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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 원고'''== | ||
+ | *'''제목: 민족의 위기 뒤에 찾아온 태풍의 전야, 해방정국''' | ||
+ | 한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한 것을 계기로 독립을 얻었다. 일본이 패망하기 이전부터 한국은 해외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국내 독립운동을 지휘하는 한편, 국제사회를 향한 독립의 필요성 및 의지를 밝히는 등 적극적으로 독립을 위한 활동을 전개해 왔다. 그 활동은 외교적 활동 뿐만 아니라 무장투쟁과 의열활동 방식 등 다양한 것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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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러나 한국은 해방된 직후 다시 미국과 소련의 군정통치를 경험해야 했다. 한반도를 전쟁 상대국가인 일본의 식민지 영토로써 점령한 미국과 소련은 각각 북위 38도선을 중심으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였다. 그리고 점령군인 자신들의 통치 하에 해방된 한반도의 질서를 확립하고 통제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한국인들은 많은 논란과 갈등 끝에 미군과 소련에 의한 군정통치를 인정하게 되었고 일시적인 신탁통치가 시행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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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지만 이 과정에서 1919년 수립 이후 민족의 독립운동을 주도하고 대표하였던 대한민국의 임시정부는 배제되었다. 신탁통치를 시행하는 미군과 소련 군정은 자신들의 영향력이 충실히 미칠 수 있는 정부가 자신이 점령한 지역에 수립되길 희망하였으며, 때문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양쪽 모두에게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소련 점령지역에서는 김일성이, 미군 점령지역에서는 이승만이 각각 점령군의 비호 아래 가장 우세한 정치인으로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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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초 신탁통치의 계획은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미국과 영국, 그리고 중국과 소련이 참석한 가운데 최장 5년을 넘지 않도록 하고 그 안에 한국의 독립정부를 수립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점령 당사자인 미국과 소련은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을 대표하는 이른바 ‘냉전’의 대표주자로서 각자 한반도에 수립될 독립정부가 자신의 이념에 부합하는 형태이기를 희망하였다. 때문에 신탁통치안의 내용과 같이 미국과 소련의 협의를 통해 독립정부의 수립이 충실히 이행되기는 점점 어려워지게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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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 연장에서 한반도 안에서는 점차 이념에 따른 갈등과 대립이 격화되어갔다. 그리고 38선 이남 지역에서는 ‘반공’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공산진영에 대한 적대감과 적개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일이 많아졌다. 급기야 여수와 순천에서는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것에 반대하는 폭동이 일어났고, 제주에서는 미군정에 반대하는 민중봉기가 일어났는데, 미군정은 이것을 공산세력들이 일으킨 반란과 폭동으로 간주하여 폭력적으로 진압하였다. 그 결과 제주에서는 섬 인구의 10%가 사망할 만큼 민간인에 대한 끔찍한 살육으로까지 이어졌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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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결국 신탁통치 속의 분할점령은 끝내 통일된 단독정부의 수립으로 이어지지 못하였다. 마지막까지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며 노력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도자 김구가 암살되면서 더 이상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막을 수가 없게 되었다. 이에 1948년 8월 남한에서는 이승만을 대통령으로하는 단독정부가 수립되었고 뒤 이어 9월에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하는 북한 단독정부가 수립되었다. 한반도 분단의 고착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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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1950년 6월 25일 소련의 군사적 지원 속에 남한의 공산화를 추진하던 북한 정부는 무력침공을 감행하여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 전세는 일방적으로 남한에 불리하여 개전 3개월 만에 한반도 남단의 낙동강 유역을 제외하고 전 지역이 북한군에게 점령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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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지만 UN의 결의를 통해 국제사회에서 UN군이 파병되었고, 미군이 대대적으로 개입하면서 전세는 역전되었다. 