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ft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한국인의 저항

Korea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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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을사조약은 불법 조약이다.
집필자 박선희
교열자 유안리
인물/기관/단체 고종, 이토 히로부미, 이완용, 안중근, 최익현, 헤이그특사
장소/공간 중명전, 하얼빈
사건 을사조약, 한일신협약, 헤이그특사, 의병전쟁, 한일병합조약, 안중근 의거
기록물 고종실록, 황성신문, 한국통사, “자유를 향한 한국의 투쟁”(F.A.McKenzie)
개념용어 을사조약, 을사5적, 의병
물품/도구/유물 을사조약 문서



1차 원고

1904년 러시아와 전쟁을 시작한 일본은 한국 정부를 위협하여 강제 협약을 체결하고 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기 위한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일본은 제국주의 열강의 동의를 받기 위해 1905년 미국과 가쓰라 태프트 밀약을 체결하고 곧이어 영국과 제2차 영일 동맹을 맺었고,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러시아로부터 한국에 관한 독점적 권리를 인정받았다. 이후 일본은 한국 정부를 보호국으로 삼기 위해 이토 히로부미를 한국에 파견하였다.

이에 대해 한국 정부가 강하게 반대하자 일본은 1905년 11월 17일 곳곳에 무장한 일본군을 배치하여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조약 체결을 강요하였다. 고종과 대신들은 서명을 거부하였으나, 이토 히로부미는 그 중 5명의 대신의 찬성을 받아 조약을 체결하였다. 한국에서는 이 조약을 ‘을사조약’ 또는 ‘을사늑약’이라고 하며, 조약 체결에 찬성한 5명의 대신을 ‘을사5적’이라고 부른다.

을사조약에 따라 한국은 외교권을 일본에 박탈당하여 외국에 있던 한국 외교 기관이 전부 폐지되고 영국, 미국, 청국, 독일, 벨기에 등 주한 공사들은 공사관에서 철수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또한 서울에 통감부가 설치되고,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취임하였다. 통감부는 외교뿐 아니라 내정 면에서까지도 한국 정부에 직접 명령, 집행하게 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로써 한국은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다.

이에 대해 한국인들은 여러 형태의 저항으로 맞섰다. 장지연이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을 발표하여 일본의 침략성을 규탄하고 조약체결에 찬성한 대신들을 공박하자, 한국인들은 일제히 일어나 조약의 무효화를 주장하고 반대투쟁에 나섰다. 한국인들 가운데 죽음으로써 조국의 수호를 호소하는 이들이 이어졌으며, 상인들은 가게 문을 닫고 학생들은 동맹 휴학을 통해 항의하였다. 한편 민종식, 최익현, 신돌석, 유인석 등이 전국 각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싸웠다.

고종은 조약 체결 4일 뒤 미국에 체재 중인 황실고문 헐버트(Hulburt. H.B.)에게 “총칼의 위협과 강요 아래 체결된 보호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한다. 이에 동의한 적도 없고 앞으로도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이 뜻을 미국정부에 전달하기 바란다.”고 통보하며 이를 선포하라고 하였다.

또한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알리기 위해 1907년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 평화 회의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특사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방해와 이미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한 열강의 비협조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오히려 일본은 헤이그 특사 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한일 신협약을 체결하여 일본인 관리를 대한제국 정부의 차관으로 임명하고 통감부가 내정을 직접 지배하였다. 이어서 대한 제국의 군대를 강제로 해산하였다. 서울과 지방의 해산 군인들이 대거 의병에 가담함으로써 의병의 전투력이 크게 강화되었고, 본격적인 의병 전쟁으로 발전해 나갔다.

유생과 농민, 상인과 군인 등 전국에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의병에 참여하며 세력이 확산되었다. 각 지역의 의병 부대가 연합하여 서울 진공 작전을 감행하기도 하였다. 항일 의병 투쟁이 가장 치열했던 시기는 1908년과 1909년으로 두 해 동안 1000여 차례 이상의 전투가 벌어졌다. 의병들은 하루빨리 조선을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려는 일본의 의도를 목숨을 걸고 막아내었다.

