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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인들은 기원전 2333년 한반도에 세워진 [[고조선]]을 민족 최초의 국가로 생각한다. 또한 [[고조선]]을 세운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여기고, 그가 나라를 세운 | + | 한국인들은 기원전 2333년 한반도에 세워진 [[고조선]]을 민족 최초의 국가로 생각한다. 또한 [[고조선]]을 세운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여기고, 그가 나라를 세운 것으로 추측되는 개천절(10월 3일)을 국경일로 삼고 있다. 그런데 중국의 역사서 가운데에는 중국 은나라 사람인 기자(箕子)가 한반도로 들어가 [[고조선]]을 세웠다는 서술이 있고, 외국인들 중에는 이를 역사적 사실로 아는 사람들도 있다. 기자는 누구이며 한국 사람들은 기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
− | [[파일:2-1. AKS 기자도.jpg|thumb|600px|center|기자도(한응검이 평양 인현서원에서 모사한 것으로 오른쪽으로부터 태공, 소공, 사관, 무왕, 기자 등이다. 개인 소장.)<ref>사진출처:노태돈,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8388 기자동래설]",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 [[파일:2-1. AKS 기자도.jpg|thumb|600px|center|기자도(한응검이 평양 인현서원에서 모사한 것으로 오른쪽으로부터 태공, 소공, 사관, 무왕, 기자 등이다. 개인 소장.)<ref>사진출처: 노태돈,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8388 기자동래설]",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 중국의 역사서 『[[상서|상서(尙書)]]』, 『[[논어|논어(論語)]]』 등에는 기자가 기원전 1000년 전후 은나라의 현자였다고 한다. 기자가 한반도의 지배자가 되었다는 기술은 기원전 3세기 이후에 쓰인 『[[상서대전|상서대전(尙書大傳)]]』이나 『[[사기|사기(史記)]]』 같은 책에 나온다. 이들 책에 따르면 기자는 은나라 감옥에 갇혀 있다가 [[주 무왕|주나라 무왕(武王)]]이 은나라를 멸망시킨 후 석방되었다고 한다. 『[[사기]]』에서는 [[무왕]]이 기자를 조선왕에 봉해주었다고 하며, 『[[상서대전]]』은 기자가 [[무왕]]이 이끄는 주나라 군대를 피해 일족을 이끌고 한반도로 옮겨갔다고 하였다. | + | 중국의 역사서 『[[상서|상서(尙書)]]』, 『[[논어|논어(論語)]]』 등에는 기자가 기원전 1000년 전후 은나라의 현자였다고 한다. 기자가 한반도의 지배자가 되었다는 기술은 기원전 3세기 이후에 쓰인 『[[상서대전|상서대전(尙書大傳)]]』이나 『[[사기|사기(史記)]]』 같은 책에 나온다. 이들 책에 따르면 기자는 은나라 감옥에 갇혀 있다가 [[주 무왕|주나라 무왕(武王)]]이 은나라를 멸망시킨 후 석방되었다고 한다. 『[[사기]]』에서는 [[주 무왕|무왕]]이 기자를 조선왕에 봉해주었다고 하며, 『[[상서대전]]』은 기자가 [[주 무왕|무왕]]이 이끄는 주나라 군대를 피해 일족을 이끌고 한반도로 옮겨갔다고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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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의 역사서에서는 고려시대 『[[삼국유사|삼국유사(三國遺事)]]』에 처음으로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기자를 [[고조선]]의 일부로 보았을 뿐, [[고조선]]을 멸망시켰거나 새로운 왕조를 세운 지배자로 보지 않았다. 『[[제왕운기|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도 기자를 [[단군]]의 | + | 한국의 역사서에서는 고려시대 『[[삼국유사|삼국유사(三國遺事)]]』에 처음으로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기자를 [[고조선]]의 일부로 보았을 뿐, [[고조선]]을 멸망시켰거나 새로운 왕조를 세운 지배자로 보지 않았다. 『[[제왕운기|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도 기자를 [[단군]]의 계승자인 후조선으로 지칭하고 있다. 한국인들에게 기자가 중요해진 것은 한반도가 몽골의 침략을 받았던 13세기 이후이다. 거대한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우면서 강렬한 민족의식이 생겨났으며, 그 결과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과 [[단군]]을 본격적으로 숭배하는 전통이 자리를 잡았다. [[고조선]]을 재조명하는 과정에서 [[고조선]]에 중국의 문물을 전해준 기자도 함께 주목을 받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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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러나 지금 한국에서 기자와 ‘기자의 조선’은 역사적 사실로 인정되지 않는다. 기원전 10세기 경 중국 황하유역과 [[고조선]]이 있는 한반도 북쪽의 이동거리와 양쪽 지역의 청동기 문화에 유사성이 전혀 없다는 고고학적 견해가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기자의 실체를 두고 여러 가지 견해를 제시하며 고대 한반도 역사의 한 퍼즐을 맞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 유력한 설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기자와 기자조선을 한국의 자주성과 한국문화의 독자성을 훼손하는 사례로 보는 학자들도 많다. 