1950년 9월 개시된 인천상륙작전은 전황을 완전히 역전시키는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이제 남한군과 UN군이 거꾸로 북한군을 몰아붙이며 한반도 최북단인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까지 진격하게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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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러나 다시 중국군이 개입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중국군은 수백만명을 동원하여 기습하였고, 이를 막아내지 못하면서 다시 남한군과 UN군은 대대적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그리고 전선은 대략 지금의 휴전선 부근에서 고착되었다. 결국 1953년 7월 27일 양쪽은 휴전에 합의하면서 오늘날 남한과 북한의 분단이 확정되게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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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 이후 현재까지 한반도는 휴전 상태에 놓여있다. 전쟁을 멈추고 있을 뿐 엄밀하게는 아직도 전쟁 중인 상태인 것이다. 3년여간의 전쟁을 거치면서 남북한을 망라하고 거의 대부분의 산업시설과 기반시설들은 초토화될 수밖에 없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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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기에 엄청난 인명피해와 전쟁고아 및 이산가족들, 식량부족에 따른 기근 문제 등은 한국전쟁이 낳은 뼈 아픈 상처와 고통이었다. 때문에 현재는 우발적인 충돌로 인해 다시 전쟁이 발생하지 않도록 휴전선을 기준으로 남북 각각 2km씩, 전체 4km 구간을 비무장지대(DMZ)로 설정하여 대비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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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열본'''== | ||
+ | *'''제목: 민족의 위기 뒤에 찾아온 태풍의 전야, 해방정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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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면면한 독립 운동=== | ||
+ | 한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한 것을 계기로 독립을 얻었다. 일본이 패망하기 이전부터 한국은 해외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국내 독립운동을 지휘하는 한편, 국제사회를 향한 독립의 필요성 및 의지를 밝히는 등 적극적으로 독립을 위한 활동을 전개해 왔다. 그 활동은 외교적 활동뿐만 아니라 무장투쟁과 의열활동 방식 등 다양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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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시정부를 배제한 신탁통치 결정=== | ||
+ | 그러나 한국은 해방된 직후 다시 미국과 소련의 군정통치를 경험해야 했다. 한반도를 전쟁 상대국가인 일본의 식민지 영토로서 점령한 미국과 소련은 각각 북위 38도선을 중심으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였다. 그리고 점령군인 자신들의 통치 하에 해방된 한반도의 질서를 확립하고 통제하고자 하였다. 한국인들은 많은 논란과 갈등 끝에 미군과 소련에 의한 군정통치를 인정하게 되었고 일시적인 신탁통치가 시행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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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지만 이 과정에서 1919년 수립 이후 민족의 독립운동을 주도하고 대표하였던 대한민국의 임시정부는 배제되었다. 신탁통치를 시행하는 미군과 소련 군정은 각기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정부가 자신이 점령한 지역에 수립되길 희망하였다. 이 때문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양쪽 모두에게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소련 점령지역에서는 김일성이, 미군 점령지역에서는 이승만이 각각 점령군의 비호 아래 가장 우세한 정치인으로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다. | ||
+ | |||
+ | ===이념 대립이 불러온 폭력=== | ||
+ | 당초 신탁통치의 계획은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미국과 영국, 그리고 중국과 소련이 참석한 가운데 최장 5년을 넘지 않도록 하고 그 안에 한국의 독립정부를 수립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점령 당사자인 미국과 소련은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을 대표하는 이른바 ‘냉전’의 대표주자로서 각자 한반도에 수립될 독립정부가 자신의 이념에 부합하는 형태이기를 희망하였다. 때문에 신탁통치안의 내용에 충실하게 미국과 소련이 협의를 하여 한반도에 독립정부가 수립된다는 것은 점점 어려워지게 되었다. | ||
+ | |||
+ | 그 연장에서 한반도 안에서는 점차 이념에 따른 갈등과 대립이 격화되어갔다. 그리고 38선 이남 지역에서는 ‘반공’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공산진영에 대한 적대감과 적개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일이 많아졌다. 급기야 여수와 순천에서는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것에 반대하는 폭동이 일어났고, 제주에서는 미군정에 반대하는 민중봉기가 일어났는데, 미군정은 이것을 공산세력들이 일으킨 반란과 폭동으로 간주하여 폭력적으로 진압하였다. 그 결과 제주에서는 섬 인구의 10%가 사망할 만큼 민간인에 대한 끔찍한 살육으로까지 이어졌다. | ||
+ | |||
+ | ===분단 고착과 한국전쟁=== | ||
