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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현대사』, 국사편찬위원회편, 1982.
 
** 『한국현대사』, 국사편찬위원회편, 1982.
  
[[분류:한국의 중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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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원고검토용]]

2017년 10월 23일 (월) 21:39 판

제목 독립 운동과 일본으로부터의 해방
집필자 황인희
교열자 유안리
인물/기관/단체 안창호, 한민족,조선총독부, 임시 정부, 김구, 이봉창, 윤봉길, 광복군, 이승만, 주미 외교위원회, 루스벨트, 트루먼
장소/공간 훙커우 공원, 상하이, 소련, 카이로, 얄타, 포츠담, 히로시마, 나가사키
사건 이봉창의 의거, 일본군 전승 기념식, 윤봉길의 의거, 카이로 회담, 얄타 회담, 포츠담 회담, 히로시마 원폭 투하
개념용어 한일병합조약, 무실·역행·충의·용감, 한국의 신탁 통치 안



1차 원고

1910년 8월 29일, 일본이 한일병합조약을 발표함으로써 한민족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로부터 36년 동안 한민족은 일본의 강압적인 지배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민족의 지도자들은 일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나라 안에서, 나라 밖에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 노력과 당시 세계사의 흐름에 힘입어 1945년 8월 15일 한민족은 해방을 맞이하였다.

독립 운동은 나라 안보다는 나라 밖에서 더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나라 안에서는 조선총독부의 탄압이 심했기 때문이다. 독립 운동은 주로 중국과 미국에서 전개되었다. 중국에는 임시 정부가 만들어졌는데 그 임시 정부를 끝까지 지킨 사람은 김구였다.

임시 정부는 1932년 1월 일본 도쿄에서 일왕의 행렬에 폭탄을 던진 이봉창의 의거, 4월 중국 상하이의 훙커우 공원의 일본군 전승 기념식에 폭탄을 던져 일본군 사령관과 고위 관리들에게 피해를 안긴 윤봉길의 의거 등 적극적인 행동을 보여주었다.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임시 정부는 일본에 선전 포고를 했다. 상황이 급박해지면서 좌우의 인사들이 손을 잡고 해방을 위해 힘을 모았다. 또 임시 정부는 광복군을 만들고 그 힘을 길러 나라 안에 있는 일본군을 몰아내려 작전을 세우기도 했다.

해방을 전후한 때 미국과 멕시코, 쿠바 등에는 약 1만 명의 동포가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이승만을 중심으로 독립 운동을 펼쳤다. 임시 정부의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은 미국에서 열리는 여러 국제 회의장에 나아가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하지만 미국은 별 관심을 갖지 않았다. 당시 미국은 일본과 사이가 나빠지는 것을 무릅쓰고 한국에 관심을 둘 필요는 없다고 여긴 것이다. 이승만은 포기하지 않고 미국에 있는 한인 단체들을 연합하여 워싱턴에 주미 외교위원회를 만들었다. 중국에 있던 임시 정부도 이를 존중하여 이승만을 임시 정부의 주미 외교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 직후, 이승만은 임시 정부 주미 외교위원장의 자격으로 미국 국무부에 임시 정부의 승인을 요청했다. 하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이승만은, 소련이 한반도에 들어온 후에 벌어질 위험에 대해서 미국에 경고했다. 소련을 막기 위해서 임시 정부의 승인이 꼭 필요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런데 미국은 이를 외면했다. 당시 소련은 미국과 한 편에 서서 전쟁을 치르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미국 등 강대국들은 전쟁이 끝난 후 일어날 여러 가지 문제는 논의하기 위해 자주 회의를 했다. 그때마다 한국의 문제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눴다. 1943년 이집트 카이로에서 열린 회의에서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이 신탁 통치 안을 내놓았다. 함께 회의를 하던 영국, 중국의 정상들도 이 의견에 동의했다. 한국의 신탁 통치 안은 1945년 미국, 영국, 소련의 정상이 참석한 얄타회담에서 다시 확인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연합국이 한국을 신탁 통치한다는 소식을 들은 독립 운동가들은 이를 반대했다. 임시 정부 지도자들은 크게 화를 내며 미국과 중국 정부에 카이로 선언에 대한 해명을 요구했다. 하지만 두 나라는 임시 정부의 요구를 묵살했다. 임시 정부는 일본이 망하더라도 신탁 통치에 대해서 반대할 뜻을 밝혔다.