1909년 7월 일본 내각회의는 비밀리에 한국을 완전한 식민지로 병탄하기로 의결하고 일본 국왕의 재가를 받았다. 이와 동시에 일본군은 9월부터 2개월간 이른바 남한 대토벌 작전을 실시하여 의병과 민간인을 학살하고 마을을 통째로 불태우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의병과의 전쟁을 끝낸 뒤 한국을 병합하려 한 것이다.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 역에서 한국인 의병장 안중근의 총에 맞아 죽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체프와 한반도 및 만주 문제 협의를 위한 회담을 하려고 만주 하얼빈에 갔다. 안중근은 ‘대한제국의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킨 죄,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식민화를 꾀하며 동양의 평화를 깨뜨린 죄’ 등 15가지 조항을 들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재판정에서 안중근은 “개인의 사사로움이 아니라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서 대한의 독립 주권을 침탈한 원흉이자 동양 평화의 교란자인 이토를 총살하였다. 나는 살인자가 아니니 전쟁 포로로 대우해 달라”며 당당하게 재판에 임하여 일본인들도 놀라게 하였다.

1910년 3월 26일 일본은 안중근을 처형하고, 6월 한국의 경찰권을 가져간 후 1910년 8월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 통감 데라우치의 이름으로 이른바 한일병합조약을 조인하였다. 한국민의 반항을 두려워하여 조약체결을 숨긴 채, 사회단체의 집회를 금지하고 원로대신들을 연금한 뒤 8월 29일 조약 체결을 반포하였다.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지배하기 시작한 한일병합조약은 처음부터 불법이며, 원천 무효의 것이었다. 왜냐하면 1905년 체결된 을사조약이 황제의 승인과 비준을 받지 못한 조약으로 국제법상 효력이 없는 불법 조약이기 때문에 그 뒤 일제의 통감 및 통감부가 주체가 된 정책과 조약은 모두 효력을 상실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 한일병합조약이 한국 황제 및 정부의 자발적 의사로 이루어지지 않고, 일제의 군사적 점령과 강제 하에서 강요되어 체결된 것이기 때문이다. 일제의 병합은 의병 투쟁에 나섰던 한국인 1만 7600여 명을 학살하고 그보다 훨씬 많은 한국인을 구속하는 폭력 위에 이루어진 것이다.

연구원 검토

검토의견
제시된 사진 자료에 대한 제목 또는 사진 설명을 간단하게 추가하면 좋을 것이다. 예를 들면, 안중근 의사의 손가락 이야기, 헤이그특사(이상설, 이준, 이위종), OOO에서의 독립운동 모습,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 봉기 등이 있다.
- 을사조약이 불법인 이유는 “한국 정부가 강하게 반대하자 일본은 1905년 11월 17일 곳곳에 무장한 일본군을 배치하여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조약 체결을 강요하였다. 고종과 대신들은 서명을 거부하였으나, 이토 히로부미는 그 중 5명의 대신의 찬성을 받아 조약을 체결하였다.”고 서술하였다. 이에 대해 좀 더 적극적으로 국가 간의 조약이 합법이 되기 위해서는 당시 ~한 조건이 맞아야하는데, 을사조약의 경우 ~한 조건에 위배되므로 불법조약이라는 것을 서술하였으면 한다.

