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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초고왕은 지방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영역을 나누어 지방 통치 조직을 만들고 지방관을 파견하는 담로제(檐魯制)를 실시하였다. 이로써 지방 통치가 안정되었고 왕은 중앙 집권화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강력한 왕권을 확립한 후 근초고왕은 대외 정복 활동을 활발하게 펴나갔다. 남쪽으로는 마한의 잔여 세력을 복속시킴으로써 전라도 지역 전부를 지배 영역으로 확보하였다. 그리고 낙동강 서쪽의 가야 세력도 백제의 영향권 안에 넣었다. | 근초고왕은 지방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영역을 나누어 지방 통치 조직을 만들고 지방관을 파견하는 담로제(檐魯制)를 실시하였다. 이로써 지방 통치가 안정되었고 왕은 중앙 집권화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강력한 왕권을 확립한 후 근초고왕은 대외 정복 활동을 활발하게 펴나갔다. 남쪽으로는 마한의 잔여 세력을 복속시킴으로써 전라도 지역 전부를 지배 영역으로 확보하였다. 그리고 낙동강 서쪽의 가야 세력도 백제의 영향권 안에 넣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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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초고왕 당시 영토 확장 관련 지도를 제시할 것 | - 근초고왕 당시 영토 확장 관련 지도를 제시할 것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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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원고'''== | ||
+ | 근초고왕(?∼375)은 346년부터 375년까지 재위했던 백제의 왕이다. ‘근초고’라는 이름은 ‘초고와 가까운’ 혹은 ‘초고와 닮은’이라는 뜻이다. 당시 백제에는 왕위를 둘러싼 내분이 일고 있었다. 개루-고이-책계-분서로 이어지는 세력과 초고-구수-비류로 연결되는 세력으로 나뉘어 세력 다툼을 했던 것이다. 책계왕과 분서왕이 피살된 후 비류왕이 왕위에 올랐지만 내분은 진정되지 않았다. 비류왕이 죽은 뒤 개루-고이계의 계왕이 왕위에 올랐지만 2년 만에 숨지고, 비류왕의 둘째 아들인 근초고왕이 즉위했다. 초고왕계를 계승한 근초고왕은 ‘초고’ 앞에 가깝다는 뜻의 ‘근(近)’ 자를 붙여 왕명을 지음으로써 왕권의 계통을 확실히 하려고 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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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근초고왕은 지방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영역을 나누어 지방 통치 조직을 만들고 지방관을 파견하는 담로제(檐魯制)를 실시하였다. 이로써 지방 통치가 안정되었고 왕은 중앙 집권화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강력한 왕권을 확립한 후 근초고왕은 대외 정복 활동을 활발하게 펴나갔다. 남쪽으로는 마한의 잔여 세력을 복속시킴으로써 전라도 지역 전부를 지배 영역으로 확보하였다. 그리고 낙동강 서쪽의 가야 세력도 백제의 영향권 안에 넣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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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쪽 지역을 평정한 후 근초고왕이 북쪽으로 진출하면서 남진 정책을 펴던 고구려와 대립하게 되었다. 371년 정예 기병 3만 명을 거느리고 나선 근초고왕은 평양성(平壤城) 전투에서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백제 사상 최대의 영토를 차지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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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또 중국이 호족(胡族)의 침입으로 분열된 시기를 이용하여 랴오시[遼西] 지방으로 진출해 그곳에 백제군(百濟郡)을 설치하였다. 근초고왕 시대에 이른바 ‘대륙 백제’가 만들어진 것이다. 근초고왕은 일본 쪽으로도 활발히 진출해 일본 내의 백제 계통 세력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일본의 이소노가미 신궁(石上神宮)에 간직되어 온 ‘칠지도(七支刀)’는 백제와 일본 내 백제 계통 세력과의 관계에 대한 물적 증거이다. 칠지도에 금석문자로 새겨진 명문(銘文)의 해석에는 다양한 의견이 있다. 