1945년 5월, 일본과 한 편에 서서 전쟁하던 독일이 무조건 항복하였다. 이후 독일 포츠담에서 열린 미국, 영국, 소련의 정상 회담에서 미국과 소련만이 한반도의 일본군과 싸우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루스벨트 대통령이 사망하고 미국 대통령이 된 트루먼은 소련 없이 미국 혼자서 전쟁을 끝내고 싶어 했다. 그래서 8월 6일과 9일에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리기로 하였다. 두 도시에 원자폭탄을 맞은 일본은 8월 11일 항복을 결정하였다. 이로써 한민족은 1945년 8월 15일, 드디어 일본으로부터 해방이 될 수 있었다.

연구원 1차 검토

검토의견
일제강점기 35년 동안 독립운동은 국내외가 대부분 유기적으로 연결돼 이루어졌다. 이 글에서는 대외적인 독립운동에 대해서만 적고 있는데, 국내 계몽단체의 항일운동에 대한 내용도 보완되었으면 한다.
- 독립운동에 대해 초점을 맞추어 서술했으면... 그것만으로도 분량 충분

- 독립운동의 변천 과정을 국내외 정세와 연결하여 정리
- 시기별, 지역별 주요 인물과 사건 몇몇을 선정하여 설명하였으면 : 유관순, 김마리아, 안중군, 청산대첩, 봉오동전투, 임시정부, 중국과 러시아 지역 등의 독립군 등

- 해방은 제2차대전에서 일본의 패전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 국내외에서의 노력의 결과였음도 서술


수정 원고

1910년 8월 29일, 일본이 한일병합조약을 발표함으로써 한민족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로부터 36년 동안 한민족은 일본의 강압적인 지배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민족의 지도자들은 일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나라 안에서, 나라 밖에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 노력과 당시 세계사의 흐름에 힘입어 1945년 8월 15일 한민족은 해방을 맞이하였다.

독립 운동은 나라 안보다는 나라 밖에서 더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나라 안에서는 조선총독부의 탄압이 심했기 때문이다. 독립 운동은 주로 중국과 미국에서 전개되었다. 중국에는 임시 정부가 만들어졌는데 그 임시 정부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의 주역은 안창호였고 끝까지 지킨 사람은 김구였다.

안창호는 교육을 통하여 민족 혁신을 이룩하여 독립을 이루려는 ‘실력 양성 운동’에 앞장섰다. 그는 “나 하나를 건전한 인격으로 만드는 것이 우리 민족을 건전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라고 말하며 ‘무실(務實)·역행(力行)·충의(忠義)·용감(勇敢)’의 4대 정신으로 자기 개조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중 ‘무실’은 참되기를 힘쓰자는 것이며 ‘역행’은 힘써 행하자는 것이다. 그는 점진학교·대성학교·동명학원 등 학교를 세우고 흥사단운동을 통해서 ‘건전한 인격을 가진 애국심 있는 국민의 양성’이라는 교육 이념을 실천하며 독립 운동에 힘썼다.

중국에 세워진 임시 정부는 1932년 1월 일본 도쿄에서 일왕의 행렬에 폭탄을 던진 이봉창의 의거, 4월 중국 상하이의 훙커우 공원의 일본군 전승 기념식에 폭탄을 던져 일본군 사령관과 고위 관리들에게 피해를 안긴 윤봉길의 의거 등 적극적인 행동을 보여주었다.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임시 정부는 일본에 선전 포고를 했다. 임시 정부는 광복군을 만들고 그 힘을 길러 나라 안에 있는 일본군을 몰아내려 작전을 세우기도 했다.