- 자료 뒤의 원고(미완성본으로 보이는)의 내용 중 다음의 내용을 포함시키면 좋겠다.
① 일본은 대한제국을 완전히 병합하기 위해 친일 단체인 일진회를 앞세워 합방 청원서를 제출하게 하였다. 마침내 일본은 군대와 경찰을 곳곳에 배치한 가운데 한국 병합 조약을 체결하였다.(1910.8) 이로써 대한 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② 민영환과 조병세 등은 자결 : 자결자 구체적 언급

③ 일본 침략자와 을사 5적 등을 처단하기 위한 활동도 꾸준히 전개되었다.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장인환이 일본의 침략이 정당하다고 주장한 스티븐스를 사살하였다(1908년 3월 23일). : 전명운도 함께 쓸 것


수정 원고

1904년 러시아와 전쟁을 시작한 일본은 한국 정부를 위협하여 강제 협약을 체결하고 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기 위한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일본은 제국주의 열강의 동의를 받기 위해 1905년 미국과 가쓰라 태프트 밀약을 체결하고 곧이어 영국과 제2차 영일 동맹을 맺었고,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러시아로부터 한국에 관한 독점적 권리를 인정받았다. 이후 일본은 한국 정부를 보호국으로 삼기 위해 이토 히로부미를 한국에 파견하였다.

이에 대해 한국 정부가 강하게 반대하자 일본은 1905년 11월 17일 곳곳에 무장한 일본군을 배치하여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조약 체결을 강요하였다. 고종과 대신들은 서명을 거부하였으나, 이토 히로부미는 그 중 5명의 대신의 찬성을 받아 조약을 체결하였다. 한국에서는 이 조약을 ‘을사조약’ 또는 ‘을사늑약’이라고 하며, 조약 체결에 찬성한 5명의 대신을 ‘을사5적’이라고 부른다.

을사조약에 따라 한국은 외교권을 일본에 박탈당하여 외국에 있던 한국 외교 기관이 전부 폐지되고 영국, 미국, 청국, 독일, 벨기에 등 주한 공사들은 공사관에서 철수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또한 서울에 통감부가 설치되고,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취임하였다. 통감부는 외교뿐 아니라 내정 면에서까지도 한국 정부에 직접 명령, 집행하게 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로써 한국은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다.

이에 대해 한국인들은 여러 형태의 저항으로 맞섰다. 장지연이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을 발표하여 일본의 침략성을 규탄하고 조약체결에 찬성한 대신들을 공박하자, 한국인들은 일제히 일어나 조약의 무효화를 주장하고 반대투쟁에 나섰다. 민영환, 조병세 등은 죽음으로써 조국의 수호를 호소하였으며, 상인들은 가게 문을 닫고 학생들은 동맹 휴학을 통해 항의하였다. 일본 침략자와 을사 5적 등을 처단하기 위한 활동도 꾸준히 전개되었다. 나인영과 오기호 등은 5적 암살단을 조직하여 매국노를 처단하려 하였고, 이재명은 이완용을 칼로 찔러 중상을 입혔다.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장인환과 전명운이 일본의 침략이 정당하다고 주장한 스티븐스를 저격하였다(1908.3.) 한편 민종식, 최익현, 신돌석, 유인석 등이 전국 각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싸웠다.

고종은 조약 체결 4일 뒤 미국에 체재 중인 황실고문 헐버트(Hulburt. H.B.)에게 “총칼의 위협과 강요 아래 체결된 보호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한다. 이에 동의한 적도 없고 앞으로도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이 뜻을 미국정부에 전달하기 바란다.”고 통보하며 이를 선포하라고 하였다.

또한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알리기 위해 1907년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 평화 회의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특사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방해와 이미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한 열강의 비협조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오히려 일본은 헤이그 특사 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한일 신협약을 체결하여 일본인 관리를 대한제국 정부의 차관으로 임명하고 통감부가 내정을 직접 지배하였다. 이어서 대한 제국의 군대를 강제로 해산하였다. 서울과 지방의 해산 군인들이 대거 의병에 가담함으로써 의병의 전투력이 크게 강화되었고, 본격적인 의병 전쟁으로 발전해 나갔다.

유생과 농민, 상인과 군인 등 전국에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의병에 참여하며 세력이 확산되었다. 각 지역의 의병 부대가 연합하여 서울 진공 작전을 감행하기도 하였다. 항일 의병 투쟁이 가장 치열했던 시기는 1908년과 1909년으로 두 해 동안 1000여 차례 이상의 전투가 벌어졌다. 의병들은 하루빨리 조선을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려는 일본의 의도를 목숨을 걸고 막아내었다.

