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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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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원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11월 16일 (목) 10:39 판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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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초(自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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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자초
한자 自超
생몰년 1327(충숙왕 14)-1405(태종 5)
무학(無學), 계월헌(溪月軒)
성씨 박씨(朴氏)
출신지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
승탑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승탑비 양주 회암사 무학대사비



정의

고려 말-조선 초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자초(自超)는 1327년(충숙왕 14)에 태어났다. 성은 박씨(朴氏), 호는 무학(無學), 당호는 계월헌(溪月軒), 법명은 자초(自超)이다.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 출신이다. 아버지는 인일(仁一)이고 후에 숭정문화시랑(贈崇政門下侍郞)으로 추증되었다.[1]

자초는 충남 서산에서 태어났다는 기록도 있다. 연경재(硏經齋) 성해응(成海應)이 지은 『동국명산기(東國名山記)』에 그가 충남 서산 간월도(看月島)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나 『서산군읍지(瑞山郡邑誌)』 인물조에 무학신승(武學神僧)이 간월도(看月島)에 머물렀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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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계량이 삼가 그의 제자 조림(祖琳)이 지은 행장(行狀)을 상고하여 보니, 사(師)의 휘는 자초(自超)이며, 호(號)는 무학(無學)이고, 살던 곳은 계월헌(溪月軒)이라고 하였다. 세수는 79세이며, 법랍(法臘)은 61세이다. 속성(俗姓)은 박씨니 삼기군(三岐郡) 사람이다. 아버지의 휘는 인일(仁一)이며 증 숭정문하시랑(贈崇政門下侍郞)이고, 모(母)는 고성(固城) 채씨(蔡氏)이다. 채씨가 꿈에 아침해가 품속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임신하여 태정(泰定) 정묘년 9월 20일에 사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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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변계량, 「묘엄존자탑명(妙嚴尊者塔銘)」, 『동문선(東文選)』. 온라인 참조: "묘엄존자탑명묘엄존자탑명(妙嚴尊者塔銘)", 고전번역서, 『한국고전종합DB』online, 한국고전번역원.


출가수행

자초는 1344년(충혜왕 복위5) 나이 18세에 송광사 혜감국사의 수제자인 소지선사에게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았다. 그 뒤 용문산 혜명 법장국사를 찾아 교시를 받고 부도암이라는 암자 안에서 선정에 들었다. 그리고 20세가 되던 해인 1346년(충목왕 2)에 이르러서는 능엄경(楞嚴經)을 보고 홀연히 깨달았다. 그는 23세가 되던 1349년(충정왕 1) 가을에 진천 길상사에 머물렀고, 25세 되던 1352년(공민왕 1) 여름에 묘향산 금강암에서 정진하던 중 깨우침을 얻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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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18세가 되어서 벗어 버리듯 티끌세상 밖에 나가고자 하는 뜻이 있어서 혜감국사(慧鑑國師)의 상족제자(上足弟子 수제자)인 소지선사(小止禪師)에게 머리를 깎고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용문산(龍門山)에 이르러 혜명국사(慧明國師)와 법장국사(法藏國師)에게 법을 물으니, 법의 교시(敎示)를 마치고 곧 말하기를, “바른 길을 얻은 자가 너 아니고 누구겠느냐.” 하고, 드디어 부도암(浮圖菴)에 살게 하였다. 하루는 암자 안에서 화재가 일어났는데 사(師)가 홀로 나무 허수아비처럼 고요히 앉아 있으니, 여러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기었다. 병술년 가을에 《능엄경(楞嚴經)》을 보다가 깨달은 것이 있어 돌아가 그의 스승에게 고하니, 스승이 칭탄하였다. 이로부터 잠을 자지 않고 밥 먹는 것도 잊은 채 참선에만 전심하였다. 기축년 가을에 진주(鎭州)의 길상사(吉祥寺)에 이르러 살았으며, 임진년 여름에는 묘향산 금강굴(妙香山金剛窟)에 머무렀는데, 공부가 더욱 진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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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변계량, 「묘엄존자탑명(妙嚴尊者塔銘)」, 『동문선(東文選)』. 온라인 참조: "묘엄존자탑명묘엄존자탑명(妙嚴尊者塔銘)", 고전번역서, 『한국고전종합DB』online, 한국고전번역원.


