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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완진, 「세종대의 어문정책에 대한 연구」, 『성곡논총』 3, 1972. | **김완진, 「세종대의 어문정책에 대한 연구」, 『성곡논총』 3, 197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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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6일 (월) 10:47 기준 최신판
제목 | 애민 정신이 담긴 글자, 한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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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 황인희 |
교열자 | 유안리 |
인물/기관/단체 | 조선, 세종, 주시경, 국어연구학회(한글학회) |
장소/공간 | 갑오개혁, 일제강점기 |
개념용어 | 훈민정음, 한자, 자주 정신, 민본주의, 자음과 모음, 첫소리, 가운뎃소리, 끝소리, 어금닛소리 · 혓소리 · 입술소리 · 잇소리 · 목소리, 천지인, 유교 경전, 불경, 한글 전용 대원칙, 민족 말살 정책, 비문해율 |
목차
1차 원고
한글은 조선의 제4대 임금인 세종이 1443년에 만들어 1446년 반포한 한국 고유의 문자이다. 처음 만들어졌을 때의 이름은 ‘훈민정음’으로 이는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이다. ‘바른’이라는 말을 붙인 이유는 중국 문자인 한자와 달리 우리말을 제대로 적을 수 있는 문자임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한글은 처음에는 모두 스물여덟 자였는데 그 중 네 글자가 소멸되어 현재 스물네 자가 쓰이고 있다. 이전까지 한민족에게는 고유의 글자가 없었다. 관청이나 정부에서는 한자를 빌려다 썼지만 대부분의 일반 민중은 어려운 한자를 배우지 못했다. 또 한자는 남의 글자이므로 이를 빌려 우리말을 적으면 서로 맞지 않아 뜻을 제대로 전할 수 없었다.
세종은 일반 민중이 글자가 없어 불편을 겪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는 주체성이 강하고 혁신적 성향을 가진 성군으로서 민중을 위해 새 글자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갖게 되었다. 이런 세종의 의지와 창제의 이유는 ‘훈민정음’ 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 첫째, 우리말이 중국말과 다른 데도 중국 글자를 쓰므로 불편한 점이 많아 우리말에 맞는 새 글자를 만든다는 것, 둘째, 어리석은 백성이 쉽게 글자를 배워 문자 생활을 편하게 하기 위해 만든다는 것이다. 훈민정음은 이렇게 세종의 강한 민족 자주 정신과 민본주의가 담겨 있는 글자이다.
한글은 자음과 모음을 로마자처럼 한 줄로 쓰는 것이 아니고 첫소리와 가운뎃소리, 끝소리를 모아서 쓰는 글자이다. 언어학자들은 첫소리로 쓰이는 자음을 어금닛소리 · 혓소리 · 입술소리 · 잇소리 · 목소리의 다섯 가지로 나누는데, 한글은 각각의 발음 기관의 모양을 본떠 ‘ㄱ ㄴ ㅁ ㅅ ㅇ’의 다섯 글자로 만든 것이다. 소리가 세어짐에 따라, 이 다섯 글자에 획을 하나씩 더하여 더 많은 글자를 만들었다. 가운뎃소리로 쓰이는 모음은 ‘ · ’ , ‘ㅡ’, ‘ ㅣ ’을 기본으로 하고 이를 조합하여 ‘ㅗ, ㅏ, ㅜ, ㅓ’를 만들었다. ‘·’는 하늘을, ‘ㅡ’는 땅을, 그리고 ‘ㅣ’는 사람의 서 있는 모양을 본뜬 것이다.
