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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개토태왕과 고구려 남진정책』'''은 2002년 경기도 구리시에서 열린 광개토태왕 동상건립 기념 고구려 국제학술대회에서 발표된 논문을 모아서 펴낸 것이다. 몇 가지 논의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그 하나는 '왜 구리시에 광개토태왕 동상이 서게 되는가?'하는 당위성의 문제였다. 백제 아신왕의 항복을 받았다는 아단성이 서울의 아차산성인지 단양의 온달성인지에 대한 논의가 있었고, 또 광개토대왕 남진 당시 백제, 신라, 가야, 왜와의 관계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와 남진 루트에 대해서도 육로와 해로 양쪽으로 다각적 접근이 이루어졌다. 두번째는 '광개토태왕의 얼굴은 어떻게 생겼을까?"하는 | + | '''『광개토태왕과 고구려 남진정책』'''은 2002년 경기도 구리시에서 열린 광개토태왕 동상건립 기념 고구려 국제학술대회에서 발표된 논문을 모아서 펴낸 것이다. 몇 가지 논의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그 하나는 '왜 구리시에 광개토태왕 동상이 서게 되는가?'하는 당위성의 문제였다. 백제 아신왕의 항복을 받았다는 아단성이 서울의 아차산성인지 단양의 온달성인지에 대한 논의가 있었고, 또 광개토대왕 남진 당시 백제, 신라, 가야, 왜와의 관계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와 남진 루트에 대해서도 육로와 해로 양쪽으로 다각적 접근이 이루어졌다. 두번째는 '광개토태왕의 얼굴은 어떻게 생겼을까?"하는 문제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광개토태왕의 동상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자료편에는 광개토태왕 관계 연구문헌 종합목록과 그 논저목록을 바탕으로 광개토태왕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사를 실었다. |
'''『고구려, 전쟁의 나라』'''는 전쟁을 중심으로 고구려의 역사를 살펴보는 책이다. 일반적으로 고구려는 전쟁의 나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척박한 산악지대에 터를 잡고 살아온 고구려에게 전쟁은 일종의 생존 본능이었다. 고구려는 있는 것을 지키는 나라가 아닌 국경을 넘어 무언가를 찾아다녀야 하는 나라였고, 그것이 고구려 영토 확장의 결정적인 동기였다. 이 책은 '유목민과의 동업과 경쟁'이라는 기본 틀을 바탕으로, 최대한 사실에 가깝게 고구려의 역사를 살펴보고자 했다. 7백년이라는 시간에 걸친 고구려의 성장과정과 패망과정을 통사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또한 거란, 말갈, 해, 돌궐, 회흘 같은 주변 부족들 및 중국과의 관계를 살펴보면서, 이 시기 동북아시아의 국제정세를 함께 다루었다. 주목해서 볼 부분은 3장으로 광개토왕의 전방위적인 정벌전쟁을 다루고 있다. | '''『고구려, 전쟁의 나라』'''는 전쟁을 중심으로 고구려의 역사를 살펴보는 책이다. 일반적으로 고구려는 전쟁의 나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척박한 산악지대에 터를 잡고 살아온 고구려에게 전쟁은 일종의 생존 본능이었다. 고구려는 있는 것을 지키는 나라가 아닌 국경을 넘어 무언가를 찾아다녀야 하는 나라였고, 그것이 고구려 영토 확장의 결정적인 동기였다. 이 책은 '유목민과의 동업과 경쟁'이라는 기본 틀을 바탕으로, 최대한 사실에 가깝게 고구려의 역사를 살펴보고자 했다. 7백년이라는 시간에 걸친 고구려의 성장과정과 패망과정을 통사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또한 거란, 말갈, 해, 돌궐, 회흘 같은 주변 부족들 및 중국과의 관계를 살펴보면서, 이 시기 동북아시아의 국제정세를 함께 다루었다. 주목해서 볼 부분은 3장으로 광개토왕의 전방위적인 정벌전쟁을 다루고 있다. |
2018년 2월 19일 (월) 20:44 판
광개토대왕: 드넓은 영토를 차지하다
백제, 신라, 가야 공략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374∼413)은 391년부터 413년까지 재위한 고구려의 왕이다. ‘광개토(廣開土)’는 영토를 넓게 개척했다는 뜻의 이름이다. 본명은 담덕(談德)인데 호태왕(好太王), 영락(永樂)대왕이라고도 불렸다. ‘영락’은 광개토대왕의 연호로, 고구려가 중국과 대등한 나라임을 나타내는 의미를 지닌다. 어려서부터 체격이 크고 큰 뜻을 품고 있었던 그는 아버지 고국양왕이 세상을 떠난 후 왕위에 올랐다.
