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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목= | + | |제목= 한국의 불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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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기관/단체= 이차돈, 소수림왕, 침류왕, 진흥왕, 모례, 세종, 연등회 보존위원회 | |인물/기관/단체= 이차돈, 소수림왕, 침류왕, 진흥왕, 모례, 세종, 연등회 보존위원회 | ||
|장소/공간= 성문사(省門寺), 서울, 광주 | |장소/공간= 성문사(省門寺), 서울, 광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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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 <references/> | ||
− | ==''' | + | =='''최종 원고'''== |
+ | ===불교의 전래=== | ||
+ | 불교는 유교와 함께 한국 역사의 정신세계를 지탱해 온 두 개의 큰 기둥 가운데 하나이다. 기원전 6세기 경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는 한나라(漢, B.C.206~A.D.220) 후기부터 중국에 소개되기 시작했으며,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220~589) 시대에는 중국 전역으로 파급되었다. 한국의 불교는 이 시기에 중국의 승려에 의해 전래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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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처음에 민간에 전파되었던 불교는 국가의 공인과 후원을 받으면서 널리 확산되었다. 당시 고구려, 백제, 신라 세 나라는 여러 부족들을 통합하면서 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국가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불교는 출신 부족이 다른 사람들이 다함께 믿는 종교가 되었고, 국력의 통일에 기여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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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불교의 전성기: 통일신라, 고려=== | ||
+ | 통일신라(668~935)와 고려(918~1392) 시대를 거치면서 불교는 크게 번영하였다. 왕실은 지속적으로 불교를 보호하고 장려하였으며, 많은 승려들이 중국에 유학하여 새로운 교학을 배웠고, 그것을 한국에 전파하였다. 불교는 국가 권력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였고, 왕실과 귀족의 후원을 받아 한반도의 곳곳에 사찰을 건립하였으며, 방대한 규모의 불경을 간행하였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석굴암과 불국사, 해인사 장경판전, 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대장경판은 이 시기의 한국 불교가 남긴 대표적인 유산들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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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시대의 불교 억제 시책=== | ||
+ | 1,000년 동안 번성해 오던 불교는 조선(1392~1910)의 개국과 더불어 시련기를 맞게 되었다. 조선의 지배자들은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세우고 불교를 억압하였다. 불교는 국가 권력으로부터 멀어지고, 승려들은 신분적으로 차별받았다. 하지만 이 시기에도 여성과 서민들은 여전히 불교를 신앙했기 때문에 불교는 명맥을 유지해 갈 수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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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정부의 강력한 불교 억제 정책은 임진왜란 이후에 상당히 완화되었다. 그것은 불교 승려들이 일본군에 대항하는 전투에서 큰 전적을 올렸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 전국의 사찰 건물의 대부분이 일본군에 의해 불태워졌다. 그 중의 많은 부분이 조선 후기에 재건될 수 있었던 것도 불교 억제가 누그러진 상황에 기인한다. | ||
+ | |||
+ | ===한국의 대표적인 불교 승려=== | ||