하지만 이 칠지도가 근초고왕 때 만들어져 백제의 후왕(侯王 : 제후)인 왜왕(倭王)에게 하사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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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시기 백제는 상업 활동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중국 한(漢)나라 이후 중국 황해 연안에서 한반도의 서남 해안으로, 그리고 다시 일본 열도로 이어지는 해상 교통로는 중요한 무역로였다. 그런데 낙랑군과 대방군이 고구려에 의해 멸망되고 북중국에는 수로(水路)에 익숙하지 못한 호족이 들어서게 되자, 이 전통적인 해상 교통로와 무역로는 백제가 차지하게 되었다. 이로써 백제는 랴오시 지역에 설치한 무역 기지와 한반도와 일본에 살던 백제계 세력들을 연결하는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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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시의 활발한 해상 무역의 흔적은 전라북도 부안 죽막동의 제사 유적에서 일부 찾아볼 수 있다. 삼국 시대의 토기와 석제 모조품 등이 포함된 죽막동 제사 유적은 변산반도의 서쪽 해안 절벽 위에서 발견됐다. 주변 경작지에서도 당시 토기와 후대의 기와 조각들이 수습되었다. 이는 해상 무역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바다에 제를 올리던 당시의 신앙 유적일 것으로 추정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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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근초고왕 시대에 백제는 여러 가지 새로운 문물과 문화를 일본으로 전해주었다. 한 예로는 왕인(王仁)과 아직기(阿直岐) 등을 일본에 보내 <천자문>과 <논어>를 전해 줌으로써 일본에 유학 사상을 일으킨 것을 들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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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왕권이 확립되고 지배 영역이 확대되었으며 통치 조직이 정비되어 문화가 발전하자, 근초고왕은 박사 고흥(高興)에게 <서기(書記)>라는 국사 책을 편찬하게 하였다. <서기> 편찬은 왕실 중심의 계보를 정리하고 왕실 전통의 유구성 · 신성성을 과시하여 왕권의 위엄을 돋보이게 하려는 목적에서 이뤄졌다. 이렇게 근초고왕 시대는 백제 역사상 최대 전성기를 이룬 시기였다. | ||
=='''교열본'''== | =='''교열본'''== |
2017년 11월 20일 (월) 15:33 기준 최신판
제목 | 백제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이룬 근초고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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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 황인희 |
교열자 | 유안리 |
인물/기관/단체 | 백제, 책계왕, 분서왕, 비류왕, 계왕, 초고왕, 개루-고이-책계-분서, 초구-구수-비류, 마한, 가야, 고국원왕, 호족, 백제군, 왜왕, 낙랑군, 대방군, 왕인, 아직기, 고흥 |
장소/공간 | 전라도, 낙동강, 평양성, 랴오시, 이소노가미 신궁, 황해, 한반도, 전라북도 부안 죽막동, 변산반도 |
사건 | 평양성 전투 |
개념용어 | 담로제, 남진 정책, 칠지도, 대륙 백제, 금석문자, 명문, 후왕, <천자문>, <논어>, <서기> |
물품/도구/유물 | 칠지도, 전라북도 부안 죽막동의 제사 유적 |
목차
1차 원고
근초고왕(?∼375)은 346년부터 375년까지 재위했던 백제의 왕이다. ‘근초고’라는 이름은 ‘초고와 가까운’ 혹은 ‘초고와 닮은’이라는 뜻이다. 당시 백제에는 왕위를 둘러싼 내분이 일고 있었다. 개루-고이-책계-분서로 이어지는 세력과 초구-구수-비류로 연결되는 세력으로 나뉘어 세력 다툼을 했던 것이다. 책계왕과 분서왕이 피살된 후 비류왕이 왕위에 올랐지만 내분은 진정되지 않았다. 비류왕이 죽은 뒤 개루-고이계의 계왕이 왕위에 올랐지만 2년 만에 숨지고, 비류왕의 둘째 아들인 근초고왕이 즉위했다. 초고왕계를 계승한 근초고왕은 ‘초고’ 앞에 가깝다는 뜻의 ‘근(近)’ 자를 붙여 왕명을 지음으로써 왕권의 계통을 확실히 하려고 했다.
근초고왕은 지방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영역을 나누어 지방 통치 조직을 만들고 지방관을 파견하는 담로제(檐魯制)를 실시하였다. 이로써 지방 통치가 안정되었고 왕은 중앙 집권화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강력한 왕권을 확립한 후 근초고왕은 대외 정복 활동을 활발하게 펴나갔다. 남쪽으로는 마한의 잔여 세력을 복속시킴으로써 전라도 지역 전부를 지배 영역으로 확보하였다. 그리고 낙동강 서쪽의 가야 세력도 백제의 영향권 안에 넣었다.
남쪽 지역을 평정한 후 근초고왕이 북쪽으로 진출하면서 남진 정책을 펴던 고구려와 대립하게 되었다. 371년 정예 기병 3만 명을 거느리고 나선 근초고왕은 평양성(平壤城) 전투에서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백제 사상 최대의 영토를 차지하였다.
