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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오래된 역사서인 『[[삼국사기|삼국사기(三國史記)]]』는 [[낙랑공주|낙랑공주]]와 [[호동왕자|호동왕자]]의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고구려 대무신왕(大武神王)의 아들인 [[호동왕자|호동(好童)왕자]]는 옥저 지방을 유람하다가 마침 그 곳을 지나가던 낙랑왕 최리(崔理)를 만나게 된다. 최리는 [[호동왕자|호동]]에게 호감을 갖고 그를 자신의 나라로 초청하였고, 자신의 딸과 혼인시킨다. 강대국으로 떠오르고 있던 고구려와 혼인동맹을 맺고자 한 것이다. | 한국의 오래된 역사서인 『[[삼국사기|삼국사기(三國史記)]]』는 [[낙랑공주|낙랑공주]]와 [[호동왕자|호동왕자]]의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고구려 대무신왕(大武神王)의 아들인 [[호동왕자|호동(好童)왕자]]는 옥저 지방을 유람하다가 마침 그 곳을 지나가던 낙랑왕 최리(崔理)를 만나게 된다. 최리는 [[호동왕자|호동]]에게 호감을 갖고 그를 자신의 나라로 초청하였고, 자신의 딸과 혼인시킨다. 강대국으로 떠오르고 있던 고구려와 혼인동맹을 맺고자 한 것이다. | ||
당시 낙랑에는 적병이 침입해오면 스스로 울려 이를 알리는 북과 뿔피리(自鳴鼓, 自鳴角)가 있었다. [[호동왕자|호동]]은 [[낙랑공주]]에게 자신과 결혼하고 싶다면 보물인 북과 뿔피리를 부수어 달라고 요구한다. [[호동왕자]]를 사랑한 [[낙랑공주]]는 몰래 북과 뿔피리를 파괴하여 고구려 군대가 낙랑을 멸망시킬 수 있게 도왔지만, 뒤늦게 이를 알아차린 최리에 의하여 죽음을 당한다. 뒤이어 [[호동왕자]] 역시 비극적인 죽음을 맞게 된다. | 당시 낙랑에는 적병이 침입해오면 스스로 울려 이를 알리는 북과 뿔피리(自鳴鼓, 自鳴角)가 있었다. [[호동왕자|호동]]은 [[낙랑공주]]에게 자신과 결혼하고 싶다면 보물인 북과 뿔피리를 부수어 달라고 요구한다. [[호동왕자]]를 사랑한 [[낙랑공주]]는 몰래 북과 뿔피리를 파괴하여 고구려 군대가 낙랑을 멸망시킬 수 있게 도왔지만, 뒤늦게 이를 알아차린 최리에 의하여 죽음을 당한다. 뒤이어 [[호동왕자]] 역시 비극적인 죽음을 맞게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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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사군과 낙랑군을 알기 위해 먼저 한반도에 최초로 세워진 국가인 고조선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한국 고대사 산책』'''의 1부 ‘기록: 신화와 설화’의 3장에서는 단군과 고조선의 기록을 통해 고조선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다. 또한 2부 ‘공간: 그때와 지금’의 7장 ‘고조선의 중심지와 영역’에서는 한반도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과 당시 그들에 속한 영역이 그림과 지도로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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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문헌1=오영찬, 『낙랑군 연구』, 사계절, 2006. | ||
+ | |참고문헌2=한국역사연구회, 『한국 고대사 산책』, 역사비평사, 2017. | ||
+ | |참고문헌3=문성재, 『한사군은 중국에 있었다』, 우리역사연구재단, 201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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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낙랑군 연구』'''는 기존 연구와 차별화된, 낙랑군에 대한 새로운 역사 해석을 제시하는 책이다. 저자의 10년 연구 성과가 고스란히 담긴 논문을 기본으로 하여, 논문이 나온 후 2년 가까이 새로 발굴된 자료를 바탕으로 내용을 추가하고 도판과 지도 등 각종 자료를 대폭 보강하였다. 이 책은 문헌 사료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최근에서야 정리되기 시작한 일제 강점기 발굴 조사 자료와 해방 후 북한의 조사 성과 등의 고고학 자료에 주목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낙랑군의 역사적 성격에 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도하였다. 또한 1970년대 이후 중국에서 발굴된 한대 분묘와의 비교를 통해 중원 문화와 낙랑 문화의 차이점과 유사점을 짚어내고 낙랑군의 독자성을 밝히고 있다. 1부에서는 고조선 멸망 이후 한사군의 설치 배경 및 한의 동방정책에 대한 내용을 다루었다. 2부에서는 낙랑군의 통치구조 및 지배 세력에 대한 내용을 담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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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고대사 산책』'''의 2부 ‘공간: 그때와 지금’의 8장 ‘낙랑군 식민지설은 식민사학의 논리’에서는 기원전 108년에 고조선 멸망 이후 한반도에 설치되었다는 한사군설을 비판하고, ‘한사군’이라는 용어가 일본 제국주의 시대 역사학자에 의해서 처음 사용되었다고 전한다. 이후에 역사학자들이 이 이론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한사군의 한반도 설치가 정설처럼 되었음을 비판하고 있다. | ||