이름 그대로 광개토대왕은 고구려의 영토와 세력권을 크게 확장시켰다. 먼저 남쪽으로는, 즉위 초부터 백제에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여 392년에 석현성(石峴城: 개풍군 북면 청석동)을 비롯한 10개성과 관미성(關彌城: 예성강 하류 혹은 강화 교동도)을 함락시켰다. 또 394년에는 빼앗긴 땅을 되찾으려 침공해 온 백제군을 수곡성(水谷城: 지금의 신계)에서, 395년에는 패수(浿水: 지금의 예성강)에서 각각 격퇴하고 396년에는 한강 너머에까지 진격하여 58성 700촌락을 차지하였다. 뿐만 아니라 백제의 아신왕으로부터 영원히 노객(奴客: 신하가 임금을 대하여 자기를 낮추어 가리키던 말)이 되겠다는 맹세를 받고 왕의 동생과 대신들을 인질로 잡아오기도 했다.
그러나 백제는 완전히 굴복하지 않고 왜(倭)와 힘을 합해 고구려는 물론 고구려와 연결되어 있던 신라까지 공격했다. 이에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군대를 보내 왜구를 신라에서 몰아내고 가야 지역까지 추격했다. 407년에는 백제를 공격하여 막대한 전리품을 노획하고 6성을 쳐부수어 백제를 응징했다. 신라와는 친선 관계를 맺었는데 400년에 왜구의 침입으로 위기에 처한 신라를 구원해줌으로써 신라에 대한 영향력이 더욱 커졌다.
거란, 후연, 부여 함락
광개토대왕은 남쪽뿐만 아니라 북서쪽으로도 영토를 넓혀나갔다. 392년에는 북쪽에 있던 거란(契丹)을 정벌하여 거란에게 잡혀갔던 고구려 사람 1만 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395년에는 거란의 일부인 비려(碑麗)를 친히 정벌하여 많은 가축을 노획하는 등 큰 전과를 올렸고 398년에는 숙신(肅愼)을 정벌하여 조공 관계를 맺었다.
당시 고구려의 서쪽에는 선비족 모용씨(慕容氏)가 세운 후연국(後燕國)이 있었는데 후연과는 한동안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런데 400년에 후연왕 모용성(慕容盛)이 소자하(蘇子河) 유역에 위치한 고구려의 남소성(南蘇城)과 신성(新城)에 쳐들어오자 광개토대왕은 후연에 대한 보복전을 펼쳤다. 이 전쟁을 시작으로 몇 차례의 전투를 통해 광개토대왕은 408년 결국 후연을 멸망에 이르게 하였다. 그 뒤 후연 지역에 등장한 북연(北燕)과는 우호 관계를 유지하였다. 410년에는 동해 주변에 있던 동부여(東夫餘)를 정벌하여 굴복시키는 등 활발한 정복 사업을 펼친 결과 고구려의 영역을 크게 팽창시킬 수 있었다. 광개토대왕의 재위 시기에 고구려는 서쪽으로는 요하, 북쪽으로는 개원(開原)에서 영안(寧安), 동쪽으로는 혼춘(琿春), 남쪽으로는 임진강 유역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확보하였다.
전략·전술가이자 정치가
광개토대왕이 정복 사업에 성공한 가장 큰 비결은 그가 뛰어난 전략·전술가였다는 점이다. 또 그는 강력한 힘을 가진 나라들과 우호를 맺고 힘이 약한 나라는 위협하거나 회유하여 동맹을 맺거나 복속시켰다. 이렇게 외교력으로 고구려를 도와줄 세력을 만들어놓은 후 원하는 지역을 정벌했다. 그래서 안정적인 전투를 치르고 승리의 확률을 높일 수 있었다. 또 바닷길이나 강을 통해 이동하고 싸우는 수군을 만들어 기병과 보병 중심이었던 당시 전투에서 우세를 점할 수 있었다.
광개토대왕은 국력을 외부로 팽창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중앙과 지방 통치, 군사, 종교 등 내정 분야에서도 획기적인 개혁을 했다. 장사(長史), 사마(司馬), 참군(參軍) 등의 중앙 관직을 신설하고 393년에는 평양에 9사(寺)를 창건하여 불교를 장려하였다. 나라 안의 안정을 도모하여 백성들의 삶도 크게 개선하였다. 광개토대왕의 아들인 장수왕은 이러한 상황을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편안했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라고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에 기록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광개토대왕은 413년 40세에 세상을 떠났다. 414년 능(陵)을 조성하고 생전의 업적을 기록한 능비(陵碑)를 세웠다. 화강암으로 된 능비의 높이는 6.39미터, 밑면 넓이는 1.43미터이고, 직사각형 기둥 모양의 4면비이다. 4면 전체에 44행 1,755자를 새겼는데, 지금도 중국 지린성 지안현에 남아 있다.