또 중국이 호족(胡族)의 침입으로 분열된 시기를 이용하여 랴오시[遼西] 지방으로 진출해 그곳에 백제군(百濟郡)을 설치하였다. 근초고왕 시대에 이른바 ‘대륙 백제’가 만들어진 것이다. 근초고왕은 일본 쪽으로도 활발히 진출해 일본 내의 백제 계통 세력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일본의 이소노가미 신궁(石上神宮)에 간직되어 온 ‘칠지도(七支刀)’는 백제와 일본 내 백제 계통 세력과의 관계에 대한 물적 증거이다. 칠지도에 금석문자로 새겨진 명문(銘文)의 해석에는 다양한 의견이 있다. 하지만 이 칠지도가 근초고왕 때 만들어져 백제의 후왕(侯王 : 제후)인 왜왕(倭王)에게 하사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이 시기 백제는 상업 활동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중국 한(漢)나라 이후 중국 황해 연안에서 한반도의 서남 해안으로, 그리고 다시 일본 열도로 이어지는 해상 교통로는 중요한 무역로였다. 그런데 낙랑군과 대방군이 고구려에 의해 멸망되고 북중국에는 수로(水路)에 익숙하지 못한 호족이 들어서게 되자, 이 전통적인 해상 교통로와 무역로는 백제가 차지하게 되었다. 이로써 백제는 랴오시 지역에 설치한 무역 기지와 한반도와 일본에 살던 백제계 세력들을 연결하는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당시의 활발한 해상 무역의 흔적은 전라북도 부안 죽막동의 제사 유적에서 일부 찾아볼 수 있다. 삼국 시대의 토기와 석제 모조품 등이 포함된 죽막동 제사 유적은 변산반도의 서쪽 해안 절벽 위에서 발견됐다. 주변 경작지에서도 당시 토기와 후대의 기와 조각들이 수습되었다. 이는 해상 무역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바다에 제를 올리던 당시의 신앙 유적일 것으로 추정된다.
근초고왕 시대에 백제는 여러 가지 새로운 문물과 문화를 일본으로 전해주었다. 한 예로는 왕인(王仁)과 아직기(阿直岐) 등을 일본에 보내 <천자문>과 <논어>를 전해 줌으로써 일본에 유학 사상을 일으킨 것을 들 수 있다.
왕권이 확립되고 지배 영역이 확대되었으며 통치 조직이 정비되어 문화가 발전하자, 근초고왕은 박사 고흥(高興)에게 <서기(書記)>라는 국사 책을 편찬하게 하였다. <서기> 편찬은 왕실 중심의 계보를 정리하고 왕실 전통의 유구성 · 신성성을 과시하여 왕권의 위엄을 돋보이게 하려는 목적에서 이뤄졌다. 이렇게 근초고왕 시대는 백제 역사상 최대 전성기를 이룬 시기였다.
출처 및 관련자료
출처
- 윤재운,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 청아출판사(출판연도 추가)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관련자료
- 『삼국사기』
- 『일본서기(日本書紀)』
- 『한국고대사의 연구』(이홍직, 신구문화사, 1971)
- 『한국고대사연구』(이병도, 박영사, 1976)
- 『백제정치사연구』(노중국, 일조각, 1988)
- 「백제왕위계승고」(이기백, 『역사학보』 11, 1959)
- 「백제의 요서경략」(김상기, 『백산학보』 3, 1967)
- 「백제군의 화북진출과 그 배경」(방선주, 『백산학보』 11, 1971)
- 「백제사회와 그 문화」(김철준, 『무녕왕릉발굴조사보고서』, 1973)
- 「한성시대 백제의 지방통치체제-담로체제를 중심으로-」(노중국,『변태섭박사화갑기념사학논총』, 1985)
연구원 검토
검토의견 | |
• 근초고왕이 활동했던 시기의 한반도 지도 및 유적을 추가하고 백제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이룬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시각자료도 추가할 필요가 있다. | |
• - 초구-구수-비류... 초고왕계를 계승한 근초고왕은... →초구가 아니라 초고입니다. - 근초고왕 당시 영토 확장 관련 지도를 제시할 것 |
|
수정원고
근초고왕(?∼375)은 346년부터 375년까지 재위했던 백제의 왕이다. ‘근초고’라는 이름은 ‘초고와 가까운’ 혹은 ‘초고와 닮은’이라는 뜻이다. 당시 백제에는 왕위를 둘러싼 내분이 일고 있었다. 개루-고이-책계-분서로 이어지는 세력과 초고-구수-비류로 연결되는 세력으로 나뉘어 세력 다툼을 했던 것이다. 책계왕과 분서왕이 피살된 후 비류왕이 왕위에 올랐지만 내분은 진정되지 않았다. 비류왕이 죽은 뒤 개루-고이계의 계왕이 왕위에 올랐지만 2년 만에 숨지고, 비류왕의 둘째 아들인 근초고왕이 즉위했다. 초고왕계를 계승한 근초고왕은 ‘초고’ 앞에 가깝다는 뜻의 ‘근(近)’ 자를 붙여 왕명을 지음으로써 왕권의 계통을 확실히 하려고 했다.