+ | 2014년 북경교외 삼합장촌에서 발견된 1,500년 전 무덤에서 “낙랑군 조선현인(朝鮮縣人) 한현도(韓顯度)”라 쓰인 벽돌 명문이 출토되었다. 이 발견을 계기로 이제 고조선, 한사군 등 한국고대사의 주요 쟁점들을 둘러싼 기존의 주장에서 크나큰 인식의 전환이 불가피해졌으나, 중국과 국내 학계는 지금까지도 이에 대해 애써 침묵하면서 구태의연한 ‘고조선재한반도설’ 및 ‘낙랑군재평양설’만 고수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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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사군은 중국에 있었다』'''는 이를 논리적으로 비판하며 한사군은 중국에 있었음을 새롭게 입증하였다. 저자는 이 책에서 고조선-한나라 전쟁, 만리장성, 낙랑군 등, 고대사 속의 주요한 키워드들을 몇 개의 장으로 구성하고 100년 가까이 논란이 되어 왔던 한국고대사 속 쟁점들을 차례로 복기하면서 기존의 정설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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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낙랑공주와 호동왕자의 사랑이야기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 | ||
+ | {{참고문헌 | ||
+ | |참고문헌1=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2: 번역편』,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2. | ||
+ | }} | ||
+ | '''『역주 삼국사기 2: 번역편』'''은 1145년 김부식 등이 편찬한 신라, 고구려, 백제 삼국의 역사서 『삼국사기』의 번역본이다. 「고구려본기」의 대무신왕조에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에 대한 원문 및 번역본이 실려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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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석'''== | ||
+ | <reference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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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10일 (토) 18:58 기준 최신판
낙랑군의 역사적 성격
한사군과 낙랑군
한사군(漢四郡)이란 중국의 고대국가인 한(漢)나라가 기원전 108년에 ‘고조선’을 무너뜨리고 한반도의 서북부지역에 설치한 낙랑(樂浪)·임둔(臨屯)·진번(眞蕃)·현도(玄菟) 등 4개의 군현을 말한다.
이 가운데 낙랑군을 제외한 3개의 군은 토착세력의 반발로 인해 25년여에 걸쳐 순차적으로 사라졌으나, 낙랑군은 약 400여년 동안 지속되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한나라 왕조가 쇠퇴함에 따라 낙랑군의 역할도 점차 축소되었다. 처음에는 지배계층이었던 한나라 출신의 주민들 역시 대개는 토착화되어 갔다. 기원 후 313년에 한국의 고대 왕국인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기까지 낙랑군은 한반도의 고대인들과 중국 세력 간의 정치·경제·문화적 교류에 있어 중요한 거점 역할을 했다.
이렇게 역사적인 변천상황이 각각 다른 4개 군을 한사군이라는 용어로 묶어서 표현하기 시작한 것은 일본 제국주의 시대의 사학자들이었다. 이들은 조선을 영원히 식민지로 삼기 위해, 조선의 역사가 외부세력의 침입에 따라 진행되는 수동적인 역사였음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이유는 다르지만 중국 측 역사서에서도 한사군의 존재를 강조하며, 이 시기의 한반도 전역이 한나라의 영향권 하에 있었던 것처럼 서술하는 경향이 있다. 과연 한나라가 설치한 낙랑군은 어디에 있었으며, 역사적인 성격은 어떤 것이었을까?
낙랑군의 역사적 성격
군이란 일반적으로 중국의 왕조가 중앙집권적 통치를 목적으로 설치한 행정단위이지만, 낙랑군의 경우 고조선 지역을 직접 통치하거나 영토를 확대하기 위해 설치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한나라의 일반적인 군현과는 달리 낙랑군의 정치체제는 중국 왕조의 전형적인 군현체제와 고조선 원주민들의 국읍체제(國邑體制)가 혼합된 형태였다. 국읍에는 원주민 집단의 대표인 군장이 있어 토속적인 법률에 따라 집단을 통솔하였다. 즉 현지인들의 자치를 인정한 것으로 낙랑 태수와 일부 중앙 관리를 제외한 대부분의 관리와 군인은 현지인들이었다. 낙랑군은 중국과 한반도 남부의 소국 및 고대 일본의 소국들과의 사이에서 중계 무역의 이익을 확보하는 데 주력하였다.