+ | 통일신라 시대의 원효(元曉, 617~686)는 한국의 불교를 대표하는 승려이다. 그는 중국 당나라(唐, 618~907)에 유학하기 위해 여행하던 중 폭우를 피해 머물 곳을 찾았다. 그곳이 무덤인 줄 몰랐을 때에는 단잠을 잤지만, 다음날 무덤 근처임을 알고 머문 곳에서는 환영에 시달려 한숨도 못잤다. 세상의 모든 것이 나의 한 마음(一心)에 달려 있음을 깨달은 그는 중국 유학을 포기하고 신라에 남아 민중들에게 불교를 전파하는 데 힘썼다. 원효의 이 일화는 한국 불교의 특색을 잘 설명해 주는 상징적인 이야기이다. 당나라 시대는 중국 불교의 황금기로 일컬어진다. 당에서 일어난 다양한 교설이 그대로 신라에 유입되어 교파간의 쟁론이 심화되기 시작했다. 원효는 그가 얻은 일심(一心)의 깨달음에 입각하여 상이한 교리들이 화합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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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시대의 승려 의천(義天, 1055~1101)은 당시에 귀족들이 후원하던 교종과 서민들이 신앙하던 선종의 화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지눌(知訥, 1158~1210)은 불교가 권력과 타협하기보다는 깨달음을 구하는 본연의 길을 가도록 모범을 보였으며, 민중의 종교인 선종의 입장에서 교종을 포섭하려고 하였다. 현대 한국 불교계의 가장 유력한 종단 조계종은 지눌의 가르침을 계승한 종파이다. | ||
+ | |||
+ | ===현대의 한국 불교=== | ||
+ | 국토의 70%가 산지인 한국에는 곳곳에 아름다운 산이 있고, 그곳에는 어김없이 오래된 사찰이 자리한다. 965개소에 달하는 한국의 전통사찰은 국내외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문화유산일 뿐 아니라, 승려들이 모여서 수행하고, 신도들이 찾아와 예불을 드리는 종교 시설이다. 한국의 여러 유명 사찰들은 ‘템플 스테이’ 프로그램을 통해 불교 신도뿐 아니라 일반인과 외국인들도 한국의 불교 문화를 체험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석가의 생일인 음력 4월 8일은 국정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다. 이 즈음에는 사찰뿐 아니라, 도시의 거리에도 부처의 가르침을 상징하는 연등이 걸리고, 다양한 기념 행사가 열린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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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시대에 국가 권력과 한 몸을 이루었던 유교가 그 권력의 소멸과 함께 사라진 것과 달리, 민간의 신앙을 받던 불교는 현대 한국 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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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19일 (일) 23:01 기준 최신판
제목 | 한국의 불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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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 김현 |
인물/기관/단체 | 이차돈, 소수림왕, 침류왕, 진흥왕, 모례, 세종, 연등회 보존위원회 |
장소/공간 | 성문사(省門寺), 서울, 광주 |
사건 | 순교 |
기록물 | 삼국사기, 훈요십조, 고려사 |
개념용어 | 연등, 억불숭유, 템플 스테이 |
물품/도구/유물 | 등 |
목차
1차 원고
전국의 모든 사찰은 매년 음력 4월 초파일, 석가 탄신을 축하하는 날로 공휴일이며, 연등행사를 연다. 연등은 부처님께 공양하는 여러 방법 중의 하나로 “번뇌와 무지의 어두운 세계를 부처님의 지혜로 밝게 비추는 것을 상징”한다.
연등은 인도를 비롯하여 세계 각국에서 널리 행하여졌는데, 한국에서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첫째는 각 사찰에서 다는 등불이다. 이날 각 사찰은 초파일을 맞아 경내·외에 수많은 등불을 달아 세상을 밝힌다. 전국의 사찰 경내가 수백만 개의 등불로 불야성을 이룬다. 이날은 세계 각국에서 몰려온 관광객과 사진 애호가들이 연등을 찍어 작품을 만든다. 다른 하나는 대대적인 연등행진이다. 대표적인 연등행진은 연등회가 중심이 되어 모든 종파가 참여하여 서울 시내 중심가를 지난다. 이 행진에는 매년 수만 여 개의 각종 등불을 든 신자가 참여, 부처의 밝은 공덕을 중생에게 알린다.
원래 연등은 신라 진흥왕(551년) 때 시작되어 고려 때에 절정을 이루었다고 한다. 정월 대보름에 등불을 켜서 부처에게 복을 비는 불교 국가의 대대적인 행사였다. 불전에 등불을 켬으로써 스스로 마음을 밝게 하여 부처의 덕을 기리며 대자대비한 부처와 불법(佛法)과 승가(僧伽)로 돌아가 의지하여 구원을 청한다는 의미를 지녔다.