구법유학

그가 26세 되던 1353년(공민왕 2) 가을에 입원(入元)하여 법원사(法源寺)에서 지공의 허락을 받고 다음해 1월 법천사(法泉寺)에서 혜근을 만났다. 1354년 1월 법천사(法泉寺)에 이르러 혜근을 참례하고 무령(霧嶺), 오대산을 유력하였다. 그후 서산영암사(西山靈嵒寺)에 이르러 다시 혜근을 조우하고 두어해 머물면서 혜근에서 사사받았다. 그리고 귀국시 연도(燕京) 광제선사(廣濟禪寺)에 머물고 있던 혜근을 찾아가 하직하고 귀국하였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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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사년 가을에 몸을 빼쳐 연경(燕京)으로 달려가 서천지공(西天指空)에게 참례하여 절하고 일어나 말하기를, “3천 8백 리에 친히 화상(和尙)의 면목을 뵈었습니다.” 하니, 지공이 말하기를, “고려(高麗) 사람을 모두 죽이겠구나.” 하였으니, 이는 허락한다는 뜻이다. 여러 사람들이 매우 놀랐다. 다음해인 갑오년 정월에 법천사(法泉寺)에 이르러서 나옹(懶翁)에게 참례하니 나옹이 한 번 보고 깊고 큰 그릇이라고 생각하였다. 무령(霧嶺)을 유람하고 오대산(五臺山)을 지나서 두 번째로 나옹을 서산영암사(西山靈嵒寺)에서 뵙고 두어 해를 머물렀다. 그가 선정(禪定)하고 있을 때에는 밥 먹을 때를 당하여도 알지 못하는 때가 있었으니, 옹이 보고 말하기를, “네가 죽었느냐.” 하니, 사(師)가 웃으며 대답하지 아니하였다. 옹(翁)이 하루는 사와 더불어 섬돌 위에 앉았다가 묻기를, “옛날 조주(趙州)가 수좌(首座)와 더불어 앉아서 돌다리를 보고 묻기를, ‘이것은 어떤 사람이 만들었느냐.’ 하니, 수좌가 답하기를, ‘이응(李膺)이 만들었습니다.’ 하였다.

(중략)

그렇건만 산천을 두루 유람하고 스승과 벗을 참방(參訪)할 뜻이 그치지 아니하였다. 강소(江蘇), 절강(浙江) 지방에 유람하려 하였으나, 그때 남쪽 지방에 변란이 있어서 길이 막혔으므로 중지하였다. 병신년 여름에 우리 나라에 돌아오고자 작별을 고하니, 옹이 손수 한 종이에 글을 써서 전송하여 말하기를, “그 일상생활을 보니 모든 기틀이 세상과 더불어 다른 데가 있다. 선악과 성사(聖邪)를 생각지 않고 인정과 의리에 순종하지 않는다. 말을 내고 기운을 토할 때에는 화살과 칼날이 서로 버티는 것 같고, 글귀의 뜻이 기틀에 맞음은 물이 물에 돌아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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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변계량, 「묘엄존자탑명(妙嚴尊者塔銘)」, 『동문선(東文選)』. 온라인 참조: "묘엄존자탑명묘엄존자탑명(妙嚴尊者塔銘)", 고전번역서, 『한국고전종합DB』online, 한국고전번역원.


활동

자초는 원나라에서 귀국한지 3년 후인 1359년 여름에 경남 천성산 원효암에 머물고 있던 혜근을 찾았으며 여기서 혜근에게 불자(拂子)를 받았다. 그가 혜근을 찾은 것은 지공으로부터 받은 수기(授記) 때문이었다고 추정된다. 그후 자초는 귀국 후 두번째로 신광사에 있던 혜근을 찾아가 1361년 10월부터 1363년 7월 동안 머물면서 혜근에게 사사받았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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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師)가 이미 돌아오니 나옹(懶翁) 또한 지공(指空)의 삼산양수수기(三山兩水授記)를 갖고 돌아와 천성산(天聖山) 원효암(元曉菴)에 머무르고 있었다. 기해년 여름에, 사가 가서 나옹을 뵈오니 불자(拂子)를 그에게 주었다. 옹이 신광사(神光寺)에 있으므로 사 또한 거기에 머물렀더니, 옹의 무리 중에 사를 꺼리는 자가 있었다. 사가 알고 떠나가니, 옹이 사에게 말하기를, “법통을 전하는 데 있어서 옷과 바리때[衣鉢]는 말과 글귀보다 못하다.” 하고, 시를 지어 사에게 주며 말하기를, “한가한 중들이 남이니 나니 교계하는 마음을 일으켜서, 망령되게 옳으니 그르니 하고 말들을 하니, 매우 옳지 않다. 산승(山僧)이 이 네 귀[四句]의 송(頌)으로써 길이 뒷날의 의심을 끊는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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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변계량, 「묘엄존자탑명(妙嚴尊者塔銘)」, 『동문선(東文選)』. 온라인 참조: "묘엄존자탑명묘엄존자탑명(妙嚴尊者塔銘)", 고전번역서, 『한국고전종합DB』online, 한국고전번역원.