낙랑군을 바라보는 역사적 성격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중국의 입장에서 보는 정치거점설이다. 낙랑을 한나라가 지배하는 여러 군현 중 하나로 보는 것이다. 다른 시각은 한나라와의 교역을 위한 무역기지로 보는 교역거점설이다. 한의 식민지가 아닌, 한반도에 존재했던 중국인의 상업중심지로 보는 것이다.
낙랑군의 위치는 현재 중국의 요서 지방이었다는 주장도 있으나, 대체로 대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평양 일대에 자리하고 있던 것으로 본다. 특히 현재 북한의 평양 인근에서 낙랑군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고분, 봉니 등의 유물이 집중적으로 발견되어 이와 같은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특히 고구려고분인 돌무지무덤(적석총)이나 굴식 돌방무덤과 뚜렷이 구별되는 덧널무덤(목곽분), 벽돌무덤(전축분)은 낙랑의 것으로서 낙랑군의 위치를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되고 있다.
낙랑군치지. 현재의 대동강면 토성리에 위치한 토성으로 낙랑군이 통치하던 지역으로 추정되고 있다.[1]
봉니(封泥)란 고대 중국에서 문서류 또는 귀중한 물품을 봉함할 때 쓴 점토이다. 낙랑군이 있었던 곳으로 짐작되는 평양 일대에서 출토되었다. 낙랑태수장(樂浪太守章), 낙랑수승(樂浪守丞) 등 낙랑의 관직명이 보인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2]
낙랑공주와 호동왕자의 사랑 이야기에 담긴 진실은?
한국의 오래된 역사서인 『삼국사기(三國史記)』는 낙랑공주와 호동왕자의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고구려 대무신왕(大武神王)의 아들인 호동(好童)왕자는 옥저 지방을 유람하다가 마침 그 곳을 지나가던 낙랑왕 최리(崔理)를 만나게 된다. 최리는 호동에게 호감을 갖고 그를 자신의 나라로 초청하였고, 자신의 딸과 혼인시킨다. 강대국으로 떠오르고 있던 고구려와 혼인동맹을 맺고자 한 것이다. 당시 낙랑에는 적병이 침입해오면 스스로 울려 이를 알리는 북과 뿔피리(自鳴鼓, 自鳴角)가 있었다. 호동은 낙랑공주에게 자신과 결혼하고 싶다면 보물인 북과 뿔피리를 부수어 달라고 요구한다. 호동왕자를 사랑한 낙랑공주는 몰래 북과 뿔피리를 파괴하여 고구려 군대가 낙랑을 멸망시킬 수 있게 도왔지만, 뒤늦게 이를 알아차린 최리에 의하여 죽음을 당한다. 뒤이어 호동왕자 역시 비극적인 죽음을 맞게 된다.
두 사람의 이야기에는 신비주의적인 요소가 등장하기 때문에, 대다수 한국인들은 이 이야기를 일종의 설화로 받아들이고 있다. 일부에서는 이야기 속의 낙랑을 한(漢)나라가 설치한 낙랑군(樂浪郡)이 아닌, 평양을 중심으로 한 별도의 독립세력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이 이야기 속에, 고구려를 비롯한 한국의 고대 국가들이 낙랑군을 비롯한 한반도 내의 중국계 세력을 몰아내면서 성장해 온 역사적 시간들이 은유적으로 나타나 있다고 믿고 있다.
관련항목
참고문헌
- 한반도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에 대해 알고 싶다면...
• 한국역사연구회, 『한국 고대사 산책』, 역사비평사, 2017. |
• 이형석, 이종호 지음, 『고조선 신화에서 역사로』, 우리책, 2014. |
• 윤내현, 『고조선, 우리 역사의 탄생』, 만권당, 2016. |
한사군과 낙랑군을 알기 위해 먼저 한반도에 최초로 세워진 국가인 고조선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한국 고대사 산책』의 1부 ‘기록: 신화와 설화’의 3장에서는 단군과 고조선의 기록을 통해 고조선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다. 또한 2부 ‘공간: 그때와 지금’의 7장 ‘고조선의 중심지와 영역’에서는 한반도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과 당시 그들에 속한 영역이 그림과 지도로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고조선 신화에서 역사로』는 고조선의 설립부터 멸망까지를 밝힌 연구서로서 한민족의 기원을 추적하고 동북공정의 실체를 밝히고 있다.