전국의 많은 사찰들이 그곳에 머물면서 사찰 생활을 경험케 하는 템플스테이(Buddhist Temple Stay)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템플스테이는 2002년 월드컵을 전후하여 외국인에게 한국불교전통문화를 체험토록 하기 위해 준비되었는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최근에는 장단기 및 성인, 학생, 여성을 위한 각종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으며 참가자가 매년 증가하고 있다.
한반도에 불교가 처음 전래된 것은 서기 372년 고구려(소수림왕 2년)를 통해 서였다. 중국의 전진(前秦)에서 불상과 불경을 고구려로 보냈고, 그를 계기로 고구려에 불교가 전파되기 시작했다. 고구려는 다음해 성문사(省門寺) 등 2개 사찰을 세웠는데 한반도에 세워진 최초의 사찰이다.
한반도에 전래된 초기 불교는 종교적으로는 개인의 복을 구하는 구복 신앙에 가까웠다. 정치적으로는 이곳에 국가를 성립하고 있던 고구려 백제 신라가 중앙집권국가의 기틀을 잡는데 기여했다.
백제는 서기 384년(침류왕 1년)에 중국의 동진(東晉)에서 출발한 인도의 고승 마라난타(摩羅難陀)가 해로로 광주(廣州)에 도착, 불교가 왕실로 전파됐다. 백제는 그를 왕궁에 머물게 하며 설법을 들었고, 다음해 백성을 출가시켜 백제인 승려를 배출했다.
신라의 불교 전래는 3국 중에서 가장 어려움을 겪었다. 고구려로부터 묵호자(墨胡子)라는 사람이 신라의 영토인 경북 서상 지방에 들어와 모례(毛禮)라 불리는 사람 집에서 불법을 전했고, 모례가 최초의 신라 불교 신도가 되었다.
신라 왕실은 불교를 받아들이길 원했지만, 왕실에 버금가는 힘을 가졌던 신라 씨족들은 불교 전파를 방해하고 나섰다. 씨족들은 고구려가 중앙집권제로 전환하는 과정에 불교의 영향이 크게 작용한 것을 인지, 조직적으로 씨족의 영향력 약화를 막기 위해 움직였다. 그 결과 불교를 초기에 전국으로 전파하는 데는 실패했다. 왕권 강화를 원하던 신라 왕실은 법흥왕 7년(서기 520년)에 가서야 율령을 반포, 중앙집권국가 형태를 완료했다. 그 7년 뒤인 527년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가 공인됐다. 고구려보다 150년 이상 뒤늦은 시점이었다.
신라에서는 불교가 늦게 성행했으나, ‘나중 난 뿔이 우뚝하다’고 이차돈이 순교한 지 140년 후, 한반도를 통일하는 과정에서 불교 사상을 근간으로 한 화랑제도가 큰 역할을 했다.
신라의 불교는 고려로 이어졌다. 고려는 말기 승려가 나라를 개혁하는데 앞장섰지만 관료세력의 거센 반발에 몰렸다. 이때부터 급격하게 쇠퇴한 고려는 결국 20여년 뒤에 나라를 조선에게 넘겼다.
조선은 대대적인 억불숭유정책을 펼쳤지만, 불교를 전적으로 배척하지는 않았다.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창제하면서, 유신그룹이 격렬하게 반대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불교 사상을 서문에 담기도 했다. 훈민정음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작품 3개중 2개가 불교와 관련 된 것이다.
불교에 속한 문화재 중 많은 것들이 국보로 되어 있을 만큼 불교가 한국인의 정신세계에 끼친 영향은 컸다.
2014년 현재 전국에는 13,352개의 사찰이 있으며 신도 수는 7,619,332명이다. 불교계에 근무하는 사람은 27,404명이다.