+ | 결국 신탁통치 속의 분할점령은 끝내 통일된 단독정부의 수립으로 이어지지 못하였다. 마지막까지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며 노력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도자 김구가 암살되면서 더 이상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막을 수가 없게 되었다. 이에 1948년 8월 남한에서는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는 단독정부가 수립되었고 뒤 이어 9월에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하는 북한 단독정부가 수립되었다. 한반도 분단이 고착되는 순간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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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1950년 6월 25일 소련의 군사적 지원 속에 남한의 공산화를 추진하던 북한 정부가 무력침공을 감행하여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 전세는 일방적으로 남한에 불리해져서 개전 3개월 만에 한반도 남단의 낙동강 유역 아래 쪽을 제외한 남한 전 지역이 북한군에게 점령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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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지만 UN의 결의를 통해 국제사회에서 UN군이 파병되었고, 미군이 대대적으로 개입하면서 전세는 역전되었다. 1950년 9월 개시된 인천상륙작전은 전황을 완전히 역전시키는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이제 남한군과 UN군이 거꾸로 북한군을 몰아붙이며 한반도 최북단인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까지 진격하게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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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러나 중국군이 개입하면서 상황은 또 다시 달라졌다. 중국군은 수백만 명을 동원하여 인해전술로 기습하였고, 이에 밀리면서 남한군과 UN군은 대대적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그리고 전선은 대략 지금의 휴전선 부근에서 소강을 보였다. 결국 1953년 7월 27일 양쪽이 휴전에 합의하면서 오늘날 남한과 북한의 분단이 확정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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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일한 휴전국가=== | ||
+ | 그 이후 현재까지 한반도는 휴전 상태에 놓여있다. 전쟁을 멈추고 있을 뿐 엄밀하게는 아직도 전쟁 중인 상태인 것이다. 3년여 간의 전쟁을 거치면서 남북한을 막론하고 거의 대부분의 산업시설과 기반시설들이 초토화될 수밖에 없었다. | ||
+ | |||
+ | 그 결과 엄청난 인명피해와 전쟁고아 및 이산가족들, 식량부족에 따른 기근 문제 등은 한국전쟁이 낳은 뼈아픈 상처와 고통으로 남았다. 때문에 현재는 우발적인 충돌로 인해 다시 전쟁이 발생하지 않도록 휴전선을 기준으로 남북 각각 2km씩, 전체 4km 구간을 비무장지대(DMZ)로 설정하여 대비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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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류:원고검토용]] |
2017년 11월 20일 (월) 15:14 기준 최신판
수정 원고
- 제목: 민족의 위기 뒤에 찾아온 태풍의 전야, 해방정국
한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한 것을 계기로 독립을 얻었다. 일본이 패망하기 이전부터 한국은 해외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국내 독립운동을 지휘하는 한편, 국제사회를 향한 독립의 필요성 및 의지를 밝히는 등 적극적으로 독립을 위한 활동을 전개해 왔다. 그 활동은 외교적 활동 뿐만 아니라 무장투쟁과 의열활동 방식 등 다양한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은 해방된 직후 다시 미국과 소련의 군정통치를 경험해야 했다. 한반도를 전쟁 상대국가인 일본의 식민지 영토로써 점령한 미국과 소련은 각각 북위 38도선을 중심으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였다. 그리고 점령군인 자신들의 통치 하에 해방된 한반도의 질서를 확립하고 통제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한국인들은 많은 논란과 갈등 끝에 미군과 소련에 의한 군정통치를 인정하게 되었고 일시적인 신탁통치가 시행되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1919년 수립 이후 민족의 독립운동을 주도하고 대표하였던 대한민국의 임시정부는 배제되었다. 신탁통치를 시행하는 미군과 소련 군정은 자신들의 영향력이 충실히 미칠 수 있는 정부가 자신이 점령한 지역에 수립되길 희망하였으며, 때문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양쪽 모두에게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소련 점령지역에서는 김일성이, 미군 점령지역에서는 이승만이 각각 점령군의 비호 아래 가장 우세한 정치인으로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다.
당초 신탁통치의 계획은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미국과 영국, 그리고 중국과 소련이 참석한 가운데 최장 5년을 넘지 않도록 하고 그 안에 한국의 독립정부를 수립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점령 당사자인 미국과 소련은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을 대표하는 이른바 ‘냉전’의 대표주자로서 각자 한반도에 수립될 독립정부가 자신의 이념에 부합하는 형태이기를 희망하였다. 때문에 신탁통치안의 내용과 같이 미국과 소련의 협의를 통해 독립정부의 수립이 충실히 이행되기는 점점 어려워지게 되었다.