다만 일부 학자들은 기자와 기자조선의 실체와 상관없이 이러한 기록이 전해지는 그 자체에 주목하여 고대 한국의 문화가 형성될 때 중국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음을 보여주는 한 | + | 그러나 지금 한국에서 기자와 ‘기자의 조선’은 역사적 사실로 인정되지 않는다. 기원전 10세기 경 중국 황하유역과 [[고조선]]이 있는 한반도 북쪽의 이동거리와 양쪽 지역의 청동기 문화에 유사성이 전혀 없다는 고고학적 견해가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기자의 실체를 두고 여러 가지 견해를 제시하며 고대 한반도 역사의 한 퍼즐을 맞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 유력한 설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기자와 기자조선을 한국의 자주성과 한국문화의 독자성을 훼손하는 사례로 보는 학자들도 많다. 다만 일부 학자들은 기자와 기자조선의 실체와 상관없이 이러한 기록이 전해지는 그 자체에 주목하여 고대 한국의 문화가 형성될 때 중국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음을 보여주는 한 사례로서 이야기한다. |
− | 북한에서 펴낸 『고조선력사개관』에서는 기원전 12~11세기에는 [[고조선]]이 대릉하, 요하의 상류 | + | 북한에서 펴낸 『고조선력사개관』에서는 기원전 12~11세기에는 [[고조선]]이 대릉하, 요하의 상류 지역까지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기자가 스스로 와서 왕이 될 수 없었다고 말한다. 또한 중국 주변 이민족의 시조를 모두 중국의 고대 성현으로 기록하는 중국 사학자 특유의 중화의식을 지적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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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대 중국 은나라 사람이 한반도에 들어와 고조선을 세웠다는 ‘기자동래설’을 이해하기에 앞서 한반도에 세워진 최초의 국가 고조선에 대한 이해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 고대사 산책』'''의 2부 ‘공간: 그때와 지금’의 7장 ‘고조선의 중심지와 영역’에서는 한반도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과 당시 그들에 속한 영역이 그림과 지도로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또한, 3부 ‘소속: 출신과 국적’의 13장 ‘기자 조선의 실재 여부’에서는 기자 조선이 역사적으로 실재한 것인지에 대한 여부와 기자 조선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다루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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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년 뒤인 고려 충렬왕 13년 이승휴가 64세 때 삼척의 두타산에 은거하며 저술한 서사시인 '''『제왕운기』'''에서도 기자를 단군의 계승자로 후조선으로 지칭하고 있다. 한국인들에게 기자가 중요해진 것은 한반도가 몽골의 침략을 받았던 13세기 이후이다. 거대한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우면서 강렬한 민족의식이 생겨났으며, 그 결과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과 단군을 본격적으로 숭배하는 전통이 자리를 잡았다. 고조선을 재조명하는 과정에서 고조선에 중국의 문물을 전해준 기자도 함께 주목을 받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경수의 저서는 '''『제왕운기』'''를 소재로 한 논문과 제왕운기의 원전 번역을 함께 수록한 책으로, 이 책의 5장 제왕운기 상권의 번역본을 참조할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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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조선 신화에서 역사로』'''의 3장에서는 한국의 문헌 및 중국에서 발굴된 유물 가운데 기자 조선과 관련된 것만을 뽑아내어 실증적으로 분석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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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 조선과 관련된 연구서가 궁금하다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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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문헌1=김종서, 『고조선으로 날조되어 온 기자 위만 조선 연구』, 한국학연구원, 200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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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조선으로 날조되어 온 기자 위만 조선 연구』'''는 책 제목 그대로 고조선으로 날조되어 온 기자ㆍ위만조선을 연구하였다. 