근초고왕은 지방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영역을 나누어 지방 통치 조직을 만들고 지방관을 파견하는 담로제(檐魯制)를 실시하였다. 이로써 지방 통치가 안정되었고 왕은 중앙 집권화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강력한 왕권을 확립한 후 근초고왕은 대외 정복 활동을 활발하게 펴나갔다. 남쪽으로는 마한의 잔여 세력을 복속시킴으로써 전라도 지역 전부를 지배 영역으로 확보하였다. 그리고 낙동강 서쪽의 가야 세력도 백제의 영향권 안에 넣었다.
남쪽 지역을 평정한 후 근초고왕이 북쪽으로 진출하면서 남진 정책을 펴던 고구려와 대립하게 되었다. 371년 정예 기병 3만 명을 거느리고 나선 근초고왕은 평양성(平壤城) 전투에서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백제 사상 최대의 영토를 차지하였다.
또 중국이 호족(胡族)의 침입으로 분열된 시기를 이용하여 랴오시[遼西] 지방으로 진출해 그곳에 백제군(百濟郡)을 설치하였다. 근초고왕 시대에 이른바 ‘대륙 백제’가 만들어진 것이다. 근초고왕은 일본 쪽으로도 활발히 진출해 일본 내의 백제 계통 세력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일본의 이소노가미 신궁(石上神宮)에 간직되어 온 ‘칠지도(七支刀)’는 백제와 일본 내 백제 계통 세력과의 관계에 대한 물적 증거이다. 칠지도에 금석문자로 새겨진 명문(銘文)의 해석에는 다양한 의견이 있다. 하지만 이 칠지도가 근초고왕 때 만들어져 백제의 후왕(侯王 : 제후)인 왜왕(倭王)에게 하사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이 시기 백제는 상업 활동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중국 한(漢)나라 이후 중국 황해 연안에서 한반도의 서남 해안으로, 그리고 다시 일본 열도로 이어지는 해상 교통로는 중요한 무역로였다. 그런데 낙랑군과 대방군이 고구려에 의해 멸망되고 북중국에는 수로(水路)에 익숙하지 못한 호족이 들어서게 되자, 이 전통적인 해상 교통로와 무역로는 백제가 차지하게 되었다. 이로써 백제는 랴오시 지역에 설치한 무역 기지와 한반도와 일본에 살던 백제계 세력들을 연결하는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당시의 활발한 해상 무역의 흔적은 전라북도 부안 죽막동의 제사 유적에서 일부 찾아볼 수 있다. 삼국 시대의 토기와 석제 모조품 등이 포함된 죽막동 제사 유적은 변산반도의 서쪽 해안 절벽 위에서 발견됐다. 주변 경작지에서도 당시 토기와 후대의 기와 조각들이 수습되었다. 이는 해상 무역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바다에 제를 올리던 당시의 신앙 유적일 것으로 추정된다.
근초고왕 시대에 백제는 여러 가지 새로운 문물과 문화를 일본으로 전해주었다. 한 예로는 왕인(王仁)과 아직기(阿直岐) 등을 일본에 보내 <천자문>과 <논어>를 전해 줌으로써 일본에 유학 사상을 일으킨 것을 들 수 있다.
왕권이 확립되고 지배 영역이 확대되었으며 통치 조직이 정비되어 문화가 발전하자, 근초고왕은 박사 고흥(高興)에게 <서기(書記)>라는 국사 책을 편찬하게 하였다. <서기> 편찬은 왕실 중심의 계보를 정리하고 왕실 전통의 유구성 · 신성성을 과시하여 왕권의 위엄을 돋보이게 하려는 목적에서 이뤄졌다. 이렇게 근초고왕 시대는 백제 역사상 최대 전성기를 이룬 시기였다.