그 연장에서 한반도 안에서는 점차 이념에 따른 갈등과 대립이 격화되어갔다. 그리고 38선 이남 지역에서는 ‘반공’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공산진영에 대한 적대감과 적개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일이 많아졌다. 급기야 여수와 순천에서는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것에 반대하는 폭동이 일어났고, 제주에서는 미군정에 반대하는 민중봉기가 일어났는데, 미군정은 이것을 공산세력들이 일으킨 반란과 폭동으로 간주하여 폭력적으로 진압하였다. 그 결과 제주에서는 섬 인구의 10%가 사망할 만큼 민간인에 대한 끔찍한 살육으로까지 이어졌다.
결국 신탁통치 속의 분할점령은 끝내 통일된 단독정부의 수립으로 이어지지 못하였다. 마지막까지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며 노력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도자 김구가 암살되면서 더 이상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막을 수가 없게 되었다. 이에 1948년 8월 남한에서는 이승만을 대통령으로하는 단독정부가 수립되었고 뒤 이어 9월에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하는 북한 단독정부가 수립되었다. 한반도 분단의 고착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1950년 6월 25일 소련의 군사적 지원 속에 남한의 공산화를 추진하던 북한 정부는 무력침공을 감행하여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 전세는 일방적으로 남한에 불리하여 개전 3개월 만에 한반도 남단의 낙동강 유역을 제외하고 전 지역이 북한군에게 점령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UN의 결의를 통해 국제사회에서 UN군이 파병되었고, 미군이 대대적으로 개입하면서 전세는 역전되었다. 1950년 9월 개시된 인천상륙작전은 전황을 완전히 역전시키는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이제 남한군과 UN군이 거꾸로 북한군을 몰아붙이며 한반도 최북단인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까지 진격하게 되었다.
그러나 다시 중국군이 개입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중국군은 수백만명을 동원하여 기습하였고, 이를 막아내지 못하면서 다시 남한군과 UN군은 대대적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그리고 전선은 대략 지금의 휴전선 부근에서 고착되었다. 결국 1953년 7월 27일 양쪽은 휴전에 합의하면서 오늘날 남한과 북한의 분단이 확정되게 되었다.
그 이후 현재까지 한반도는 휴전 상태에 놓여있다. 전쟁을 멈추고 있을 뿐 엄밀하게는 아직도 전쟁 중인 상태인 것이다. 3년여간의 전쟁을 거치면서 남북한을 망라하고 거의 대부분의 산업시설과 기반시설들은 초토화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엄청난 인명피해와 전쟁고아 및 이산가족들, 식량부족에 따른 기근 문제 등은 한국전쟁이 낳은 뼈 아픈 상처와 고통이었다. 때문에 현재는 우발적인 충돌로 인해 다시 전쟁이 발생하지 않도록 휴전선을 기준으로 남북 각각 2km씩, 전체 4km 구간을 비무장지대(DMZ)로 설정하여 대비하고 있다.
교열본
- 제목: 민족의 위기 뒤에 찾아온 태풍의 전야, 해방정국
면면한 독립 운동
한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한 것을 계기로 독립을 얻었다. 일본이 패망하기 이전부터 한국은 해외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국내 독립운동을 지휘하는 한편, 국제사회를 향한 독립의 필요성 및 의지를 밝히는 등 적극적으로 독립을 위한 활동을 전개해 왔다. 그 활동은 외교적 활동뿐만 아니라 무장투쟁과 의열활동 방식 등 다양하였다.