훈민정음이 창제된 뒤 조선에서는 유교 경전의 번역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이를 민중에게도 널리 읽히고 유교의 교훈에 따라 살도록 계몽하기 위해서였다. 조선 중기 이전에는 유교 경전 · 의학 서적 · 농업 서적 · 계몽 서적 등이 주로 발간되었다. 또 훈민정음은 불경 번역에도 이용되었다. 한문으로 된 어려운 불경을 쉽게 번역하고 훈민정음으로 표기하여 일반 신자들에게 널리 읽히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초까지도 조선의 공용 문자는 한글이 아니라 한자가 쓰였다. 훈민정음이 정식으로 공용 문자가 된 것은 갑오개혁이 실시된 1894년 11월 21일의 일이다. 이날 조선 정부 칙령 제1호로 “법률 명령은 다 국문(한글)으로 기본을 삼고, 한자 번역을 붙이며, 혹 국한문을 혼용함”이라는, 한글 전용 대원칙에 관한 법령이 공포된 것이다. 훈민정음이 반포된 지 450년 만에 비로소 공식적인 국가의 문자로서 자격을 얻은 것이다.
‘한글’이라는 이름은 1927년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한글학자 주시경이 1908년에 창립한 국어연구학회(한글학회의 전신)에서 〈한글〉이라는 기관지를 펴내면서부터였다. '한'은 '하나' 또는 '큰'의 뜻이며 ‘한글’은 훌륭한 우리말을 적는 글자라는 뜻으로, 한국의 나라 글자라는 권위를 부여해주고 있다.
이후에도 한글은 한 차례 더 곤욕을 겪었다. 일제강점기 말인 1938년 일본은 한국의 민족을 말살하기 위해 학교에서 한글과 한국말을 가르치지 않고 일상 생활에서도 일본말과 글만 사용하도록 강요한 것이다. 1945년 일본으로부터 해방이 되고나서 한글도 나라 글의 자리를 되찾을 수 있었다.
훈민정음은 처음부터 민중을 위해 창제된 글자이니 비교적 쉽게 배울 수 있다. 그 덕에 한국의 비문해율은 1.7%(2008년 통계)에 지나지 않는다. 인위적으로 어느 한 시기에 만들어진 문자가 이렇게 정착된다는 것은 문화사적으로 매우 특이한 일이다. 일시에 반포 · 사용된 이후 약 600년 가까이 지속적으로 사용되는 문자는 세계에서 오직 한글밖에 없다.
연구원 검토
검토의견 | |
•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초까지도 조선의 공용 문자는 한글이 아니라 한자가 쓰였다. 훈민정음이 정식으로 공용 문자가 된 것은 갑오개혁이 실시된 1894년 11월 21일의 일이다.”을 “한글은 일상생활에서 널리 사용되었으며 숙명신한첩, 홍길동전, 춘향전 등 다양한 문서 및 주요 서책 등에서 활발하게 사용되었다. 그러나 훈민정음이 정식으로 공용 문자가 된 것은 갑오개혁이 실시된 1894년이다”로 수정할 수 있다. | |
• - 임금의 경우 ( )안에 생몰연대와 즉위년도를 함께 서술. - 한글의 자음과 모음 설명을 좀 더 간단하게 설명. 어금닛소리... 등까지는 서술하지 않아도 될 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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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원고
한글은 조선의 제4대 임금인 세종이 1443년에 만들어 1446년 반포한 한국 고유의 문자이다. 처음 만들어졌을 때의 이름은 ‘훈민정음’으로 이는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이다. ‘바른’이라는 말을 붙인 이유는 중국 문자인 한자와 달리 우리말을 제대로 적을 수 있는 문자임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한글은 처음에는 모두 스물여덟 자였는데 그 중 네 글자가 소멸되어 현재 스물네 자가 쓰이고 있다. 이전까지 한민족에게는 고유의 글자가 없었다. 관청이나 정부에서는 한자를 빌려다 썼지만 대부분의 일반 민중은 어려운 한자를 배우지 못했다. 또 한자는 남의 글자이므로 이를 빌려 우리말을 적으면 서로 맞지 않아 뜻을 제대로 전할 수 없었다.