자초는 신광사를 나와 고달산에서 도를 닦다가, 1371년 나옹왕사로 책봉되어 송광사에 머물렀던 때에 혜근에게 의발(衣鉢)을 전해받았다. 그리고 1376년 여름에 회암사 중창불사에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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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師)가 고달산(高達山) 탁암(卓菴)에 들어가 도를 닦고 있었는데, 신해년 겨울에 전조(前朝)의 공민왕이 나옹을 봉하여 왕사(王師)로 하고, 옹이 송광사(松廣寺)에 머무르면서 의발을 사에게 전하니 사가 게(偈)를 지어 사례하였다. 병진년 여름에 나옹이 회암사(檜巖寺)에 옮겨 가서 크게 낙성회를 개설하게 되었다. 급히 편지를 보내어 사를 불러다가 수좌(首坐)를 삼으니, 사가 극력 사양하였다. 옹이 말하기를, “많이 주관하는 것이 많이 사퇴하는 것만 같지 못한 것이지.” 하고, 제덕산(濟德山)에서는 수좌를 삼지 않고 와서 편실(便室)에 있게 하였다. 옹이 세상을 떠나니, 사가 여러 산으로 노닐면서 뜻을 감추고 남에게 알리고자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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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변계량, 「묘엄존자탑명(妙嚴尊者塔銘)」, 『동문선(東文選)』. 온라인 참조: "묘엄존자탑명묘엄존자탑명(妙嚴尊者塔銘)", 고전번역서, 『한국고전종합DB』online, 한국고전번역원.


1392년(태조 1), 태조는 그를 왕사로 책봉하고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전불심인 변지무애 부종수교 홍리보제 도대선사 묘엄존자(大曹溪宗師禪敎都摠攝傳佛心印辯智無碍扶宗樹敎弘利普濟都大禪師妙嚴尊者)’라는 호를 내렸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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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원정(柳爰廷)을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로 삼고, 박의중(朴宜中)을 예문춘추관 학사(藝文春秋館學士)로 삼고, 대성(臺省)의 낭관(郞官)을 모두 체천(遞遷) 하고, 중 자초(自超)를 봉하여 왕사(王師)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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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변계량, 「묘엄존자탑명(妙嚴尊者塔銘)」, 『동문선(東文選)』. 온라인 참조: "묘엄존자탑명묘엄존자탑명(妙嚴尊者塔銘)", 고전번역서, 『한국고전종합DB』online, 한국고전번역원.


태조는 개국 당시부터 새로운 수도를 정하기로 결정했다. 그 후보지로 선정된 곳은 계룡산과 무악(지금의 서울 서대문구 무악재), 한양 세 곳이었다. 1392년 8월에 태조는 한양으로 천도할 것으로 밝히고 삼사 우복야 이염(李恬)을 한양부에 보내어 궁실을 짓게 하였다. 그런데 이듬해 1월 태실증고사 권중화(權仲和)가 전라도 진동현(珍同縣)의 산수형세도(山水形勢圖)와 양광도 계룡산의 도읍지도를 올리자 태조는 계룡산의 지세를 직접 살펴보기로 하였다. 1393년 1월 신료들과 함께 신도(新都)의 후보지인 계룡산의 지세를 살펴보기 위해 태조는 영삼사사 안종원(安宗源), 우시중 김사형(金士衡), 참찬문하부사 이지란(李之蘭), 판중추원사 남은(南誾) 등과 함께 충청도로 향했다. 개성에서 충청도로 향하던 도중 태조회암사에 들러 자초도 함께 동행할 것을 청하였다. 태조는 풍수지리를 파악하는 무학의 안목을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었고, 신도 후보지를 순행할 때마다 무학의 자문을 구했음을 알 수 있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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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유년에 태조가 풍수를 살펴 수도를 세우고자 하여 사(師)에게 수가(隨駕)를 명하였다. 사가 사양하니 태조가 사에게 이르기를, “지금이나 예전이나 서로 만난다는 것은 인연이 있는 것이다. 세상 사람의 터잡는 것이 어찌 도사(道師)의 눈만하겠는가.” 하였다. 계룡산과 지금의 신도(新都)를 순행(巡幸)할 때, 사가 항상 호종(扈從)하였다. 그 해 9월에 사가 선사(先師) 지공(指空)ㆍ나옹(懶翁)의 두 탑(塔)의 명칭과 나옹의 진영(眞影)을 거는 일로써 왕지(王旨)를 받들어 회암사(檜巖寺)에 탑명(塔名)을 새기고, 광명사(廣明寺)에 괘진불사(掛眞佛事)를 크게 개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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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변계량, 「묘엄존자탑명(妙嚴尊者塔銘)」, 『동문선(東文選)』. 온라인 참조: "묘엄존자탑명묘엄존자탑명(妙嚴尊者塔銘)", 고전번역서, 『한국고전종합DB』online, 한국고전번역원.