관련항목
참고문헌
- 광개토대왕의 생애 및 영토 확장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 다케미쓰 마코토, 『고구려 광개토대왕』, 범우, 2009. |
• 고구려연구회, 『광개토태왕과 고구려 남진정책』, 학연문화사, 2002. |
• 서영교, 『고구려, 전쟁의 나라』, 글항아리, 2007. |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전편·중편·후편 3부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전편에서는 광개토왕의 생애가 이해하기 쉽게 기술되어 있다. 이 부분에서는 필자의 생각에 의해 등장인물의 심정이나 여러 장면의 상황 설명이 첨가되어 있다. 중편에서는 주로 광개토왕의 시대, 후편에서는 해모수와 주몽이 나오는 고구려의 건국 신화와 광개토왕 전후의 역사적 흐름이 다루어지고 있다.
『광개토태왕과 고구려 남진정책』은 2002년 경기도 구리시에서 열린 광개토태왕 동상건립 기념 고구려 국제학술대회에서 발표된 논문을 모아서 펴낸 것이다. 몇 가지 논의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그 하나는 '왜 구리시에 광개토태왕 동상이 서게 되는가?'하는 당위성의 문제였다. 백제 아신왕의 항복을 받았다는 아단성이 서울의 아차산성인지 단양의 온달성인지에 대한 논의가 있었고, 또 광개토대왕 남진 당시 백제, 신라, 가야, 왜와의 관계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와 남진 루트에 대해서도 육로와 해로 양쪽으로 다각적 접근이 이루어졌다. 두번째는 '광개토태왕의 얼굴은 어떻게 생겼을까?"하는 문제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광개토태왕의 동상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자료편에는 광개토태왕 관계 연구문헌 종합목록과 그 논저목록을 바탕으로 광개토태왕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사를 실었다.
『고구려, 전쟁의 나라』는 전쟁을 중심으로 고구려의 역사를 살펴보는 책이다. 일반적으로 고구려는 전쟁의 나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척박한 산악지대에 터를 잡고 살아온 고구려에게 전쟁은 일종의 생존 본능이었다. 고구려는 있는 것을 지키는 나라가 아닌 국경을 넘어 무언가를 찾아다녀야 하는 나라였고, 그것이 고구려 영토 확장의 결정적인 동기였다. 이 책은 '유목민과의 동업과 경쟁'이라는 기본 틀을 바탕으로, 최대한 사실에 가깝게 고구려의 역사를 살펴보고자 했다. 7백년이라는 시간에 걸친 고구려의 성장과정과 패망과정을 통사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또한 거란, 말갈, 해, 돌궐, 회흘 같은 주변 부족들 및 중국과의 관계를 살펴보면서, 이 시기 동북아시아의 국제정세를 함께 다루었다. 주목해서 볼 부분은 3장으로 광개토왕의 전방위적인 정벌전쟁을 다루고 있다.
- 광개토대왕릉비문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 이도학, 『고구려 광개토대왕릉비문 연구』, 서경문화사, 2006. |
• 권오엽, 『광개토왕비문의 세계』, 제이앤씨, 2007. |
『고구려 광개토대왕릉비문 연구』는 고구려 광개토왕릉비문을 연구한 책이다. 저자가 20년간에 걸쳐 연구하고 발표했던 20편의 고구려사 논문들을 담은 연구서로, 광개토왕릉비문을 통해 고구려의 역사를 살펴본다. 기존의 연구 성과를 기반으로 광개토왕릉비문에 대한 새로운 분석을 제시하고, 고고학적 물증을 통해 고구려의 역사상을 온전하게 구명하고자 했다.
『광개토왕비문의 세계』는 광개토왕비문을 연구한 책이다. 사실의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닌, 「비문」을 텍스트로 보고 그것을 이해하려는 연구를 시도하였다. 「비문」은 1800여 자의 한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신화적인 제1부, 광개토대왕의 훈적이 기록된 제2부, 조상 숭배를 내용으로 하는 제3부로 이루어졌다. 이 책은 건국신화가 제1부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조상과 후손을 기축으로 하여 「비문」 전체를 통어하고 있음을 이야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