또 중국의 간도와 연해주 지방에서는 독립군 부대가 활약했다. 1919년 3.1운동에 자극을 받은 김좌진 · 김규식 · 이범석 등이 조직한 북로군정서는 북만주 일대 독립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북로군정서는 길림성 왕청현(吉林省 汪淸縣)에 본부를 두고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김좌진이 이끈 독립군이 일본군과 맞서 싸운 전투 중 가장 큰 규모의 것은 청산리 전투이다.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이어진 이 전투에서 독립군은 1,200여 명의 적을 사살하였다. 이는 독립군이 거둔 가장 빛나는 승리였다.

독립 운동은 미주 지역에서도 펼쳐졌다. 해방을 전후한 때 미국과 멕시코, 쿠바 등에는 약 1만 명의 동포가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이승만을 중심으로 독립 운동을 펼쳤다. 임시 정부의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은 미국에서 열리는 여러 국제 회의장에 나아가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이승만은 미국에 있는 한인 단체들을 연합하여 워싱턴에 주미 외교위원회를 만들었다. 중국에 있던 임시 정부도 이를 존중하여 이승만을 임시 정부의 주미 외교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 직후, 이승만은 임시 정부 주미 외교위원장의 자격으로 미국 국무부에 임시 정부의 승인을 요청했다. 하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승만은, 소련이 한반도에 들어온 후에 벌어질 위험에 대해서 경고하며 소련을 막기 위해서 임시 정부의 승인이 꼭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미국은 이를 외면했다. 당시 소련은 미국과 한 편에 서서 전쟁을 치르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1945년 5월, 일본과 한 편에 서서 전쟁하던 독일이 무조건 항복하였다. 이후 독일 포츠담에서 열린 미국, 영국, 소련의 정상 회담에서 미국과 소련만이 한반도의 일본군과 싸우기로 결정했다. 미국은 8월 6일과 9일에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렸고 두 도시에 원자폭탄을 맞은 일본은 8월 11일 항복을 결정하였다. 한민족은 목숨을 아끼지 않은 독립군의 활약과 연합군의 승전으로 1945년 8월 15일, 드디어 일본으로부터 해방이 될 수 있었다.

연구원 2차검토

검토의견
기존의 검토의견이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음. “독립 운동은 나라 안보다는 나라 밖에서 더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나라 안에서는 조선총독부의 탄압이 심했기 때문이다. 독립 운동은 주로 중국과 미국에서 전개되었다. 중국에는 임시 정부가 만들어졌는데 그 임시 정부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의 주역은 안창호였고 끝까지 지킨 사람은 김구였다.”을 삭제하고 이를 “독립운동은 국내외에서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1917년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촉구하는 선언을 발표하였고, 1919년 국내에서 1500회 이상의 독립을 위한 집회와 시위가 있어났다. 중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에 대항하여 항일 무장투쟁이 본격화되었다”로 수정‧보충하는 것을 제안함.


교열본

다양한 형태로 일본에 맞서다

1910년 8월 29일, 일본이 한일병합조약을 발표함으로써 한민족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로부터 35년 동안 한민족은 일본의 강압적인 지배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민족의 지도자들은 일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나라 안에서든 나라 밖에서든 목숨을 아끼지 않고 많은 힘을 쏟았다. 당시 세계사의 흐름에 그런 노력이 더해져 1945년 8월 15일 한민족은 해방을 맞이하였다.

해방을 맞이하기까지 독립운동은 국내외에서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1918년 2월 8일, 도쿄에서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는 이듬해 3·1운동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1919년에는 독립을 위한 집회와 시위가 국내에서만 1500회 이상 일어났다. 중국에서 모인 독립운동가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에 대항하여 만주와 연해주를 중심으로 무장 독립단체들이 생겨나 항일 무장투쟁도 본격화되었다.

안창호의 실력 양성 운동

한일합병조약 전후로 국내외에 수백 개의 교육기관이 설립되었다. 독립운동가들이 세운 이들 학교에서는 단지 신학문교육이 아니라 민족의식과 독립의지를 고취시키는 교육을 병행했다. 대표적인 교육운동가로 안창호를 꼽을 수 있다.