세종은 일반 민중이 글자가 없어 불편을 겪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는 주체성이 강하고 혁신적 성향을 가진 성군으로서 민중을 위해 새 글자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갖게 되었다. 이런 세종의 의지와 창제의 이유는 ‘훈민정음’ 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 첫째, 우리말이 중국말과 다른 데도 중국 글자를 쓰므로 불편한 점이 많아 우리말에 맞는 새 글자를 만든다는 것, 둘째, 어리석은 백성이 쉽게 글자를 배워 문자 생활을 편하게 하기 위해 만든다는 것이다. 훈민정음은 이렇게 세종의 강한 민족 자주 정신과 민본주의가 담겨 있는 글자이다.
한글은 자음과 모음을 로마자처럼 한 줄로 쓰는 것이 아니고 첫소리와 가운뎃소리, 끝소리를 모아서 쓰는 글자이다. 언어학자들은 첫소리로 쓰이는 자음을 어금닛소리 · 혓소리 · 입술소리 · 잇소리 · 목소리의 다섯 가지로 나누는데, 한글은 각각의 발음 기관의 모양을 본떠 ‘ㄱ ㄴ ㅁ ㅅ ㅇ’의 다섯 글자로 만든 것이다. 소리가 세어짐에 따라, 이 다섯 글자에 획을 하나씩 더하여 더 많은 글자를 만들었다. 가운뎃소리로 쓰이는 모음은 ‘ · ’ , ‘ㅡ’, ‘ ㅣ ’을 기본으로 하고 이를 조합하여 ‘ㅗ, ㅏ, ㅜ, ㅓ’를 만들었다. ‘·’는 하늘을, ‘ㅡ’는 땅을, 그리고 ‘ㅣ’는 사람의 서 있는 모양을 본뜬 것이다. 훈민정음이 창제된 뒤 조선에서는 유교 경전의 번역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이를 민중에게도 널리 읽히고 유교의 교훈에 따라 살도록 계몽하기 위해서였다. 조선 중기 이전에는 유교 경전 · 의학 서적 · 농업 서적 · 계몽 서적 등이 주로 발간되었다. 또 훈민정음은 불경 번역에도 이용되었다. 한문으로 된 어려운 불경을 쉽게 번역하고 훈민정음으로 표기하여 일반 신자들에게 널리 읽히고자 한 것이었다.
한글은 일상생활에서 널리 사용되었으며 <숙명신한첩>, <홍길동전>, <춘향전> 등 다양한 문서 및 주요 서책 등에서 활발하게 사용되었다. 그러나 훈민정음이 정식으로 공용 문자가 된 것은 갑오개혁이 실시된 1894년이다. 이날 조선 정부 칙령 제1호로 “법률 명령은 다 국문(한글)으로 기본을 삼고, 한자 번역을 붙이며, 혹 국한문을 혼용함”이라는, 한글 전용 대원칙에 관한 법령이 공포된 것이다. 훈민정음이 반포된 지 450년 만에 비로소 공식적인 국가의 문자로서 자격을 얻은 것이다.
'한글’이라는 이름은 1927년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한글학자 주시경이 1908년에 창립한 국어연구학회(한글학회의 전신)에서 〈한글〉이라는 기관지를 펴내면서부터였다. '한'은 '하나' 또는 '큰'의 뜻이며 ‘한글’은 훌륭한 우리말을 적는 글자라는 뜻으로, 한국의 나라 글자라는 권위를 부여해주고 있다.
이후에도 한글은 한 차례 더 곤욕을 겪었다. 일제강점기 말인 1938년 일본은 한국의 민족을 말살하기 위해 학교에서 한글과 한국말을 가르치지 않고 일상 생활에서도 일본말과 글만 사용하도록 강요한 것이다. 1945년 일본으로부터 해방이 되고나서 한글도 나라 글의 자리를 되찾을 수 있었다.
