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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6일 (월) 10:52 기준 최신판
제목 |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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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 황인희 |
교열자 | 유안리 |
인물/기관/단체 | 유성룡, 원균(元均), 정탁(鄭琢), 권율(權慄), 발라드(G. A. Ballard) 제독, 넬슨 제독 |
장소/공간 | 아산, 서울 건천동, 좌수영, 부산 동래, 옥포, 당포, 당항포, 안골포, 한산도, 거제 칠천량, 노량, 명량 |
사건 | 임진왜란, 옥포대첩, 노량해전, 한산도 대첩, 칠천량 해전, 명량해전 |
개념용어 | 징비록, 식년 무과 병과, 권지훈련원 봉사, 명나라,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거북선, 판옥선, 학익진, 삼도수군통제사, 경상우수사, 백의종군, 우의정, 도원수, 난중일기 |
1차 원고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은 임진왜란의 영웅이다. 일본에게 일방적으로 침략 당하다시피 했던 임진왜란에서 한 번도 패하지 않고 죽음으로 나라를 지킨 명장이 바로 이순신이다.
이순신의 고향은 충청남도 아산이지만 어린 시절의 대부분은 그가 태어난 서울 건천동 집에서 자란 듯하다. 같은 마을에 살았던 유성룡(柳成龍)은 이순신이 어린 시절부터 큰 인물이 될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고 <징비록(懲毖錄)>에 적었다.
32세 되던 1576년 식년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훈련원 봉사(權知訓鍊院奉事)로 뒤늦게 관직에 나갔다. 그후 여러 관직을 거쳤고 47세가 되던 해에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 이순신은 곧 일본이 쳐들어올 것을 예상하고 좌수영(左水營 : 여수)을 근거지로 삼아 전쟁을 위한 배 거북선을 만들고 군량 확보에 노력하는 등 전쟁에 대비하였다. 그 다음해인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부산 동래가 이틀 만에 함락되었고 조선의 여러 장수가 싸울 용기를 잃고 도망치는 바람에 일본군은 조선 수군과 한번 싸우지도 않고 제해권을 손에 넣었다.
이에 이순신은 즉시 전선(戰船)을 정비하고 싸울 태세를 갖췄다. 옥포(玉浦) 앞바다에 적선 30여 척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이순신은 곧바로 그곳으로 달려갔다. 왜군은 조선 수군이 해상으로부터 공격해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육지에 올라가서 불을 지르고 약탈하고 있었다. 이순신의 수군이 공격해왔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배에 올라 도망하려 하였지만 이미 때는 늦은 후였다. 이순신의 수군은 왜선 26척을 부수고 많은 왜병을 물리쳤다. 이 싸움이 옥포대첩이다.
그 후 노량(露梁) 앞바다에서도 많은 왜군을 섬멸하였다. 이 싸움에 처음으로 출동한 거북선은 그 위력을 확고하게 인정받았다. 거북선을 앞세운 이순신의 수군은 당포(唐浦), 당항포, 안골포(安骨浦), 한산도 등의 해전에서 연이어 승리를 거두었다.
이순신은 몇 척의 판옥선(板屋船)으로 일본의 수군을 공격하면서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한 뒤 학익진(鶴翼陣)을 치고 맹렬한 공격을 가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것이 세계 전쟁 역사에 기록된 한산도 대첩이다. 1593년 남해안 일대의 적군을 완전히 소탕하고 한산도로 진을 옮긴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되었다.
이듬해 명나라가 참전했고 명나라와 일본 간의 강화회담이 진행되면서 전쟁이 잠시 멎는 듯했다. 이때도 이순신은 뒷일에 대비하여 군사 훈련, 군비 확충, 피난민 생업의 보장 등에 힘썼다.
1597년 왜군이 다시 쳐들어왔다. 명나라와 일본 사이의 강화 회담이 결렬된 것이다. 이 전쟁이 정유재란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그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왜군의 모략과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의 모함으로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때 이순신의 죄명은 조정을 기만하고 임금을 무시한 죄, 적을 토벌하지 않고 나라를 저버린 죄, 다른 사람의 공을 빼앗고 모함한 죄 등이었다. 이순신은 우의정 정탁(鄭琢)의 적극적인 변호로 감옥에서는 풀려나왔지만 도원수 권율(權慄)의 부대에서 사병으로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이순신 대신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은 적의 유인 전술에 넘어가 거제 칠천량(漆川梁)에서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했다. 이에 선조는 죽이려고까지 했던 이순신을 다시 통제사로 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 조선 수군에 남은 군사는 120여 명, 병선은 고작 열두 척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실망하지 않고 명량해전(鳴梁海戰)에 임했다. 그는 이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에서 133척의 적군과 대결하여 31척을 부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 싸움으로 조선의 수군은 다시 의욕을 찾게 되었다.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도 큰 승리를 이끌어냈지만 선두(船頭)에 서 있던 그는 적의 총탄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그는 죽는 순간 “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삼가라”라는 말을 남겼다. 실제 군사들은 통제사가 죽은 사실을 미처 모른 채 왜군을 대파하였다. 나중에 그의 죽음을 알게 된 사람들은 “죽은 순신이 산 왜군을 물리쳤다”라고 말했다.