교열본
근초고왕(?∼375)은 346년부터 375년까지 재위했던 백제의 왕이다. ‘근초고’라는 이름은 ‘초고와 가까운’ 혹은 ‘초고와 닮은’이라는 뜻이다. 당시 백제에는 왕위를 둘러싼 내분이 일고 있었다. 개루-고이-책계-분서로 이어지는 세력과 초고-구수-비류로 연결되는 세력으로 나뉘어 세력 다툼을 했던 것이다. 책계왕과 분서왕이 피살된 후 비류왕이 왕위에 올랐지만 내분은 진정되지 않았다. 비류왕이 죽은 뒤 개루-고이계의 계왕이 왕위에 올랐으나 불과 2년 만에 숨지고, 비류왕의 둘째 아들인 근초고왕이 즉위했다. 초고왕계를 계승한 근초고왕은 ‘초고’ 앞에 가깝다는 뜻의 ‘근(近)’ 자를 붙여 왕명을 지음으로써 왕권의 계통을 확실히 하려고 했다.
백제 최고 전성기의 왕
근초고왕은 지방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영역을 나누어 지방 통치 조직을 만들고 지방관을 파견하는 담로제(檐魯制)를 실시하였다. 이로써 지방 통치가 안정되었고 왕은 중앙 집권화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강력한 왕권을 확립한 후 근초고왕은 대외 정복 활동을 활발하게 펴나갔다. 남쪽으로는 마한의 잔여 세력을 복속시킴으로써 전라도 지역 전부를 지배 영역으로 확보하였다. 그리고 낙동강 서쪽의 가야 세력도 백제의 영향권 안에 넣었다.
남쪽 지역을 평정한 후 근초고왕이 북쪽으로 진출하면서 남진 정책을 펴던 고구려와 대립하게 되었다. 371년 정예 기병 3만 명을 거느리고 나선 근초고왕은 평양성(平壤城) 전투에서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백제 사상 최대의 영토를 차지하였다.
또 중국이 호족(胡族)의 침입으로 분열된 시기를 이용하여 랴오시[遼西] 지방으로 진출해 그곳에 백제군(百濟郡)을 설치하였다. 근초고왕 시대에 이른바 ‘대륙 백제’가 만들어진 것이다. 근초고왕은 일본 쪽으로도 활발히 진출해 일본 내의 백제 계통 세력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일본의 이소노가미 신궁(石上神宮)에 간직되어 온 ‘칠지도(七支刀)’는 백제와 일본 내 백제 계통 세력과의 관계에 대한 물적 증거이다. 칠지도에 금석문자로 새겨진 명문(銘文)의 해석에는 다양한 의견이 있다. 하지만 이 칠지도가 근초고왕 때 만들어져 백제의 후왕(侯王 : 제후)인 왜왕(倭王)에게 하사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활발했던 해상 무역
이 시기 백제는 상업 활동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중국 한(漢)나라 이후 중국 황해 연안에서 한반도의 서남 해안으로, 그리고 다시 일본 열도로 이어지는 해상 교통로는 중요한 무역로였다. 그런데 낙랑군과 대방군이 고구려에 의해 멸망되고 북중국에는 수로(水路)에 익숙하지 못한 호족이 들어서게 되자, 이 전통적인 해상 교통로와 무역로는 백제 차지가 되었다. 이로써 백제는 랴오시 지역에 설치한 무역 기지와 한반도와 일본에 살던 백제계 세력들을 연결하는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당시의 활발한 해상 무역의 흔적은 전라북도 부안 죽막동의 제사 유적에서 일부 찾아볼 수 있다. 삼국 시대의 토기와 석제 모조품 등이 포함된 죽막동 제사 유적은 변산반도의 서쪽 해안 절벽 위에서 발견됐다. 주변 경작지에서도 당시 토기와 후대의 기와 조각들이 수습되었다. 이는 해상 무역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바다에 제를 올리던 당시의 신앙 유적일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에 전한 유학
근초고왕 시대에 백제는 여러 가지 새로운 문물과 문화를 일본으로 전해주었다. 한 예로는 왕인(王仁)과 아직기(阿直岐) 등을 일본에 보내 <천자문>과 <논어>를 전해 줌으로써 일본에 유학 사상을 일으킨 것을 들 수 있다.
왕권이 확립되고 지배 영역이 확대되었으며 통치 조직이 정비되어 문화가 발전하자, 근초고왕은 박사 고흥(高興)에게 <서기(書記)>라는 국사 책을 편찬하게 하였다. <서기> 편찬은 왕실 중심의 계보를 정리하고 왕실 전통의 유구성 · 신성성을 과시하여 왕권의 위엄을 돋보이게 하려는 목적에서 이뤄졌다. 안타깝게도 <서기>는 지금 전하지 않는다. 이렇게 근초고왕 시대는 백제 역사상 최대 전성기를 이룬 시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