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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4월 27일 (목) 16:30 판


의천(義天)()
파일:Seonamsa uicheon.jpg
순천 선암사 대각국사 의천 진영 (順天 仙巖寺 大覺國師 義天 眞影)[1]
대표명칭 의천(義天)
영문명칭 Uicheon
생몰년 1055년(문종 9)-1101년(숙종 6)
시호 대각국사(大覺國師)
우세(祐世)
후(煦)
법호 석후(釋煦), 의천(義天)
의천(義天)
성씨 왕씨(王氏)
속명 왕후(王煦)
출신지 경기도 개성
승탑 순천 선암사 대각암 승탑
승탑비 칠곡 선봉사 대각국사탑비, 영통사대각국사비




정의

고려시대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의천은 1055년 고려 왕실의 왕자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고려 제11대 왕인 문종(文宗)이며, 어머니는 인예왕후(仁睿王后) 이씨(李氏)로, 의천은 넷째 아들이다. 순종(順宗), 선종(宣宗), 숙종(肅宗)은 모두 의천의 친형이며, 헌종(獻宗)은 의천의 숙부이다.

Quote-left.png 국사는 우리 태조대왕의 4세손이며, 또한 문종 임금의 넷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인예태후(仁睿太后) 이씨니, 어느 날 밤 꿈에 용이 품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임신하였다. 그리하여 을미년((1055년) 9월 28일에 이르러 궁중에서 탄생하였다. 그 때 향기가 궁 안에 가득하여 오랫동안 사라지지 아니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영통사대각국사비


Quote-left.png 국사는 문조(文祖)의 넷째 왕자로서 어머니는 인예태후(仁睿太后)이다. 휘는 석후(釋煦)요, 자는 의천(義天)이다. 이성(二聖)이 국사와 더불어 숙세(夙世)로부터 숙연(夙緣)을 심어 묘하게 부(父) 모(母) 자(子)의 인연(因緣)이 일시에 계합하였다. 국사는 날 때부터 특이함이 있었으며, 점점 장성하면서 예능을 행함이 마치 성인(成人)과 같았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선봉사대각국사비


출가수행

의천은 1065년 5월 11세의 나이로 영통사(靈通寺)에서 화엄종(華嚴宗) 승려인 경덕국사 난원(景德國師 爛圓)에게 출가하였으며, 같은해 10월 불일사(佛日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1066년 난원이 입적하자 의천은 법형제인 창원(昶元), 이기(理琦) 등의 승려들의 지도를 받았다.[2]

Quote-left.png 어느 날 문종 임금께서 모든 왕자를 불러 놓고, “누가 능히 스님이 되어 복전(福田)으로 국조(國祚)와 국민의 이익을 위하겠는가”라고 말씀하셨다. 이 때 국사께서 일어나 여쭙기를, “신이 출가 수도할 뜻을 가지고 있으니 오직 원하옵건대 허락하여 주십시오” 라고 하였다.임금이 말하되, “좋다” 고 윤허하였다. 어머니인 인예태후가 이 말을 듣고 태몽과 부합한다고 생각하나, 학업을 마친 다음 부왕의 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떨까 하였으나,어찌할 수 없었다. 을사년 5월14일 경덕국사(景德國師)를 내전으로 초정하여 은사가 되어 삭발 수계(受戒)토록 하였다. 이 때 문종이 재배하고 경덕국사를 따라 궁중에서 영통사에 있게 하였다. 그 해 10월 불일사(佛日寺) 계단(戒壇)에 가서 구족(具足)을 받았으니 당시 나이 11살이었다. 비록 어린 나이지만 학문을 쉬지 아니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영통사대각국사비


Quote-left.png 11세 때 문종(文宗)의 숙지(宿志)를 받들어 경덕국사(景德國師) 난원(爛圓)을 은사(恩師)로 하여 삭발염의(削髮染衣)하고 사미계를 받았다. 그로부터 현수교관(賢首敎觀)인 『화엄경』을 수학(受學)하다가 경덕국사가 입적(入寂)한 후에도 그 도제(徒弟)와 더불어 강학(講學)을 중지(中止)하지 않았다. 또 널리 모든 종파를 회통(會通)하니 학자들이 함께 모여 강론(講論)함에 있어 무릇 얻은 바가 초월하고 비범하여 마치 노사(老師) 또는 구참(久叅)과 같이 여러 종파와 다방면에 걸쳐 정통(精通)하지 않음이 없었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선봉사대각국사비


또한 의천은 문종으로부터 우세(祐世)라는 호와 승통(僧統)의 직위를 하사받았다.[3]

Quote-left.png 정미년 7월(1067년) 을유에 문종이 교서를 내려 포창하고 우세 승통(祐世僧統)이란 승직(僧職)을 하사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영통사대각국사비


Quote-left.png 문조 23년(1069년)에 우세라는 호를 하사하고 승통직을 내렸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선봉사 대각국사 비문


구법유학

의천은 1085년 4월부터 1086년 6월까지 약 14개월 동안 중국 송나라로 유학하여 구법활동을 하였다.