1909년 7월 일본 내각회의는 비밀리에 한국을 완전한 식민지로 병탄하기로 의결하고 일본 국왕의 재가를 받았다. 이와 동시에 일본군은 9월부터 2개월간 이른바 남한 대토벌 작전을 실시하여 의병과 민간인을 학살하고 마을을 통째로 불태우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의병과의 전쟁을 끝낸 뒤 한국을 병합하려 한 것이다.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 역에서 한국인 의병장 안중근의 총에 맞아 죽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체프와 한반도 및 만주 문제 협의를 위한 회담을 하려고 만주 하얼빈에 갔다. 안중근은 ‘대한제국의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킨 죄,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식민화를 꾀하며 동양의 평화를 깨뜨린 죄’ 등 15가지 조항을 들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재판정에서 안중근은 “개인의 사사로움이 아니라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서 대한의 독립 주권을 침탈한 원흉이자 동양 평화의 교란자인 이토를 총살하였다. 나는 살인자가 아니니 전쟁 포로로 대우해 달라”며 당당하게 재판에 임하여 일본인들도 놀라게 하였다.

1910년 3월 26일 일본은 안중근을 처형하고, 6월 한국의 경찰권을 가져간 후 대한제국을 완전히 병합하기 위해 친일 단체인 일진회를 앞세워 합방 청원서를 제출하게 하였다. 마침내 일본은 군대와 경찰을 곳곳에 배치한 가운데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 통감 데라우치의 이름으로 이른바 한일병합조약을 조인하였다.(1910.8)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지배하기 시작한 한일병합조약은 처음부터 불법이며, 원천 무효의 것이었다. 1905년 체결된 을사조약은 국가 간의 조약으로서의 기본적인 형식조차 갖추지 못했다. 조약의 이름이 없으며, 고종으로부터 위임장을 받지 않은 외무대신의 직인으로만 체결되었으며, 고종은 이를 승인하지 않았고 비준 절차도 갖추지 않았으므로 국제법상 효력이 없는 불법 조약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뒤 일제의 통감 및 통감부가 주체가 된 정책과 조약은 모두 효력을 상실하는 것이 마땅하다. 한일병합조약이 한국 황제 및 정부의 자발적 의사로 이루어지지 않고, 일제의 군사적 점령과 강제 하에서 강요되어 체결된 것이기 때문이다. 일제의 병합은 의병 투쟁에 나섰던 한국인 1만 7600여 명을 학살하고 그보다 훨씬 많은 한국인을 구속하는 폭력 위에 이루어진 것이다.

교열본

강제로 맺은 을사늑약

1904년 러시아와 전쟁을 시작한 일본은 한국 정부를 위협하여 강제 협약을 체결하고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일본은 제국주의 열강의 동의를 받기 위해 1905년 미국과 가쓰라 태프트 밀약을 체결하고 곧이어 영국과 제2차 영일 동맹을 맺었다. 또 러시아와 맺은 포츠머스 조약으로 한국에 관한 독점적 권리를 인정받았다. 이후 일본은 한국 정부를 보호국으로 삼기 위해 이토 히로부미를 한국에 파견하였다.

이에 대해 한국 정부가 강하게 반대하자 일본은 1905년 11월 17일 곳곳에 무장한 일본군을 배치하여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조약 체결을 강요하였다. 고종과 대신들은 서명을 거부하였으나, 이토 히로부미는 그 중 5명의 대신의 찬성을 받아 조약을 체결하였다. 한국에서는 이 조약을 ‘을사조약’ 또는 ‘을사늑약’이라고 하며, 조약 체결에 찬성한 5명의 대신을 ‘을사5적’이라고 부른다.

을사조약에 따라 한국은 외교권을 일본에 박탈당하였다. 외국에 있던 한국 외교 기관이 전부 폐지되고 영국, 미국, 청국, 독일, 벨기에 등 주한 공사들은 공사관에서 철수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서울에는 통감부가 설치되었으며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취임하였다. 통감부는 외교뿐 아니라 내정 면에서까지도 한국 정부에 직접 명령, 집행하게 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로써 한국은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다.

