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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정의'''==
신라 중고기의 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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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통감부시기 황실사진사로 활동하던 일본인 사진작가이다.
  
 
=='''내용'''==
 
=='''내용'''==
[[김유신|김유신(金庾信)]]의 아버지이며, [[금관가야]]의 시조인 [[김수로왕|수로왕]]의 11세손이다. 아버지는 신주군주(新州軍主)를 역임했던 [[김무력|김무력(金武力)]]이며, 아내는 입종갈문왕의 손녀인 [[만명부인|만명부인(萬明夫人)]]으로서 [[김유신]]을 낳았다. 딸인 문희(文姬)는 [[신라 태종무열왕|태종무열왕]]의 비가 되었다. <ref>이명식,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9404 김서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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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 사진관 개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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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타 카나에(岩田 鼎, 1870-?)는 후쿠이(福井)현 출신으로 1898년 12월 조선에 와서 일제강점기까지 사진관을 운영하였다. 처음에는 남산 왜성대의 생영관 사진기사로 근무하다가 1900년 무렵부터 독립적으로 사진관을 경영하였는데 러일전쟁기인 1904년 본정(지금의 충무로)으로 이전한 이후에는 사진관 광고를 내면서 보다 본격적으로 영업하였다.<ref>권행가, 「근대적 시각체제의 형성과정」, 『한국근현대미술사학』26,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2013, 217쪽.</ref>
  
처음에 만노군 태수(萬弩郡太守)가 되었다. [[신라 갈문왕|갈문왕(葛文王)]] 입종(立宗)의 손녀 만명(萬明)에게 반하여 동거하였는데 만명은 임신 20개월 만에 [[김유신|유신]]을 낳았다. 그 후 양주총관(良州摠管)으로 여러 번 백제와 싸워 국경을 침범치 못하게 하였고, 629년 소판대량주도독 안무대량주제군사(蘇判大粱州都督按撫大粱州諸軍事)가 되어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으며, 이때 [[김유신|유신]]도 중당당주(中幢幢主)로 종군하여 큰 공을 세웠다. <ref>인명사전편찬위원회, 『인명사전』, 민중서관, 2002.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878118&cid=43671&categoryId=43671 김서현]", 인명사전,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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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타가 경성 내의 사진사로서 입지를 확실하게 굳힌 것은 1907년 일본 황태자 방문 무렵이다. 1907년 말엽에 『[[경성신보|경성신보(京城新報)]]』에 “동궁전하어도한기념사진판(東宮殿下御渡韓紀念寫眞板) 콜로타입 사진첩”에 대한 예약 출판 광고를 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사진첩의 인쇄 출판을 이와타 사진관이 맡아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미 이와타 사진관은 경성 뿐 아니라 만주 안동현(安東縣)에까지 지점을 낼 정도로 사업이 확장되어 있었다. 1908년에는 경성의 사진관도 본정에서 다시 남대문통으로, 다시 1913년 이후 황금정(지금의 을지로)으로 이전하는 등 사업을 지속적으로 확장해갔던 것을 볼 수 있다. <ref>권행가, 「근대적 시각체제의 형성과정」, 『한국근현대미술사학』26,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2013, 217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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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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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4월 5일 [[조선 순종|순종]] 친경식(親耕式)기록한 사진첩(한미사진미술관 소장)과 함께 [[조선 순종|순종]], [[순정황후|순정효황후]] 공식초상사진과 [[조선 고종|고종태황제]]의 초상사진을 제작하였다. 이와타의 황실초상들은 스튜디오에서 정식으로 촬영되었다. [[조선 순종|순종황제]]의 초상사진은 공식적인 사진으로는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이와타가 언제 이 사진을 촬영했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1910년 6월 『[[대한매일신보]]』 에 태황제폐하와 황후폐하가 6월 18일 어사진을 한 벌씩 궁내부 일본인고등관에게 하사하셨다는 기록이 있고, 같은 장소에서 촬영한 황후의 사진이 같이 배포되었던 것으로 보아 촬영시기는 1910년 6월 이전으로 보인다.<ref>권행가, 「근대적 시각체제의 형성과정」, 『한국근현대미술사학』26,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2013, 217-218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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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순종|순종]] 붕어 이후인 1928년 조선왕실의 마지막 어진화사였던 [[김은호|김은호(金殷鎬, 1892-1979)]][[순종 어진(곤룡포본)|순종 어진]]다시 모사할 때도 거의 20년전의 사진이라 할 수 있는 이때의 [[조선 순종|순종황제]]의 [[순종 초상 사진|초상사진]]을 본으로 하였다.<ref>권행가, 「근대적 시각체제의 형성과정」, 『한국근현대미술사학』26,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2013, 219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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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의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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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순종|순종]]의 이 [[순종 초상 사진|초상사진]]은 도상 면에서도 일본 메이지천황의 것과 닮았을 뿐 아니라 그 배포방식에서도 일본의 예를 따랐다. 당시 [[이토 히로부미]]는 1907년 8월 [[조선 순종|순종]]의 즉위식에서 황룡포를 입은 [[조선 순종|순종]]이 다시 서양식 대원수복에 단발한 모습으로 나타나 일본에 의해 문명화될 [[대한제국]]을 보여주는 것처럼 만들었다. 이후 순종의 순행, 친경식을 비롯한 각종 행차가 조선의 전통과는 달리 이례적으로 많이 행해졌다. 말을 타고 서양식  머리와 옷차림을 한 순종황제를 한국의 국민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충군정신을 이끌어내어 당시의 정치적 불안과 저항을 타개하려는 이토의 정치적 전략이었다.<ref>권행가, 「근대적 시각체제의 형성과정」, 『한국근현대미술사학』26,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2013, 218-219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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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 및 예술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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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타 사진관은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의 초상사진 엽서를 인쇄해서 대중들에게 팔다가 치안방해죄로 걸렸다. 이 사건은 한국 내의 사진시장의 수요에 발 빠르게 대처했던 일본인 사진사들의 상업적 일면을 보여준다. 일제강점기로 들어가면서 이와타 역시 황실과 관련된 사진 활동보다는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에 사진을 출품하여 수상하고 1922년 [[조선사진협회]] 공모전 <예술사진전람회>의 심사위원으로 참여하는 등 예술사진경향을 이끄는 역할도 담당하면서 대표적인 재한일본인사진사로서의 지위를 굳혀갔다.<ref>권행가, 「근대적 시각체제의 형성과정」, 『한국근현대미술사학』26,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2013, 219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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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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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및 참조===
 