훈민정음은 처음부터 민중을 위해 창제된 글자이니 비교적 쉽게 배울 수 있다. 그 덕에 한국의 비문해율은 1.7%(2008년 통계)에 지나지 않는다. 인위적으로 어느 한 시기에 만들어진 문자가 이렇게 정착된다는 것은 문화사적으로 매우 특이한 일이다. 일시에 반포·사용된 이후 약 600년 가까이 지속적으로 사용되는 문자는 세계에서 오직 한글밖에 없다.
교열본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
한글은 조선의 제4대 임금인 세종이 1443년에 만들어 1446년 반포한 한국 고유의 문자이다. 처음 만들어졌을 때의 이름은 ‘훈민정음’으로 이는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이다. ‘바른’이라는 말을 붙인 이유는 중국 문자인 한자와 달리 우리말을 제대로 적을 수 있는 문자임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이전까지 한민족에게는 고유의 글자가 없었다. 관청이나 정부에서는 한자를 빌려다 썼지만 대부분의 일반 민중은 어려운 한자를 배우지 못했다. 또 한자는 남의 글자이므로 이를 빌려 우리말을 적으면 서로 맞지 않아 뜻을 제대로 전할 수 없었다.
세종은 일반 민중이 글자가 없어 불편을 겪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는 주체성이 강하고 혁신적 성향을 가진 성군으로서 민중을 위해 새 글자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갖게 되었다. 이런 세종의 의지와 창제의 이유는 ‘훈민정음’ 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 첫째, 우리말이 중국말과 다른 데도 중국 글자를 쓰므로 불편한 점이 많아 우리말에 맞는 새 글자를 만든다는 것, 둘째, 어리석은 백성이 쉽게 글자를 배워 문자 생활을 편하게 하기 위해 만든다는 것이다. 훈민정음은 이렇게 세종의 강한 민족 자주 정신과 민본주의가 담겨 있는 글자이다.
훈민정음에 담긴 과학과 철학
처음 반포할 당시 한글은 모두 스물여덟 자였다. 그 중 네 글자가 소멸되어 현재는 스물네 자가 쓰이고 있다. 한글은 자음과 모음을 로마자처럼 한 줄로 쓰는 것이 아니고 첫소리와 가운뎃소리, 끝소리를 모아서 쓰는 글자이다.
언어학자들은 첫소리로 쓰이는 자음을 어금닛소리 · 혓소리 · 입술소리 · 잇소리 · 목소리의 다섯 가지로 나누는데, 한글은 각각의 발음 기관의 모양을 본떠 ‘ㄱ ㄴ ㅁ ㅅ ㅇ’의 다섯 글자로 만든 것이다. 소리가 세어짐에 따라, 이 다섯 글자에 획을 하나씩 더하여 더 많은 글자를 만들었다.
가운뎃소리로 쓰이는 모음은 ‘ · ’ , ‘ㅡ’, ‘ ㅣ ’을 기본으로 하고 이를 조합하여 ‘ㅗ, ㅏ, ㅜ, ㅓ’를 만들었다. ‘·’는 하늘을, ‘ㅡ’는 땅을, 그리고 ‘ㅣ’는 사람의 서 있는 모양을 본뜬 것이다. 천지인(天地人)은 단군사상에서 유래한 것으로 만물을 이루는 요소로 꼽는 것이다.
한국의 나라 글자, 한글
훈민정음이 창제된 뒤 조선에서는 유교 경전의 번역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이를 민중에게도 널리 읽히고 유교의 교훈에 따라 살도록 계몽하기 위해서였다. 조선 중기 이전에는 유교 경전 · 의학 서적 · 농업 서적 · 계몽 서적 등이 주로 발간되었다. 또 훈민정음은 불경 번역에도 이용되었다. 한문으로 된 어려운 불경을 쉽게 번역하고 훈민정음으로 표기하여 일반 신자들에게 널리 읽히고자 한 것이었다.
