살한 것이지 안중근 개인의 자격으로 사살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안중근은 관동도독부 지방법원 원장 마나베[眞鎬十藏]의 주심으로 여섯 차례의 재판을 받았다. 안중근은 자신을 살인 피고가 아닌 전쟁 포로로 대우하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 법정은 그에게 살인죄를 적용했다.
재판 과정에서 안중근은 논리 정연하고 당당한 태도로 이토를 처단한 이유를 밝혀 일본인 재판장과 검찰관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토를 처단한 이유로 정권 강탈과 무고한 한국인 학살, 황제 폐위, 명성왕후 시해, 군대 해산, 을사늑약과 정미7조약의 강제 체결 등 열다섯 가지 죄목을 열거했다. 재판부가 “청나라나 러시아에 대항할 힘이 없는 한국을 그대로 두면 망하지 않았겠나. 그래서 일본이 보호해 주겠다고 한 것 아니냐”라고 하자, 안중근은 “그렇다면 우리 황제를 협박해서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케 한 이유가 무엇인가. 또 통감 제도 실시 이후 수많은 우리 인민을 무참히 학살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도대체 이토가 우리를 보호해 준 것이 무엇인가. 아무것도 없다. 일본은 한국을 병탄하려 하고 있다”라고 반박했다. 관선 변호인 미즈노는 그의 답변 태도에 감복하여 “그 범죄의 동기는 오해에서 나왔다고 할지라도 이토를 죽이지 않으면 한국은 독립할 수 없다는 조국에 대한 참된 정성에서 나온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라고 변론하였다.
동양 평화를 당부하고 순국하다
1910년 2월 14일 열린 언도 공판에서 재판장 마나베는 사형을 언도하였다. 사형 집행 며칠 전 안중근은 동생들에게 “내가 죽어도 우리나라가 독립하기 전에는 반장(返葬 : 객지에서 죽은 사람의 시신을 고향으로 옮겨가는 것)하지 말라. ……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고 유언하였다. 또 3월 26일 오전 열 시 뤼순 감옥에서 순국 직전, “나는 동양 평화를 위해 한 일이니 내가 죽은 뒤에라도 한일 양국은 동양 평화를 위해 서로 협력해 주기를 바란다”라는 말을 남겼다.
역시 독립운동가였던 안중근의 어머니 조마리아는 안중근에게 사형이 언도되자 “이토가 많은 한국인을 죽였으니, 이토 한 사람을 죽인 것이 무슨 죄냐, 일본재판소가 외국인 변호사를 거절한 것은 무지의 극치이다”라며 분노했다. 또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다른 마음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刑)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라고 마지막 당부를 전했다고 한다.
안중근의 유해는 뤼순 감옥 터 부근에 묻힌 것으로 알려져있다. 2008년 남북 정부가 공동으로 유해 발굴에 나섰지만 위치조차 찾지 못했다. 그는 옥중에서 서론만 쓴 미완의 저서 《동양평화론》을 남겼다.
관련항목
참고문헌
- 안중근의 생애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 안중근, 『안중근 의사 자서전』, 범우, 2014. |
• 김삼웅, 『안중근 평전』, 시대의 창, 2014. |
『안중근 의사 자서전』은 안중근 의사가 5개월 동안 뤼순감옥에 투옥되어 있을 당시, 200여 개가 넘는 유묵과 함께 쓰여진 책이다. 이 책은 자서전 외에 『동양평화론』과 『인심결합론』, 유묵과 당시 대한매일신보 게재 기사, 그리고 최후 공판 기록 등을 실었다.
안중근 의사는 독립운동가로서뿐 아니라 세계평화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준 선각적인 지도자였다. 하얼빈 의거 말고도 국채보상운동, 교육사업, 의병전쟁 등 수많은 구국 운동에 참여했고, 『동양평화론』을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를 주장했다. 그가 주장한 동양 평화에 대한 지론은 100여 년이 지난 지금에 적용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동아시아의 현재와 미래의 ‘평화구도’와 공동체 모델로 인식되는 대단히 선구적인 것이었다.
『안중근 평전』은 안중근 의사의 사상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그리고 하얼빈 의거와 이후 공판투쟁 모습 등 그의 행적이 어떠했는지를 역사적 사료와 증언기록을 통해 보여준다. 그뿐 아니라 안중근 의사의 처형 전후에 대한 여러 사람의 증언과 기록을 통해 그날의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책 후반부에서는 안중근 의사 순국 후 국내외에서 쏟아진 시문과 각종 전기 등을 수록해 당시 안중근 의사의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보여준다. 아울러 부록에서는 안중근 의사가 뤼순옥중에서 쓴 각종 휘호를 정리해 수록했고, 중국에서 발했되었던 <민우일보>에 실린 안중근 의사에 관한 사설 「이등감국 암살안건을 논함」을 게재했다.
- 안중근의 사상과 독립운동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 이태진 외, 『영원히 타오르는 불꽃』, 지식산업사, 2010. |
• 김영진, 『이토 히로부미와 안중근』, 모든북, 2017. |
•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안중근과 동양평화론』, 채륜, 2010. |
『영원히 타오르는 불꽃』은 2009년과 2010년에 걸쳐 안중근 하얼빈 의거를 기념하기 위해 열린 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된 논문을 수정ㆍ보완하여 실은 것이다.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는 물론, 동양평화론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이토 히로부미와 안중근』은 안중근의 생애 및 1909년 중국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한 사건에 대해 다루었다. 2장에서는 국내에서의 활동, 3장에서는 본격적인 해외활동을 다루었으며, 4장에서 하얼빈 역에서의 총살 사건을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5장은 뤼순감옥에서의 생활과 재판과정을 다루었다.
『안중근과 동양평화론』은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의 「안중근 의거 100주년 기념 연구논문집」 제4권이다. 안중근 의거 100주년 기념을 위해 2009년 10월 <안중근 동양평화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를 테마로 열린 심포지엄에서 발표하고 토론한 논문을 엮은 것이다. 안중근의 사상의 궁극적 관심이 깃든 동양평화론에 대해 본격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이 지닌 국제정세적 배경을 살펴본다. 우리 시대에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을 계승하는 방법을 모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