===인용 및 참조===
*이명식,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9404 김서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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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행가, 「근대적 시각체제의 형성과정」, 『한국근현대미술사학』26,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2013, 195-228쪽.
*인명사전편찬위원회, 『인명사전』, 민중서관, 2002.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878118&cid=43671&categoryId=43671 김서현]", 인명사전,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더 읽을 거리===
 
===더 읽을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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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행가,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74176 순종어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분류:역사인물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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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역사인물초상화 문맥 인물]]
 
[[분류:인물]]
 
[[분류:인물]]

2018년 1월 13일 (토) 22:49 기준 최신판

이와타 카나에(岩田 鼎)
대표명칭 이와타 카나에
한자표기 岩田 鼎
생몰년 1870-



정의

대한제국 통감부시기 황실사진사로 활동하던 일본인 사진작가이다.

내용

조선에서 사진관 개업

이와타 카나에(岩田 鼎, 1870-?)는 후쿠이(福井)현 출신으로 1898년 12월 조선에 와서 일제강점기까지 사진관을 운영하였다. 처음에는 남산 왜성대의 생영관 사진기사로 근무하다가 1900년 무렵부터 독립적으로 사진관을 경영하였는데 러일전쟁기인 1904년 본정(지금의 충무로)으로 이전한 이후에는 사진관 광고를 내면서 보다 본격적으로 영업하였다.[1]

이와타가 경성 내의 사진사로서 입지를 확실하게 굳힌 것은 1907년 일본 황태자 방문 무렵이다. 1907년 말엽에 『경성신보(京城新報)』에 “동궁전하어도한기념사진판(東宮殿下御渡韓紀念寫眞板) 콜로타입 사진첩”에 대한 예약 출판 광고를 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사진첩의 인쇄 출판을 이와타 사진관이 맡아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미 이와타 사진관은 경성 뿐 아니라 만주 안동현(安東縣)에까지 지점을 낼 정도로 사업이 확장되어 있었다. 1908년에는 경성의 사진관도 본정에서 다시 남대문통으로, 다시 1913년 이후 황금정(지금의 을지로)으로 이전하는 등 사업을 지속적으로 확장해갔던 것을 볼 수 있다. [2]