해전사연구가(海戰史硏究家)이며 이순신을 연구한 발라드(G. A. Ballard) 제독은 이순신이 영국의 넬슨 제독과 어깨를 겨룰만한 위대한 해군사령관이라고 평가하였다. 이순신이 임진왜란 중에 쓴 <난중일기(亂中日記)>는 임진왜란을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중요한 사료로 꼽히고 있다.
연구원 검토
검토의견 | |
• 이 글에서 “해전사연구가~평가하였다”고 적고 있다. 따라서 후대에 이순신이 왜 높게 평가받고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가 보충되어야 한다. 이순신의 리더십, 지형, 조류 등의 지리적 여건을 최대한 활용한 전략, 전술, 거북선의 활용 등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이순신의 군사전략가로서의 가치 등이 좀 더 부각될 필요가 있다. | |
• - 제목을 꼭 명량해전이라고 해야 하나? 임진왜란과 이순신하면 어떨까? 내용도 명량해전에 국한된 것도 아니므로. - 도입 : 세계전쟁 역사에 기록된 한산대첩, 넬슨제독과 비견되는 이순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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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원고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은 임진왜란의 영웅이다. 일본에게 일방적으로 침략 당하다시피 했던 임진왜란에서 한 번도 패하지 않고 죽음으로 나라를 지킨 명장이 바로 이순신이다.
이순신의 고향은 충청남도 아산이지만 어린 시절의 대부분은 그가 태어난 서울 건천동 집에서 자란 듯하다. 같은 마을에 살았던 유성룡(柳成龍)은 이순신이 어린 시절부터 큰 인물이 될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고 <징비록(懲毖錄)>에 적었다.
32세 되던 1576년 식년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훈련원 봉사(權知訓鍊院奉事)로 뒤늦게 관직에 나갔다. 그후 여러 관직을 거쳤고 47세가 되던 해에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 이순신은 곧 일본이 쳐들어올 것을 예상하고 좌수영(左水營 : 여수)을 근거지로 삼아 전쟁을 위한 배 거북선을 만들고 군량 확보에 노력하는 등 전쟁에 대비하였다.
당시 조선의 전선(戰船)은 대부분, 배 위 갑판을 덮고 그 위에 누각 등을 세운 판옥선이었다. 1층에서는 노를 젓고 2층에서는 전투를 하도록 만든 배였다. 거북선은 판옥선 위에 다시 철갑 덮개를 씌워 거북이 모양처럼 만든 배로, 등에는 칼과 송곳 등을 꽂아 적이 배에 뛰어들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또 용의 머리처럼 만든 앞부분에는 총 구멍을 내서 마치 용의 입에서 불을 뿜는 듯한 모습을 나타냈다. 임진왜란 때 거북선들은 적의 배들 사이를 다니면서 아군의 피해는 최소화하면서 적에게는 큰 피해를 안겨주었다고 한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부산 동래가 이틀 만에 함락되었고 조선의 여러 장수가 싸울 용기를 잃고 도망치는 바람에 일본군은 조선 수군과 한번 싸우지도 않고 제해권을 손에 넣었다.
이에 이순신은 즉시 전선(戰船)을 정비하고 싸울 태세를 갖췄다. 옥포(玉浦) 앞바다에 적선 30여 척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이순신은 곧바로 그곳으로 달려갔다. 왜군은 조선 수군이 해상으로부터 공격해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육지에 올라가서 불을 지르고 약탈하고 있었다. 이순신의 수군이 공격해왔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배에 올라 도망하려 하였지만 이미 때는 늦은 후였다. 이순신의 수군은 왜선 26척을 부수고 많은 왜병을 물리쳤다. 이 싸움이 옥포대첩이다.