연구원 검토
검토의견 | |
• 석가탄신일 연등, 절에서 기도하는 모습 및 대표적인 불교 사찰 등의 시각자료를 추가할 수 있다. 또한 대표적인 불교 유적으로 유네스코에 등재된 석굴암과 불국사를 언급할 수 있다. | |
• - 첫 문장에서 ‘현재 한국’이라는 말을 써 줄 것 → 현재 한국에서는 매년 음력 4월 초파일은 석가 탄신을 축하하는 날로 공휴일이며, 전국의 모든 사찰은 연등행사를 연다. - 글이 현재와 과거가 혼재되어 있는데 문장의 순서를 조정하여 글의 흐름이 원활하였으면 합니다. |
|
수정 원고
현재 한국의 모든 사찰은 매년 음력 4월 초파일, 석가 탄신을 축하하는 날로 공휴일이며, 연등을 달고 그 무렵 연등행진을 한다. 연등은 부처님께 공양하는 여러 방법 중의 하나로 “번뇌와 무지의 어두운 세계를 부처님의 지혜로 밝게 비추는 것을 상징”한다. 이는 불교 신도들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탑돌이와 같은 대규모 행사 중 하나이다.
개인들이 불교의 본래 의미를 생각하며 불자의 실생활을 잠시 경험하는 템플스테이(Buddhist Temple Stay) 프로그램도 있다. 외국인에게 한국불교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도록 시작했으며, 최근에는 장단기 및 성인, 학생, 여성을 위한 각종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다. 내·외국인 참가자가 매년 증가하고 있다.
사찰에서 외국어로 하는 교육 프로그램도 있다. 서울 화계사 국제선원의 예를 들면 “누구든 유서깊은 한국 문화를 배워 익히고 실참실수를 통해 한국의 정통선을 명철하게 체험하여 생사의 문제에 직면한 자신의 존재를 궁극적으로 증명하고자 하는 분들”을 대상으로 한다. 또 “종교와 이념을 초월한다”고 한다.[1]
한반도에 불교가 전래된 과정을 살펴보자. 한반도에 전래된 초기 불교는 종교적으로는 개인의 복을 구하는 구복 신앙에 가까웠고, 정치적으로는 각국이 중앙집권국가의 기틀을 잡는데 기여했다.
고구려는 서기 372년(소수림왕 2년) 중국 전진(前秦)으로부터, 백제는 서기 384년(침류왕 1년)에 중국의 동진(東晉)에서 불교를 받아들였다. 신라의 불교 전래는 3국 중에서 가장 늦었고, 정착에 어려움을 겪었다. 고구려인이 불법을 전했다. 신라 왕실은 불교를 받아들이길 원했지만, 왕실에 버금가는 힘을 가졌던 신라 6부족들은 불교 전파를 방해하고 나섰다. 왕권 강화를 원하던 신라 왕실은 법흥왕 7년(서기 520년)에 가서야 율령을 반포, 중앙집권국가 형태를 완료했다. 그 7년 뒤인 527년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겨우 불교를 공인했다.
신라의 불교는 늦게 성행했으나, 한반도를 통일하는 과정에서 불교 사상을 근간으로 한 화랑제도가 큰 역할을 했다.
이 무렵 해외에서의 불교 활동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혜초는 인도로 불법을 구하러 갔다가 널리 알려진 「왕오천출국전」을 남겼다. 일본으로 건너간 신문왕과 경덕왕의 왕자들은 불상 등을 일본에 전하거나 불사를 일으키는데 기여했다. 원효 의상 자장 등은 고승으로 추앙받는다.
신라인들은 교역과 유학 등의 명분으로 중국에 건너갔다. 신라인들은 그들이 모여사는 신라방을 세웠고, 거기에 신라 사찰인 신라원을 세웠다. 그중 널리 알려진 해상왕 장보고가 세운 법화원은 중국 산동성 적산에 중건되었다.
신라의 승려들에 의해 지어진 향가는 한국문학의 대표적인 한 장르로 전해오고 있다. 또 고구려의 담징은 일본의 호류사(法隆寺) 금당에 벽화를 남긴 것으로 『일본서기』가 전한다.