『고조선, 우리 역사의 탄생』은 고조선에 대한 오랜 ‘오만과 편견’을 깨주는 훌륭한 ‘고조선 입문서’이다. 우리가 ‘신화’가 아닌 ‘역사’로서 고조선을 받아들이기 위해 가질 수밖에 없는 가장 중요하고도 당연한 의문들, 즉 단군은 누구인가, 단군사화는 무엇을 말해주나, 고조선이라는 명칭은 무슨 뜻인가, 고조선은 언제 건국되었나, 고조선은 얼마나 넓은 나라였나, 고조선 사람들의 경제 활동과 생활 모습, 과학기술과 문학, 예술, 종교는 어떠했나, 고조선의 대외관계는 어떠했나, 그리고 기자조선·위만조선·한사군은 어디에 있었나 등의 의문을 찬찬히 풀어준다.
- 낙랑군과 한사군에 대해 알고 싶다면...
• 오영찬, 『낙랑군 연구』, 사계절, 2006. |
• 한국역사연구회, 『한국 고대사 산책』, 역사비평사, 2017. |
• 문성재, 『한사군은 중국에 있었다』, 우리역사연구재단, 2016. |
『낙랑군 연구』는 기존 연구와 차별화된, 낙랑군에 대한 새로운 역사 해석을 제시하는 책이다. 저자의 10년 연구 성과가 고스란히 담긴 논문을 기본으로 하여, 논문이 나온 후 2년 가까이 새로 발굴된 자료를 바탕으로 내용을 추가하고 도판과 지도 등 각종 자료를 대폭 보강하였다. 이 책은 문헌 사료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최근에서야 정리되기 시작한 일제 강점기 발굴 조사 자료와 해방 후 북한의 조사 성과 등의 고고학 자료에 주목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낙랑군의 역사적 성격에 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도하였다. 또한 1970년대 이후 중국에서 발굴된 한대 분묘와의 비교를 통해 중원 문화와 낙랑 문화의 차이점과 유사점을 짚어내고 낙랑군의 독자성을 밝히고 있다. 1부에서는 고조선 멸망 이후 한사군의 설치 배경 및 한의 동방정책에 대한 내용을 다루었다. 2부에서는 낙랑군의 통치구조 및 지배 세력에 대한 내용을 담았다.
『한국 고대사 산책』의 2부 ‘공간: 그때와 지금’의 8장 ‘낙랑군 식민지설은 식민사학의 논리’에서는 기원전 108년에 고조선 멸망 이후 한반도에 설치되었다는 한사군설을 비판하고, ‘한사군’이라는 용어가 일본 제국주의 시대 역사학자에 의해서 처음 사용되었다고 전한다. 이후에 역사학자들이 이 이론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한사군의 한반도 설치가 정설처럼 되었음을 비판하고 있다. 2014년 북경교외 삼합장촌에서 발견된 1,500년 전 무덤에서 “낙랑군 조선현인(朝鮮縣人) 한현도(韓顯度)”라 쓰인 벽돌 명문이 출토되었다. 이 발견을 계기로 이제 고조선, 한사군 등 한국고대사의 주요 쟁점들을 둘러싼 기존의 주장에서 크나큰 인식의 전환이 불가피해졌으나, 중국과 국내 학계는 지금까지도 이에 대해 애써 침묵하면서 구태의연한 ‘고조선재한반도설’ 및 ‘낙랑군재평양설’만 고수하고 있다.
『한사군은 중국에 있었다』는 이를 논리적으로 비판하며 한사군은 중국에 있었음을 새롭게 입증하였다. 저자는 이 책에서 고조선-한나라 전쟁, 만리장성, 낙랑군 등, 고대사 속의 주요한 키워드들을 몇 개의 장으로 구성하고 100년 가까이 논란이 되어 왔던 한국고대사 속 쟁점들을 차례로 복기하면서 기존의 정설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 낙랑공주와 호동왕자의 사랑이야기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2: 번역편』,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2. |
『역주 삼국사기 2: 번역편』은 1145년 김부식 등이 편찬한 신라, 고구려, 백제 삼국의 역사서 『삼국사기』의 번역본이다. 「고구려본기」의 대무신왕조에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에 대한 원문 및 번역본이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