입적

1403년(태종 5)에 무학은 모든 직을 내려놓고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이미 죽은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예감한 무학이 선승으로서 마지막 시간들을 보내기 위해 금강산으로 향한 것으로 보인다. 진불암에 머물던 무학은 1405년(태종 5)에 금장암으로 옮겨갔고 이곳에서 입적하였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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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유년 봄에 약간 병이 났으므로 모시는 자가 의약을 드리고자 하니, 사가 거절하며 말하기를, “80세에 병들었는데 약은 써서 무엇한단 말이냐.” 하였다. 여름 4월에 금장암(金藏菴)에 옮겨갔으니, 바로 그가 입적(入寂)한 곳이다. 8월에 의안대군(義安大君)이 사람을 시켜 편지를 보내왔었는데, 사(師)의 회답 편지에, “멀리 산중에 살고 있어서 만나 뵈올 기회가 없습니다. 어느 때 불회(佛會)에서 뵙고자 합니다.”라는 구절이 있었다. 그리고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멀지 않아 나는 갈 것이다.” 하였다. 얼마 뒤에 과연 사(師)의 병이 위독하였다. 중이 묻기를, “사대(四大)가 제각기 떠나서 어느 곳으로 갑니까.” 하니, 사(師)는 “모르겠다.” 하였다. 또 물으니, 사가 성난 목소리로, “모른다.” 하였다. 또 중이 묻기를, “화상(和尙)은 병든 가운데 도리어 병들지 않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까.” 하니, 사가 손으로 곁에 있는 중을 가리켰다. 또 묻기를, “육신이라는 것은 지ㆍ수ㆍ화ㆍ풍일 뿐이니, 어느 것이 진정한 법신(法身)입니까.” 하니, 사가 두 팔을 서로 버티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곧 하나이다.” 하였다. 대답을 마치고 고요히 세상을 떠나니, 한밤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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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변계량, 「묘엄존자탑명(妙嚴尊者塔銘)」, 『동문선(東文選)』. 온라인 참조: "묘엄존자탑명묘엄존자탑명(妙嚴尊者塔銘)", 고전번역서, 『한국고전종합DB』online, 한국고전번역원.


지식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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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자초 A는 B를 위한 승탑이다 1397년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양주 회암사 A는 B에 있다
양주 회암사 무학대사비 자초 A는 B를 위한 비이다 1828년
양주 회암사 무학대사비 양주 회암사 A는 B에 있다
혜근 양주 회암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혜근 해주 신광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혜근 순천 송광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1373년
지공 자초 A는 B의 스승이다
혜근 자초 A는 B의 스승이다
자초 조선 태조 A는 B와 관련있다
자초 풍수지리 A는 B와 관련있다
자초 왕사 A는 B와 관련있다
자초 능엄경 A는 B와 관련있다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1. 고익진, "자초",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황인규, 「무학자초의 생애와 활동에 대한 검토」, 『한국불교학』22, 한국불교학회, 1997, 189쪽.
  3. 황인규, 「무학자초의 생애와 활동에 대한 검토」, 『한국불교학』22, 한국불교학회, 1997, 190쪽.
  4. 황인규, 「무학자초의 생애와 활동에 대한 검토」, 『한국불교학』22, 한국불교학회, 1997, 191쪽
  5. 황인규, 「무학자초의 생애와 활동에 대한 검토」, 『한국불교학』22, 한국불교학회, 1997, 193쪽.
  6. 고익진, "자초",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7. 탁효정, 「여말선초 무학자초의 활동과 위상」, 『회암사지박물관 연구총서』4 - 회암사와 불교사, 양주회암사지박물관, 2016, 195-196쪽.
  8. 탁효정, 「여말선초 무학자초의 활동과 위상」, 『회암사지박물관 연구총서』4 - 회암사와 불교사, 양주회암사지박물관, 2016, 202쪽.

참고문헌

  • 고익진, "자초",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변계량, 「묘엄존자탑명(妙嚴尊者塔銘)」, 『동문선(東文選)』. 온라인 참조: "묘엄존자탑명묘엄존자탑명(妙嚴尊者塔銘)", 고전번역서, 『한국고전종합DB』online, 한국고전번역원.
  • 탁효정, 「여말선초 무학자초의 활동과 위상」, 『회암사지박물관 연구총서』4 - 회암사와 불교사, 양주회암사지박물관, 2016, 176-207쪽.
  • 황인규, 『無學自超 硏究』, 동국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7.
  • 황인규, 「仁王山寺와 無學大師」, 『한국선학』 22, 한국선학회, 2009, 239-272쪽.
  • 황인규, 「무학자초의 생애와 활동에 대한 검토」, 『한국불교학』22, 한국불교학회, 1997, 183-20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