한글은 일상생활에서 널리 사용되었으며 <숙명신한첩>, <홍길동전>, <춘향전> 등 다양한 문서 및 주요 서책 등에서 활발하게 사용되었다. 그러나 훈민정음이 정식으로 공용 문자가 된 것은 갑오개혁이 실시된 1894년이다. 이날 조선 정부 칙령 제1호로 “법률 명령은 다 국문(한글)으로 기본을 삼고, 한자 번역을 붙이며, 혹 국한문을 혼용함”이라는, 한글 전용 대원칙에 관한 법령이 공포된 것이다. 훈민정음이 반포된 지 450년 만에 비로소 공식적인 국가의 문자로서 자격을 얻은 것이다.
‘한글’이라는 이름은 1927년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한글학자 주시경이 1908년에 창립한 국어연구학회(한글학회의 전신)에서 〈한글〉이라는 기관지를 펴내면서부터였다. '한'은 '하나' 또는 '큰'의 뜻이며 ‘한글’은 훌륭한 우리말을 적는 글자라는 뜻으로, 한국의 나라 글자라는 권위를 부여해주고 있다.
이후에도 한글은 한 차례 더 곤욕을 겪었다. 일제강점기 말인 1938년 일본은 한국의 민족을 말살하기 위해 학교에서 한글과 한국말을 가르치지 않고 일상생활에서도 일본말과 글만 사용하도록 강요한 것이다. 1945년 일본으로부터 해방이 되고나서 한글도 나라 글의 자리를 되찾을 수 있었다. 10월 9은 한글날인데, 훈민정음을 반포한 날을 양력으로 환산하여 정한 것이다.
쉽고도 현대적인 글자
훈민정음은 처음부터 민중을 위해 창제된 글자답게 비교적 쉽게 배울 수 있다. 그 덕에 한국의 비문해율은 1.7%(2008년 통계)에 지나지 않는다. 인위적으로 어느 한 시기에 만들어진 문자가 이렇게 정착된다는 것은 문화사적으로 매우 특이한 일이다. 일시에 반포·사용된 이후 약 600년 가까이 지속적으로 사용되는 문자는 세계에서 오직 한글 밖에 없다.
특히 한국은 세계에서 손꼽힐 정도로 인터넷이 발달하여 컴퓨터 사용인구가 많다. 여기에는 한글이 컴퓨터 사용에 용이한 것도 한 이유가 되었다. 컴퓨터 인자(印字)에서 앞의 자모 24자에 이중자모 16자를 합쳐 40자면 어떤 글자라도 모두 쓸 수 있다.
이런 편리한 표기 방식 때문에 한글은 2009년에 처음으로 인도네시아의 소수 민족인 찌아찌아족의 언어인 찌아찌아어를 표기하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출처 및 관련자료
- 관련자료
-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 주시경, 『국문연구(國文硏究)』, 필사본, 1909.
- 방종현, 『훈민정음통사』, 일성당서점, 1948.
- 이숭녕, 『국어조어논고』, 을유문화사, 1961.
- 최현배, 『고친 한글갈』, 정음사, 1961.
- 김윤경, 『새로 지은 국어학사』, 을유문화사, 1963.
- 이기문, 『국어표기법의 역사적연구』, 서울대학교한국연구원, 1963.
- 이기문, 『개화기의 국문연구』, 일조각, 1970.
- 『한글학회50년사』, 한글학회, 1971.
- 김민수, 『국어정책론』, 고려대학교출판부, 1973.
- 허웅, 『한글과 민족문화』,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4.
- 이응호, 『개화기의 한글운동사』, 성청사, 1975.
- 김민수, 『주시경연구』, 탑출판사, 1977.
- 김민수, 『신국어학사』, 일조각, 1980.
- 강신항, 『훈민정음연구』,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1987.
- 이익섭, 『국어표기법연구』,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2.
- 김완진, 「세종대의 어문정책에 대한 연구」, 『성곡논총』 3, 19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