왕실 사진가

1909년 4월 5일 순종 친경식(親耕式)을 기록한 사진첩(한미사진미술관 소장)과 함께 순종, 순정효황후 공식초상사진과 고종태황제의 초상사진을 제작하였다. 이와타의 황실초상들은 스튜디오에서 정식으로 촬영되었다. 순종황제의 초상사진은 공식적인 사진으로는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이와타가 언제 이 사진을 촬영했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1910년 6월 『대한매일신보』 에 태황제폐하와 황후폐하가 6월 18일 어사진을 한 벌씩 궁내부 일본인고등관에게 하사하셨다는 기록이 있고, 같은 장소에서 촬영한 황후의 사진이 같이 배포되었던 것으로 보아 촬영시기는 1910년 6월 이전으로 보인다.[3] 순종 붕어 이후인 1928년 조선왕실의 마지막 어진화사였던 김은호(金殷鎬, 1892-1979)순종 어진을 다시 모사할 때도 거의 20년전의 사진이라 할 수 있는 이때의 순종황제초상사진을 본으로 하였다.[4]

이토 히로부미의 전략

순종의 이 초상사진은 도상 면에서도 일본 메이지천황의 것과 닮았을 뿐 아니라 그 배포방식에서도 일본의 예를 따랐다. 당시 이토 히로부미는 1907년 8월 순종의 즉위식에서 황룡포를 입은 순종이 다시 서양식 대원수복에 단발한 모습으로 나타나 일본에 의해 문명화될 대한제국을 보여주는 것처럼 만들었다. 이후 순종의 순행, 친경식을 비롯한 각종 행차가 조선의 전통과는 달리 이례적으로 많이 행해졌다. 말을 타고 서양식 머리와 옷차림을 한 순종황제를 한국의 국민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충군정신을 이끌어내어 당시의 정치적 불안과 저항을 타개하려는 이토의 정치적 전략이었다.[5]

상업 및 예술 작가

이와타 사진관은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의 초상사진 엽서를 인쇄해서 대중들에게 팔다가 치안방해죄로 걸렸다. 이 사건은 한국 내의 사진시장의 수요에 발 빠르게 대처했던 일본인 사진사들의 상업적 일면을 보여준다. 일제강점기로 들어가면서 이와타 역시 황실과 관련된 사진 활동보다는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에 사진을 출품하여 수상하고 1922년 조선사진협회 공모전 <예술사진전람회>의 심사위원으로 참여하는 등 예술사진경향을 이끄는 역할도 담당하면서 대표적인 재한일본인사진사로서의 지위를 굳혀갔다.[6]

지식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순종 어진(곤룡포본) 순종 초상 사진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순종 초상 사진 이와타 카나에 A는 B가 촬영하였다 A dcterms:creator B
조선 순종 순종 초상 사진 A는 B에 나타난다 A ekc:isShownOn B
순종 초상 사진 국립고궁박물관 A는 B에 소장되어 있다 A edm:currentLocation B
순종 초상 사진 순종 어진(육군대장복본)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순종 어진(곤룡포본) 김은호 A는 B가 그렸다 A dcterms:creator B
이와타 카나에 안중근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이와타 카나에 순정효황후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이와타 카나에 조선 고종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주석

  1. 권행가, 「근대적 시각체제의 형성과정」, 『한국근현대미술사학』26,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2013, 217쪽.
  2. 권행가, 「근대적 시각체제의 형성과정」, 『한국근현대미술사학』26,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2013, 217쪽.
  3. 권행가, 「근대적 시각체제의 형성과정」, 『한국근현대미술사학』26,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2013, 217-218쪽.
  4. 권행가, 「근대적 시각체제의 형성과정」, 『한국근현대미술사학』26,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2013, 219쪽.
  5. 권행가, 「근대적 시각체제의 형성과정」, 『한국근현대미술사학』26,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2013, 218-219쪽.
  6. 권행가, 「근대적 시각체제의 형성과정」, 『한국근현대미술사학』26,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2013, 219쪽.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권행가, 「근대적 시각체제의 형성과정」, 『한국근현대미술사학』26,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2013, 195-228쪽.

더 읽을 거리

  • 권행가, "순종어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