안창호는 교육을 통하여 민족 혁신을 이룩하여 독립을 이루려는 ‘실력 양성 운동’에 앞장섰다. 그는 “나 하나를 건전한 인격으로 만드는 것이 우리 민족을 건전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라고 말하며 ‘무실(務實)·역행(力行)·충의(忠義)·용감(勇敢)’의 4대 정신으로 자기 개조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중 ‘무실’은 참되기를 힘쓰자는 것이며 ‘역행’은 힘써 행하자는 것이다. 그는 점진학교·대성학교·동명학원 등 학교를 세우고 흥사단운동을 통해서 ‘건전한 인격을 가진 애국심 있는 국민의 양성’이라는 교육 이념을 실천하며 독립 운동에 힘썼다.

적극적인 무장 항일 운동

중국에 세워진 임시 정부는 1932년 1월 일본 도쿄에서 일왕의 행렬에 폭탄을 던진 이봉창의 의거, 4월 중국 상하이의 훙커우 공원의 일본군 전승 기념식에 폭탄을 던져 일본군 사령관과 고위 관리들에게 피해를 안긴 윤봉길의 의거 등 적극적인 행동을 보여주었다.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임시 정부는 일본에 선전 포고를 했다. 임시 정부는 광복군을 만들고 그 힘을 길러 나라 안에 있는 일본군을 몰아내려 작전을 세우기도 했다.

또 중국의 간도와 연해주 지방에서는 독립군 부대가 활약했다. 1919년 3.1운동에 자극을 받은 김좌진 · 김규식 · 이범석 등이 조직한 북로군정서는 북만주 일대 독립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북로군정서는 길림성 왕청현(吉林省 汪淸縣)에 본부를 두고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김좌진이 이끈 독립군이 일본군과 맞서 싸운 전투 중 가장 큰 규모의 것은 청산리 전투이다.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이어진 이 전투에서 독립군은 1,200여 명의 적을 사살하였다. 이는 독립군이 거둔 가장 빛나는 승리였다.

해외 동포들의 독립 운동

독립 운동은 미주 지역에서도 펼쳐졌다. 해방을 전후하여 미국과 멕시코, 쿠바 등에는 약 1만 명의 동포가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이승만을 중심으로 독립 운동을 펼쳤다. 임시 정부의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은 미국에서 열리는 여러 국제 회의장에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이승만은 미국에 있는 한인 단체들을 연합하여 워싱턴에 주미 외교위원회를 만들었다. 중국에 있던 임시 정부도 이를 존중하여 이승만을 임시 정부의 주미 외교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 직후, 이승만은 임시 정부 주미 외교위원장의 자격으로 미국 국무부에 임시 정부의 승인을 요청했다. 하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승만은, 소련이 한반도에 들어온 후에 벌어질 위험에 대해서 경고하며 소련을 막기 위해서 임시 정부의 승인이 꼭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미국은 이를 외면했다. 당시 소련은 미국과 한 편에 서서 전쟁을 치르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1945년 5월, 일본과 한 편에 서서 전쟁하던 독일이 무조건 항복하였다. 이후 독일 포츠담에서 열린 미국, 영국, 소련의 정상 회담에서 미국과 소련만이 한반도의 일본군과 싸우기로 결정했다. 미국은 8월 6일과 9일에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렸고 두 도시에 원자폭탄을 맞은 일본은 8월 11일 항복을 결정하였다. 한민족은 목숨을 아끼지 않은 독립군의 활약과 연합군의 승전으로 1945년 8월 15일, 드디어 일본으로부터 해방이 될 수 있었다.

출처 및 관련자료

  • 출처
    • 이영훈, 『대한민국 역사』, 기파랑, 2013.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관련자료
    • 『자료대한민국사』, 국사편찬위원회, 1970.
    • 송남헌, 『해방삼십년사』Ⅰ, 한국사료연구소, 1976.
    • 송건호 외, 『해방전후사의 인식』, 한길사, 1979.
    • 『한국현대사』, 국사편찬위원회편, 19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