한국 불교는 고려에서 최전성기를 맞았다.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 태조는 불교를 국교로 정했고 수많은 불사를 일으켰다. 또 후손에게 「훈요십조」를 내리면서 불교 신봉을 강조했고, 아들을 직접 출가시켰다. 이후 고려는 불교를 국가의 기본 통치개념과 분리하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과거제도에 승과를 두기도 했다.
여러 요인이 있겠으나 불교로 흥한 고려가 지나친 종교관련 행사와 인물들로 인해 망한 것은 ‘지나침은 모자람’과 같은 것을 보여 주는 좋은 사례이다.
조선은 대대적인 억불숭유정책을 펼쳤지만, 불교를 전적으로 배척하지는 않았다. 서울을 현재 위치에 터 잡을 때 불교 승려의 도움을 받았다고 알려졌고, 임진왜란 등 나라가 어려울 때 승병이 나서 구국활동을 전개했다. 궁궐 안에 절을 세우기도 했고, 법석을 벌였고, 불교 서적을 간행했다.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창제하면서 불교 사상도 존중했고, 훈민정음으로 창작한 최초의 작품 3개중 2개가 불교와 관련 된 것이다.
지금도 불교 교리를 실천하는 많은 행사가 열리고 있다. 불교신자는 물론 일반인들도 돌아가신 조상을 극락에 가도록 비는 49재, 100일재 등 여러 종류의 천도재를 지낸다. 젊은이들이 중요한 시험이 100일이 남았다거나, 서로 사귄지 100일째가 되었을 때 파티를 하는 것도 이의 영향을 받았다. 또 ‘함부로 살생하지 말라’는 교리에 따라 짐승이나 가축 등을 함부로 죽이지 않으며, 선을 하는 민간인들이 점차 늘고 있다.
또 불교 사찰이 보존해온 많은 문화재가 한국의 불교문화를 보전·전수하고 있다. 세계유산에 등재된 불국사와 석굴암을 비롯해 다보탑과 석가탑, 부석사 무량수전, 법주사 팔상전, 해인사 팔만대장경, 익산의 미륵사지석탑, 부여의 정림사지 석탑 등이 찬란했던 불교 문화의 유산이다. 또 순천의 송광사에는 목조삼존불감, 고려고종제서, 국사전 등 국보와 대반열반경소, 경질, 경패 등 총 12점의 보물 그리고 각종 지방 문화재 등이 보관되어 있다. 서울 봉원사 등에서 거행하는 영산재는 세계 무형문화재로 등재되었다.
일제 강점기 한용운은 승려이었으며, 3·1독립운동 민족 대표 33인으로 참여하였고, 시집 『님의 침묵』으로 저항문학을 꽃피웠다.
한국 불교계는 활발하게 해외 선교를 펼치고 있으며, 그 일환으로 현재 미국 로스앤젤레스, 위스콘신 주 매디슨 등에 사찰을 설립했다.
2014년 현재 전국에는 13,352개의 사찰에 신도는 7,619,332명이다.
주석
최종 원고
불교의 전래
불교는 유교와 함께 한국 역사의 정신세계를 지탱해 온 두 개의 큰 기둥 가운데 하나이다. 기원전 6세기 경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는 한나라(漢, B.C.206~A.D.220) 후기부터 중국에 소개되기 시작했으며,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220~589) 시대에는 중국 전역으로 파급되었다. 한국의 불교는 이 시기에 중국의 승려에 의해 전래되었다.
처음에 민간에 전파되었던 불교는 국가의 공인과 후원을 받으면서 널리 확산되었다. 당시 고구려, 백제, 신라 세 나라는 여러 부족들을 통합하면서 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국가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불교는 출신 부족이 다른 사람들이 다함께 믿는 종교가 되었고, 국력의 통일에 기여하였다.