단군조선은 기자조선에 멸망당한 사실이 없었고 기자조선은 존재한 적도 없었던, 사대주의자들의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던 국가이며, 한사군은 한반도ㆍ요동지방에 존재한 한나라의 군현이 아니라 하북성 지역에 있었으며, 따라서 한반도는 중국의 식민 지배를 받은 적이 없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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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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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한국에 대한 제논의]] | [[분류:한국에 대한 제논의]] |
2018년 2월 10일 (토) 18:57 기준 최신판
기자: 한국 유교 문명의 기원론
은나라의 현자 기자
한국인들은 기원전 2333년 한반도에 세워진 고조선을 민족 최초의 국가로 생각한다. 또한 고조선을 세운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여기고, 그가 나라를 세운 것으로 추측되는 개천절(10월 3일)을 국경일로 삼고 있다. 그런데 중국의 역사서 가운데에는 중국 은나라 사람인 기자(箕子)가 한반도로 들어가 고조선을 세웠다는 서술이 있고, 외국인들 중에는 이를 역사적 사실로 아는 사람들도 있다. 기자는 누구이며 한국 사람들은 기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중국의 역사서 『상서(尙書)』, 『논어(論語)』 등에는 기자가 기원전 1000년 전후 은나라의 현자였다고 한다. 기자가 한반도의 지배자가 되었다는 기술은 기원전 3세기 이후에 쓰인 『상서대전(尙書大傳)』이나 『사기(史記)』 같은 책에 나온다. 이들 책에 따르면 기자는 은나라 감옥에 갇혀 있다가 주나라 무왕(武王)이 은나라를 멸망시킨 후 석방되었다고 한다. 『사기』에서는 무왕이 기자를 조선왕에 봉해주었다고 하며, 『상서대전』은 기자가 무왕이 이끄는 주나라 군대를 피해 일족을 이끌고 한반도로 옮겨갔다고 하였다.
한국 역사에 등장하는 기자
한국의 역사서에서는 고려시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처음으로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기자를 고조선의 일부로 보았을 뿐, 고조선을 멸망시켰거나 새로운 왕조를 세운 지배자로 보지 않았다. 『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도 기자를 단군의 계승자인 후조선으로 지칭하고 있다. 한국인들에게 기자가 중요해진 것은 한반도가 몽골의 침략을 받았던 13세기 이후이다. 거대한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우면서 강렬한 민족의식이 생겨났으며, 그 결과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과 단군을 본격적으로 숭배하는 전통이 자리를 잡았다. 고조선을 재조명하는 과정에서 고조선에 중국의 문물을 전해준 기자도 함께 주목을 받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기자를 유교와 연관시켜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기자가 기원전 1000년 경에 주, 은나라로부터 한반도로 와서 중국 문화를 전해주었으며, 이는 한반도 유학의 역사가 중국만큼이나 오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여겼다. 중국 본토가 오랑캐인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에 의해 정복당했기 때문에 유교 문화의 정수는 조선에서만 유지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기자’와 ‘기자조선’이 언급되었던 것이다.
역사로 인정받지 못하는 기자
그러나 지금 한국에서 기자와 ‘기자의 조선’은 역사적 사실로 인정되지 않는다. 기원전 10세기 경 중국 황하유역과 고조선이 있는 한반도 북쪽의 이동거리와 양쪽 지역의 청동기 문화에 유사성이 전혀 없다는 고고학적 견해가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기자의 실체를 두고 여러 가지 견해를 제시하며 고대 한반도 역사의 한 퍼즐을 맞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 유력한 설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기자와 기자조선을 한국의 자주성과 한국문화의 독자성을 훼손하는 사례로 보는 학자들도 많다. 다만 일부 학자들은 기자와 기자조선의 실체와 상관없이 이러한 기록이 전해지는 그 자체에 주목하여 고대 한국의 문화가 형성될 때 중국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음을 보여주는 한 사례로서 이야기한다.
북한에서 펴낸 『고조선력사개관』에서는 기원전 12~11세기에는 고조선이 대릉하, 요하의 상류 지역까지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기자가 스스로 와서 왕이 될 수 없었다고 말한다. 또한 중국 주변 이민족의 시조를 모두 중국의 고대 성현으로 기록하는 중국 사학자 특유의 중화의식을 지적하였다.
관련항목
- 고조선
- 단군
- 주 무왕(周 武王)
- 『상서(尙書)』
- 『논어(論語)』
- 『상서대전(尙書大傳)』
- 『사기(史記)』
- 『삼국유사(三國遺事)』
- 『제왕운기(帝王韻紀)』
참고문헌
- 한반도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에 대해 알고 싶다면...