임시정부를 배제한 신탁통치 결정
그러나 한국은 해방된 직후 다시 미국과 소련의 군정통치를 경험해야 했다. 한반도를 전쟁 상대국가인 일본의 식민지 영토로서 점령한 미국과 소련은 각각 북위 38도선을 중심으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였다. 그리고 점령군인 자신들의 통치 하에 해방된 한반도의 질서를 확립하고 통제하고자 하였다. 한국인들은 많은 논란과 갈등 끝에 미군과 소련에 의한 군정통치를 인정하게 되었고 일시적인 신탁통치가 시행되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1919년 수립 이후 민족의 독립운동을 주도하고 대표하였던 대한민국의 임시정부는 배제되었다. 신탁통치를 시행하는 미군과 소련 군정은 각기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정부가 자신이 점령한 지역에 수립되길 희망하였다. 이 때문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양쪽 모두에게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소련 점령지역에서는 김일성이, 미군 점령지역에서는 이승만이 각각 점령군의 비호 아래 가장 우세한 정치인으로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다.
이념 대립이 불러온 폭력
당초 신탁통치의 계획은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미국과 영국, 그리고 중국과 소련이 참석한 가운데 최장 5년을 넘지 않도록 하고 그 안에 한국의 독립정부를 수립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점령 당사자인 미국과 소련은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을 대표하는 이른바 ‘냉전’의 대표주자로서 각자 한반도에 수립될 독립정부가 자신의 이념에 부합하는 형태이기를 희망하였다. 때문에 신탁통치안의 내용에 충실하게 미국과 소련이 협의를 하여 한반도에 독립정부가 수립된다는 것은 점점 어려워지게 되었다.
그 연장에서 한반도 안에서는 점차 이념에 따른 갈등과 대립이 격화되어갔다. 그리고 38선 이남 지역에서는 ‘반공’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공산진영에 대한 적대감과 적개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일이 많아졌다. 급기야 여수와 순천에서는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것에 반대하는 폭동이 일어났고, 제주에서는 미군정에 반대하는 민중봉기가 일어났는데, 미군정은 이것을 공산세력들이 일으킨 반란과 폭동으로 간주하여 폭력적으로 진압하였다. 그 결과 제주에서는 섬 인구의 10%가 사망할 만큼 민간인에 대한 끔찍한 살육으로까지 이어졌다.
분단 고착과 한국전쟁
결국 신탁통치 속의 분할점령은 끝내 통일된 단독정부의 수립으로 이어지지 못하였다. 마지막까지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며 노력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도자 김구가 암살되면서 더 이상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막을 수가 없게 되었다. 이에 1948년 8월 남한에서는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는 단독정부가 수립되었고 뒤 이어 9월에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하는 북한 단독정부가 수립되었다. 한반도 분단이 고착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1950년 6월 25일 소련의 군사적 지원 속에 남한의 공산화를 추진하던 북한 정부가 무력침공을 감행하여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 전세는 일방적으로 남한에 불리해져서 개전 3개월 만에 한반도 남단의 낙동강 유역 아래 쪽을 제외한 남한 전 지역이 북한군에게 점령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UN의 결의를 통해 국제사회에서 UN군이 파병되었고, 미군이 대대적으로 개입하면서 전세는 역전되었다. 1950년 9월 개시된 인천상륙작전은 전황을 완전히 역전시키는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이제 남한군과 UN군이 거꾸로 북한군을 몰아붙이며 한반도 최북단인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까지 진격하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군이 개입하면서 상황은 또 다시 달라졌다. 중국군은 수백만 명을 동원하여 인해전술로 기습하였고, 이에 밀리면서 남한군과 UN군은 대대적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그리고 전선은 대략 지금의 휴전선 부근에서 소강을 보였다. 결국 1953년 7월 27일 양쪽이 휴전에 합의하면서 오늘날 남한과 북한의 분단이 확정되었다.
유일한 휴전국가
그 이후 현재까지 한반도는 휴전 상태에 놓여있다. 전쟁을 멈추고 있을 뿐 엄밀하게는 아직도 전쟁 중인 상태인 것이다. 3년여 간의 전쟁을 거치면서 남북한을 막론하고 거의 대부분의 산업시설과 기반시설들이 초토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엄청난 인명피해와 전쟁고아 및 이산가족들, 식량부족에 따른 기근 문제 등은 한국전쟁이 낳은 뼈아픈 상처와 고통으로 남았다. 때문에 현재는 우발적인 충돌로 인해 다시 전쟁이 발생하지 않도록 휴전선을 기준으로 남북 각각 2km씩, 전체 4km 구간을 비무장지대(DMZ)로 설정하여 대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