각계각층의 치열한 저항

이에 대해 한국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저항했다. 장지연이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을 발표하여 일본의 침략성을 규탄하고 조약체결에 찬성한 대신들을 공박하자, 한국인들은 일제히 일어나 조약의 무효화를 주장하고 반대투쟁에 나섰다. 민영환, 조병세 등은 죽음으로써 조국의 수호를 호소하였으며, 상인들은 가게 문을 닫고 학생들은 동맹 휴학으로 항의하였다.

일본 침략자와 을사 5적 등을 처단하기 위한 활동도 꾸준히 전개되었다. 나인영과 오기호 등은 5적 암살단을 조직하여 매국노를 처단하려 하였고, 이재명은 이완용을 칼로 찔러 중상을 입혔다.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장인환과 전명운이 일본의 침략이 정당하다고 주장한 스티븐스를 저격하였다(1908.3.). 전국 각지에서는 민종식, 최익현, 신돌석, 유인석 등이 의병을 일으켜 싸웠다.

고종은 조약 체결 4일 뒤 미국에 체재 중인 황실고문 헐버트(Hulburt. H.B.)에게 “총칼의 위협과 강요 아래 체결된 보호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한다. 이에 동의한 적도 없고 앞으로도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이 뜻을 미국정부에 전달하기 바란다.”고 통보하며 이를 선포하라고 하였다.

또한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알리기 위해 1907년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 평화 회의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특사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방해와 이미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한 열강의 비협조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오히려 일본은 헤이그 특사 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한일 신협약을 체결하였다. 일본인 관리를 대한제국 정부의 차관으로 임명하고 통감부가 내정을 직접 지배하였다. 이어서 대한 제국의 군대를 강제로 해산하였다.

목숨으로 맞선 의병들

서울과 지방에서 해산된 군인들은 대거 의병에 가담하였다. 자연히 의병의 전투력이 크게 강화되었다. 무장한 의병들은 본격적인 의병 전쟁 형태로 저항을 강화해 나갔다. 계속해서 유생과 농민, 상인과 군인 등 전국에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참여하며 의병 세력은 점차 확산되었다. 지역 의병이 서로 연합하여 서울 진공 작전을 감행하기도 하였다.

항일 의병 투쟁이 가장 치열했던 시기는 1908년과 1909년으로 두 해 동안 1000여 차례 이상의 전투가 벌어졌다. 의병들은 하루빨리 조선을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려는 일본의 의도를 목숨을 걸고 막아내었다.

1909년 7월 일본 내각회의는 비밀리에 한국을 완전한 식민지로 병탄하기로 의결하고 일본 국왕의 재가를 받았다. 이와 동시에 일본군은 9월부터 2개월간 이른바 남한 대토벌 작전을 실시하여 의병과 민간인을 학살하고 마을을 통째로 불태우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의병과의 전쟁을 끝낸 뒤 한국을 병합하려 한 것이다.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

1909년 10월 만주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인 의병장 안중근의 총에 맞아 죽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체프와 한반도 및 만주 문제 협의를 위한 회담을 하려고 갔던 것이다. 안중근은 ‘대한제국의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킨 죄,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식민화를 꾀하며 동양의 평화를 깨뜨린 죄’ 등 15가지 조항을 들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재판정에서 그는 “개인의 사사로움이 아니라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서 대한의 독립 주권을 침탈한 원흉이자 동양 평화의 교란자인 이토를 총살하였다. 나는 살인자가 아니니 전쟁 포로로 대우해 달라”며 당당하게 재판에 임하여 일본인들도 놀라게 하였다.