• 한국역사연구회, 『한국 고대사 산책』, 역사비평사, 2017. |
• 전국역사교사모임, 『외국인을 위한 한국사』, 휴머니스트, 2010. |
• 이형석, 이종호 지음, 『고조선 신화에서 역사로』, 우리책, 2014. |
• 윤내현, 『고조선, 우리 역사의 탄생』, 만권당, 2016. |
고대 중국 은나라 사람이 한반도에 들어와 고조선을 세웠다는 ‘기자동래설’을 이해하기에 앞서 한반도에 세워진 최초의 국가 고조선에 대한 이해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 고대사 산책』의 2부 ‘공간: 그때와 지금’의 7장 ‘고조선의 중심지와 영역’에서는 한반도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과 당시 그들에 속한 영역이 그림과 지도로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또한, 3부 ‘소속: 출신과 국적’의 13장 ‘기자 조선의 실재 여부’에서는 기자 조선이 역사적으로 실재한 것인지에 대한 여부와 기자 조선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다루고 있다.
『외국인을 위한 한국사』는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외국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전근대시기 역사와 바깥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한국인의 생활과 문화를 폭넓게 다루고 있다. 한국어와 영어로 동시 출간되었으며, 한국사의 전개과정을 총 13개의 장으로 구성하였다. 그 가운데 1장은 한국 역사의 시작을 다루고 있는데, 1장의 2절과 3절을 주의 깊게 읽어볼 필요가 있다.
『고조선 신화에서 역사로』에서는 한민족의 기원을 추적하고 동북공정의 실체를 밝혔으며 고조선의 설립부터 멸망까지를 밝힌 연구서이다.
『고조선, 우리 역사의 탄생』은 고조선에 대한 오랜 ‘오만과 편견’을 깨주는 훌륭한 ‘고조선 입문서’이다. 우리가 ‘신화’가 아닌 ‘역사’로서 고조선을 받아들이기 위해 가질 수밖에 없는 가장 중요하고도 당연한 의문들, 즉 단군은 누구인가, 단군사화는 무엇을 말해주나, 고조선이라는 명칭은 무슨 뜻인가, 고조선은 언제 건국되었나, 고조선은 얼마나 넓은 나라였나, 고조선 사람들의 경제 활동과 생활 모습, 과학기술과 문학, 예술, 종교는 어떠했나, 고조선의 대외관계는 어떠했나, 그리고 기자조선·위만조선·한사군은 어디에 있었나 등의 의문을 찬찬히 풀어준다.
- 기자가 기록되어 있는 한국의 원전 사료가 궁금하다면...
• 일연 지음, 문경현 옮김, 『역주 삼국유사』, 민속원, 2015. |
• 김경수, 『제왕운기』, 역락, 1999. |
• 이형석, 이종호 지음, 『고조선 신화에서 역사로』, 우리책, 2014. |
고려 충렬왕 때 승려인 일연이 편찬한 『삼국유사』에 처음으로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기자를 고조선의 일부로 보았을 뿐, 고조선을 멸망시켰거나 새로운 왕조를 세운 지배자로 보지 않았다. 『역주 삼국유사』는 최근에 나온 『삼국유사』의 번역 및 주석을 달아놓은 책으로, 1책의 기이편에서 기자 조선과 관련된 원전 사료 및 역주를 확인할 수 있다.
6년 뒤인 고려 충렬왕 13년 이승휴가 64세 때 삼척의 두타산에 은거하며 저술한 서사시인 『제왕운기』에서도 기자를 단군의 계승자로 후조선으로 지칭하고 있다. 한국인들에게 기자가 중요해진 것은 한반도가 몽골의 침략을 받았던 13세기 이후이다. 거대한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우면서 강렬한 민족의식이 생겨났으며, 그 결과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과 단군을 본격적으로 숭배하는 전통이 자리를 잡았다. 고조선을 재조명하는 과정에서 고조선에 중국의 문물을 전해준 기자도 함께 주목을 받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경수의 저서는 『제왕운기』를 소재로 한 논문과 제왕운기의 원전 번역을 함께 수록한 책으로, 이 책의 5장 제왕운기 상권의 번역본을 참조할 수 있다.
『고조선 신화에서 역사로』의 3장에서는 한국의 문헌 및 중국에서 발굴된 유물 가운데 기자 조선과 관련된 것만을 뽑아내어 실증적으로 분석하였다.
- 기자 조선과 관련된 연구서가 궁금하다면...
• 김종서, 『고조선으로 날조되어 온 기자 위만 조선 연구』, 한국학연구원, 2004. |
『고조선으로 날조되어 온 기자 위만 조선 연구』는 책 제목 그대로 고조선으로 날조되어 온 기자ㆍ위만조선을 연구하였다. 단군조선은 기자조선에 멸망당한 사실이 없었고 기자조선은 존재한 적도 없었던, 사대주의자들의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던 국가이며, 한사군은 한반도ㆍ요동지방에 존재한 한나라의 군현이 아니라 하북성 지역에 있었으며, 따라서 한반도는 중국의 식민 지배를 받은 적이 없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