한국 불교의 전성기: 통일신라, 고려
통일신라(668~935)와 고려(918~1392) 시대를 거치면서 불교는 크게 번영하였다. 왕실은 지속적으로 불교를 보호하고 장려하였으며, 많은 승려들이 중국에 유학하여 새로운 교학을 배웠고, 그것을 한국에 전파하였다. 불교는 국가 권력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였고, 왕실과 귀족의 후원을 받아 한반도의 곳곳에 사찰을 건립하였으며, 방대한 규모의 불경을 간행하였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석굴암과 불국사, 해인사 장경판전, 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대장경판은 이 시기의 한국 불교가 남긴 대표적인 유산들이다.
조선시대의 불교 억제 시책
1,000년 동안 번성해 오던 불교는 조선(1392~1910)의 개국과 더불어 시련기를 맞게 되었다. 조선의 지배자들은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세우고 불교를 억압하였다. 불교는 국가 권력으로부터 멀어지고, 승려들은 신분적으로 차별받았다. 하지만 이 시기에도 여성과 서민들은 여전히 불교를 신앙했기 때문에 불교는 명맥을 유지해 갈 수 있었다.
조선 정부의 강력한 불교 억제 정책은 임진왜란 이후에 상당히 완화되었다. 그것은 불교 승려들이 일본군에 대항하는 전투에서 큰 전적을 올렸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 전국의 사찰 건물의 대부분이 일본군에 의해 불태워졌다. 그 중의 많은 부분이 조선 후기에 재건될 수 있었던 것도 불교 억제가 누그러진 상황에 기인한다.
한국의 대표적인 불교 승려
통일신라 시대의 원효(元曉, 617~686)는 한국의 불교를 대표하는 승려이다. 그는 중국 당나라(唐, 618~907)에 유학하기 위해 여행하던 중 폭우를 피해 머물 곳을 찾았다. 그곳이 무덤인 줄 몰랐을 때에는 단잠을 잤지만, 다음날 무덤 근처임을 알고 머문 곳에서는 환영에 시달려 한숨도 못잤다. 세상의 모든 것이 나의 한 마음(一心)에 달려 있음을 깨달은 그는 중국 유학을 포기하고 신라에 남아 민중들에게 불교를 전파하는 데 힘썼다. 원효의 이 일화는 한국 불교의 특색을 잘 설명해 주는 상징적인 이야기이다. 당나라 시대는 중국 불교의 황금기로 일컬어진다. 당에서 일어난 다양한 교설이 그대로 신라에 유입되어 교파간의 쟁론이 심화되기 시작했다. 원효는 그가 얻은 일심(一心)의 깨달음에 입각하여 상이한 교리들이 화합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였다.
고려시대의 승려 의천(義天, 1055~1101)은 당시에 귀족들이 후원하던 교종과 서민들이 신앙하던 선종의 화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지눌(知訥, 1158~1210)은 불교가 권력과 타협하기보다는 깨달음을 구하는 본연의 길을 가도록 모범을 보였으며, 민중의 종교인 선종의 입장에서 교종을 포섭하려고 하였다. 현대 한국 불교계의 가장 유력한 종단 조계종은 지눌의 가르침을 계승한 종파이다.
현대의 한국 불교
국토의 70%가 산지인 한국에는 곳곳에 아름다운 산이 있고, 그곳에는 어김없이 오래된 사찰이 자리한다. 965개소에 달하는 한국의 전통사찰은 국내외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문화유산일 뿐 아니라, 승려들이 모여서 수행하고, 신도들이 찾아와 예불을 드리는 종교 시설이다. 한국의 여러 유명 사찰들은 ‘템플 스테이’ 프로그램을 통해 불교 신도뿐 아니라 일반인과 외국인들도 한국의 불교 문화를 체험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석가의 생일인 음력 4월 8일은 국정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다. 이 즈음에는 사찰뿐 아니라, 도시의 거리에도 부처의 가르침을 상징하는 연등이 걸리고, 다양한 기념 행사가 열린다.
조선시대에 국가 권력과 한 몸을 이루었던 유교가 그 권력의 소멸과 함께 사라진 것과 달리, 민간의 신앙을 받던 불교는 현대 한국 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