1910년 3월 26일 일본은 안중근을 처형한다. 이어 6월에 한국의 경찰권을 가져간 후 대한제국을 완전히 병합하기 위해 친일 단체인 일진회를 앞세워 합방 청원서를 제출하게 하였다. 마침내 일본은 군대와 경찰을 곳곳에 배치한 가운데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 통감 데라우치의 이름으로 이른바 한일병합조약을 조인하였다.(1910.8)

불법으로 점철된 강제 조약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지배하기 시작한 한일병합조약은 처음부터 불법이며, 원천 무효의 것이었다. 1905년 체결된 을사조약은 국가 간의 조약으로서의 기본적인 형식조차 갖추지 못했다.

조약의 이름이 없으며, 고종으로부터 위임장을 받지 않은 외무대신의 직인으로만 체결되었다. 고종은 이를 승인하지 않았고 비준 절차도 갖추지 않았으므로 국제법상 효력이 없는 불법 조약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뒤 일제의 통감 및 통감부가 주체가 된 정책과 조약은 모두 효력을 상실하는 것이 마땅하다. 한일병합조약이 한국 황제 및 정부의 자발적 의사로 이루어지지 않고, 일제의 군사적 점령과 강제 하에서 강요되어 체결된 것이기 때문이다. 일제의 병합은 의병 투쟁에 나섰던 한국인 1만 7600여 명을 학살하고 그보다 훨씬 많은 한국인을 구속하는 폭력 위에 이루어진 것이다.

2차 교열본

강제로 맺은 을사늑약

1904년 러시아와 전쟁을 시작한 일본은 한국 정부를 위협하여 강제 협약을 체결하고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일본은 제국주의 열강의 동의를 받기 위해 1905년 미국과 가쓰라-태프트밀약을 체결하고 곧이어 영국과 제2차 영일동맹을 맺었다. 또 러시아와 맺은 포츠머스조약으로 한국에 관한 독점적 권리를 인정받았다. 이후 일본은 한국 정부를 보호국으로 삼기 위해 이토 히로부미를 한국에 파견하였다.

이에 대해 한국 정부가 강하게 반대하자 일본은 1905년 11월 17일 곳곳에 무장한 일본군을 배치하여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조약 체결을 강요하였다. 고종과 대신들은 서명을 거부하였으나, 이토 히로부미는 그 중 5명의 대신의 찬성을 받아 조약을 체결하였다. 한국에서는 이 조약을 ‘을사조약’ 또는 ‘을사늑약’이라고 하며, 조약 체결에 찬성한 5명의 대신을 ‘을사5적’이라고 부른다.

을사조약에 따라 한국은 외교권을 일본에 박탈당하였다. 외국에 있던 한국 외교 기관이 전부 폐지되고 영국, 미국, 청국, 독일, 벨기에 등 주한 공사들은 공사관에서 철수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서울에는 통감부가 설치되었으며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취임하였다. 통감부는 외교뿐 아니라 내정 면에서까지도 한국 정부에 직접 명령, 집행하게 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로써 한국은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다.

각계각층의 치열한 저항

이에 대해 한국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저항했다. 장지연이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발표하여 일본의 침략성을 규탄하고 조약체결에 찬성한 대신들을 공박하자, 한국인들은 일제히 일어나 조약의 무효화를 주장하고 반대투쟁에 나섰다. 민영환, 조병세 등은 죽음으로써 조국의 수호를 호소하였으며, 상인들은 가게 문을 닫고 학생들은 동맹 휴학으로 항의하였다.

일본 침략자와 을사5적 등을 처단하기 위한 활동도 꾸준히 전개되었다. 나인영과 오기호 등은 5적 암살단을 조직하여 매국노를 처단하려 하였고, 이재명은 이완용을 칼로 찔러 중상을 입혔다.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장인환과 전명운이 일본의 침략이 정당하다고 주장한 스티븐스를 저격하였다(1908.3.). 전국 각지에서는 민종식, 최익현, 신돌석, 유인석 등이 의병을 일으켜 싸웠다.