그 후 노량(露梁) 앞바다에서도 많은 왜군을 섬멸하였다. 이 싸움에 처음으로 출동한 거북선은 그 위력을 확고하게 인정받았다. 거북선을 앞세운 이순신의 수군은 당포(唐浦), 당항포, 안골포(安骨浦), 한산도 등의 해전에서 연이어 승리를 거두었다.
이순신은 몇 척의 판옥선(板屋船)으로 일본의 수군을 공격하면서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한 뒤 학익진(鶴翼陣)을 치고 맹렬한 공격을 가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것이 세계 전쟁 역사에 기록된 한산도 대첩이다. 한산도 대첩은 진주성대첩(晉州城大捷, 1592.10.5.∼10.) · 행주대첩(幸州大捷, 1593.2.12.)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첩 중 하나이다. 이 대첩은 육지에서 연속된 패배로 사기가 떨어져 있던 조선군에 용기를 되찾게 해주었다.
1593년 남해안 일대의 적군을 완전히 소탕하고 한산도로 진을 옮긴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되었다. 이듬해 중국 명나라가 참전했고 명나라와 일본 간의 강화회담이 진행되면서 전쟁이 잠시 멎는 듯했다. 이때도 이순신은 뒷일에 대비하여 군사 훈련, 군비 확충, 피난민 생업의 보장 등에 힘썼다.
1597년 왜군이 다시 쳐들어왔다. 명나라와 일본 사이의 강화 회담이 결렬된 것이다. 이 전쟁이 정유재란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그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왜군의 모략과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의 모함으로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때 이순신의 죄명은 조정을 기만하고 임금을 무시한 죄, 적을 토벌하지 않고 나라를 저버린 죄, 다른 사람의 공을 빼앗고 모함한 죄 등이었다. 이순신은 우의정 정탁(鄭琢)의 적극적인 변호로 감옥에서는 풀려나왔지만 도원수 권율(權慄)의 부대에서 사병으로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이순신 대신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은 적의 유인 전술에 넘어가 거제 칠천량(漆川梁)에서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했다. 이에 선조는 죽이려고까지 했던 이순신을 다시 통제사로 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 조선 수군에 남은 군사는 120여 명, 병선은 고작 열두 척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실망하지 않고 명량해전(鳴梁海戰)에 임했다. 그는 이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에서 133척의 적군과 대결하여 31척을 부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 싸움으로 조선의 수군은 다시 의욕을 찾게 되었다.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도 큰 승리를 이끌어냈지만 선두(船頭)에 서 있던 그는 적의 총탄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그는 죽는 순간 “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삼가라”라는 말을 남겼다. 실제 군사들은 통제사가 죽은 사실을 미처 모른 채 왜군을 대파하였다. 나중에 그의 죽음을 알게 된 사람들은 “죽은 순신이 산 왜군을 물리쳤다”라고 말했다. 이순신이 임진왜란 중에 쓴 <난중일기(亂中日記)>는 임진왜란을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중요한 사료로 꼽히고 있다.
교열본
이순신, 전쟁에 대비하다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은 임진왜란의 영웅이다. 일본에게 일방적으로 침탈당하다시피 했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한 번도 패하지 않고 죽음으로 나라를 지킨 명장이 바로 이순신이다.
이순신의 고향은 충청남도 아산이지만 어린 시절의 대부분은 그가 태어난 서울 건천동 집에서 자란 듯하다. 같은 마을에 살았던 유성룡(柳成龍)은 이순신이 어린 시절부터 큰 인물이 될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고 <징비록(懲毖錄)>에 적었다.
32세 되던 1576년 식년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훈련원 봉사(權知訓鍊院奉事)로 뒤늦게 관직에 나갔다. 그 후 여러 관직을 거쳐 47세가 되던 해에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 이순신은 곧 일본이 쳐들어올 것을 예상하고 좌수영(左水營 : 여수)을 근거지로 삼아 거북선을 만들고 군량 확보에 노력하는 등 전쟁에 대비하였다.
당시 조선의 전선(戰船)은 배 위에 갑판을 덮고 그 위에 누각 등을 세운 판옥선이 대부분이었다. 1층에서는 노를 젓고 2층에서는 전투를 하도록 만든 배였다. 거북선은 판옥선 위에 다시 철갑 덮개를 씌워 거북이 모양처럼 만든 배로, 등에는 칼과 송곳 등을 꽂아 적이 배에 올라오지 못하게 만들었다. 또 용의 머리처럼 만든 앞부분에는 총통을 쏘기 위한 구멍을 내서 마치 용의 입에서 불을 뿜는 듯이 보였다. 임진왜란 때 거북선들은 적의 배들 사이를 다니면서 아군의 피해는 최소화하고 적에게는 큰 피해를 안겨주었다고 한다.
연이은 승전보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부산 동래가 이틀 만에 함락되었고 조선의 여러 장수가 싸울 용기를 잃고 도망치는 바람에 일본군은 조선 수군과 한번 싸우지도 않고 해상권을 손에 넣었다.
이에 이순신은 즉시 전선(戰船)을 정비하고 싸울 태세를 갖췄다. 옥포(玉浦) 앞바다에 적선 30여 척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이순신은 곧바로 그곳으로 달려갔다. 왜군은 조선 수군이 해상으로부터 공격해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육지에 올라가서 불을 지르며 약탈을 하고 있었다. 이순신의 수군이 공격해왔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배에 올라 도망하려 하였지만 이미 때는 늦은 후였다. 이순신의 수군은 왜선 26척을 부수고 많은 왜병을 물리쳤다. 이 싸움이 옥포대첩이다.
그 후 노량(露梁) 앞바다에서도 많은 왜군을 섬멸하였다. 이 싸움에 처음으로 출동한 거북선은 그 위력을 확실하게 인정받았다. 거북선을 앞세운 이순신의 수군은 당포(唐浦), 당항포, 안골포(安骨浦), 한산도 등의 해전에서 연이어 승리를 거두었다.
이순신은 몇 척의 판옥선(板屋船)으로 일본의 수군을 공격하면서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한 뒤 학익진(鶴翼陣)을 치고 맹렬한 공격을 가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것이 세계 전쟁 역사에 기록된 한산도 대첩이다. 한산도 대첩은 진주성대첩(晉州城大捷, 1592.10.5.∼10.) · 행주대첩(幸州大捷, 1593.2.12.)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첩 중 하나이다. 이 대첩은 육지에서 연속된 패배로 사기가 떨어져 있던 조선군에 용기를 되찾게 해주었다.
1593년 남해안 일대의 적군을 완전히 소탕하고 한산도로 진을 옮긴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되었다. 이듬해 중국 명나라가 참전했고 명나라와 일본 간의 강화회담이 진행되면서 전쟁이 잠시 멎는 듯했다. 이때도 이순신은 뒷일에 대비하여 군사 훈련, 군비 확충, 피난민 생업의 보장 등에 힘썼다.
백의종군에서 명량, 노량까지
1597년 왜군이 다시 쳐들어왔다. 명나라와 일본 사이의 강화 회담이 결렬된 것이다. 이 전쟁이 정유재란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그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왜군의 모략과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의 모함으로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때 이순신의 죄명은 조정을 기만하고 임금을 무시한 죄, 적을 토벌하지 않고 나라를 저버린 죄, 다른 사람의 공을 빼앗고 모함한 죄 등이었다. 이순신은 우의정 정탁(鄭琢)의 적극적인 변호로 감옥에서는 풀려나왔지만 도원수 권율(權慄)의 부대에서 사병으로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이순신 대신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은 적의 유인 전술에 넘어가 거제 칠천량(漆川梁)에서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했다. 이에 선조는 죽이려고까지 했던 이순신을 다시 통제사로 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 조선 수군에 남은 군사는 120여 명, 병선은 고작 열두 척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실망하지 않고 명량해전(鳴梁海戰)에 임했다. 좁은 회오리 물길인 울돌목의 암초 지형과 시간차에 따른 조류 방향을 활용한 전술로 133척의 적군과 대결하여 31척을 부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 싸움으로 조선의 수군은 다시 의욕을 찾게 되었다.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도 큰 승리를 이끌어내던 중 선두(船頭)에 서 있던 그는 적의 총탄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그는 죽는 순간 “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삼가라”라는 말을 남겼다. 실제 군사들은 통제사가 죽은 사실을 미처 모른 채 왜군을 대파하였다. 나중에 그의 죽음을 알게 된 사람들은 “죽은 순신이 산 왜군을 물리쳤다”라고 말했다. 이순신이 임진왜란 중에 쓴 <난중일기(亂中日記)>는 임진왜란을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중요한 사료로 꼽히고 있다. 또한 그가 남긴 시조들은 조선 중기 시조문학가로서 꼽힐 만큼 뛰어난 작품성을 보이고 있다.
출처 및 관련자료
-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관련자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난중일기초(亂中日記草)』
- 『징비록(懲毖錄)』
- 천관우, 「성웅이충무공론」, 『한국사의 재발견』, 일조각, 1974.
- 최영희, 「이순신」, 『한국의 인간상』 2, 신구문화사, 19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