고종은 조약 체결 4일 뒤 미국에 체재 중인 황실고문 헐버트(Hulburt. H.B.)에게 “총칼의 위협과 강요 아래 체결된 보호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한다. 이에 동의한 적도 없고 앞으로도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이 뜻을 미국정부에 전달하기 바란다.”고 통보하며 이를 선포하라고 하였다.

또한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알리기 위해 1907년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특사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방해와 이미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한 열강의 비협조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오히려 일본은 헤이그 특사 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한일신협약을 체결하였다. 일본인 관리를 대한제국 정부의 차관으로 임명하고 통감부가 내정을 직접 지배하였다. 이어서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로 해산하였다.

목숨으로 맞선 의병들

서울과 지방에서 해산된 군인들은 대거 의병에 가담하였다. 자연히 의병의 전투력이 크게 강화되었다. 무장한 의병들은 본격적인 의병 전쟁 형태로 저항을 강화해 나갔다. 계속해서 유생과 농민, 상인과 군인 등 전국에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참여하며 의병 세력은 점차 확산되었다. 지역 의병이 서로 연합하여 서울 진공 작전을 감행하기도 하였다.

항일 의병 투쟁이 가장 치열했던 시기는 1908년과 1909년으로 두 해 동안 1000여 차례 이상의 전투가 벌어졌다. 의병들은 하루빨리 조선을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려는 일본의 의도를 목숨을 걸고 막아내었다.

1909년 7월 일본 내각회의는 비밀리에 한국을 완전한 식민지로 병탄하기로 의결하고 일본 국왕의 재가를 받았다. 이와 동시에 일본군은 9월부터 2개월간 이른바 남한 대토벌 작전을 실시하여 의병과 민간인을 학살하고 마을을 통째로 불태우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의병과의 전쟁을 끝낸 뒤 한국을 병합하려 한 것이다.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

1909년 10월 만주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인 의병장 안중근의 총에 맞아 죽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체프와 한반도 및 만주 문제 협의를 위한 회담을 하려고 갔던 것이다. 안중근은 ‘대한제국의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킨 죄,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식민화를 꾀하며 동양의 평화를 깨뜨린 죄’ 등 15가지 조항을 들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재판정에서 그는 “개인의 사사로움이 아니라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서 대한의 독립 주권을 침탈한 원흉이자 동양 평화의 교란자인 이토를 총살하였다. 나는 살인자가 아니니 전쟁 포로로 대우해 달라”며 당당하게 재판에 임하여 일본인들도 놀라게 하였다.

1910년 3월 26일 일본은 안중근을 처형한다. 이어 6월에 한국의 경찰권을 가져간 후 대한제국을 완전히 병합하기 위해 친일 단체인 일진회를 앞세워 합방 청원서를 제출하게 하였다. 마침내 일본은 군대와 경찰을 곳곳에 배치한 가운데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 통감 데라우치의 이름으로 이른바 한일병합조약을 조인하였다.(1910.8)

불법으로 점철된 강제 조약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지배하기 시작한 한일병합조약은 처음부터 불법이며, 원천 무효의 것이었다. 1905년 체결된 을사조약은 국가 간의 조약으로서의 기본적인 형식조차 갖추지 못했다.

조약의 이름이 없으며, 고종으로부터 위임장을 받지 않은 외무대신의 직인으로만 체결되었다. 고종은 이를 승인하지 않았고 비준 절차도 갖추지 않았으므로 국제법상 효력이 없는 불법 조약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뒤 일제의 통감 및 통감부가 주체가 된 정책과 조약은 모두 효력을 상실하는 것이 마땅하다. 한일병합조약이 한국 황제 및 정부의 자발적 의사로 이루어지지 않고, 일제의 군사적 점령과 강제 하에서 강요되어 체결된 것이기 때문이다. 일제의 병합은 의병 투쟁에 나섰던 한국인 1만 7600여 명을 학살하고 그보다 훨씬 많은 한국인을 구속하는 폭력 위에 이루어진 것이다.

출처 및 관련자료

  •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고종실록』
    • 『한국독립운동사』, 국사편찬위원회, 19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