귀국 및 활동

의천은 1086년 6월 귀국하여 흥왕사(興王寺)의 주지가 되었다. 1087년에는 송나라의 정원(淨源)에게 세 가지 종류의 <화엄경(華嚴經)> 한역본 180권과 이 경전을 보관할 장경각 건립비를 보냈다. 이에 정원은 혜인사(慧因寺)에 '화엄각(華嚴閣)'이라는 이름의 장경각을 지어 경전을 보관했으며, 이 때부터 혜인사는 고려사(高麗寺)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였다.[4]

또한 의천은 1090년에 경(經)ㆍ율(律)ㆍ논(論)의 삼장(三藏)에 관한 주석서인 장소(章疏)를 수집하여 그것들의 목록인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을 편찬하였고, 1091년에 흥왕사교장도감을 설치하여,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에 따라 본격적으로 교장(敎藏)을 간행하였다. [5]

이후 의천은 1094년에 홍원사(洪圓寺)로 옮겼으며, 같은 해 5월에는 갑자기 해인사로 퇴거하여 다시는 나오지 않겠다는 뜻을 표했다. 그러나 1095년 숙종이 즉위하자 그의 간청으로 다시 흥왕사로 되돌아왔다.[6]

Quote-left.png 갑술년 2월 초에 홍원사(洪圓寺)로 옮겼으나, 그의 교학진작은 옛과 같았다. 흥왕사에 주석하던 초기에 맏형인 순종이 병세가 위독하여지므로 국사를 불러 이르기를, “과인이 일찍부터 대가람을 창건하여 사액을 홍원사로 하기를 발원하였으나, 지금 나의 병세가 위독하여 이를 성취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되니, 만약 내가 죽고 차자인 운(運 : 宣宗) 이 왕위를 계승하거든 나의 소원을 잊지 말고 승통도 동심협력(同心協力)하여 이 불사를 회향(回向)하도록 하라” 고 하였다. 순종으로부터 당부를 받은 국사는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감히 심력(心力)을 다하고 죽는 한이 있어도 변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다짐하였다. 그 후 홍원사가 낙성됨에 국사를 주지로 임명하였다. 40세 때인 1094년 5월 복잡한 개경(開京)을 벗어나 해인사로 퇴거하여 계산(溪山)과 더불어 자적하였다. 호연한 기백으로 지내면서 여기서 이 세상을 마치려는 ‘종언지지(終焉之志)’를 가졌다. 조카인 헌종(獻宗)이 두 차례에 걸쳐 개성으로 되돌아오도록 청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을해년 10월 8일 셋째 형인 숙종(肅宗)이 즉위해서도 수차례에 걸쳐 친서를 보내 개경으로 돌아오도록 하였으나 굳게 사양하였다. 그러나 또 교서를 보내 이르기를, “스님께서 왕도(王都)로 돌아오시기를 바라는 불곡(不穀)의 마음은 날이 갈수록 더욱 간절합니다. 오직 고산(高山)의 경행(景行)과 오매(寤寐)의 증상(增想)일 뿐 아니라 겹합(鵊鴿) 재원(在原)과 같이 의리를 존중하는 것이지 다른데 뜻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과인(寡人)이 직접 가서 뵙지는 못하고 여러 번 성청(誠請)하여 고적(高跡)에 불의(拂衣)하였으나 일찍부터 과인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옛 성인들은 비이비혜(非夷非惠)하고 시속(時俗)과 더불어 권서(卷舒)가 무애(無礙)하였으니, 바라건대 한 번 와서 나의 뜻에 부합(副合)하도록 하여 주십시오” 라는 내용이었다. 국사는 이 교서를 보고 번연히 이르기를, “정중한 예를 갖추어 후사(厚辭)함에는 그 의리(義理)를 거역할 수 없다” 하고, 곧 바로 개경으로 돌아가서 다시 흥왕사에 주석하면서 교학 진흥(敎學振興)은 여전히 계속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영통사대각국사비


숙종에게 화폐 사용을 건의하여 1097년 해동통보(海東通寶)가 제조되어 사용되기도 하였다.


1097년 국청사(國淸寺)가 완공되자 의천은 초대 주지가 되어 천태학을 강의하는 데 몰두하였다.

Quote-left.png 정축년 5월 국청사(國淸寺)주지에 취임하여 최초로 천태교학(天台敎學)을 강설하였으나, 이 종파가 과거에 이미 우리나라에 전래되었지만 중간에 폐멸(廢滅)되었다. 그리하여 국사께서 스스로 전당(錢塘) 에 가서 도(道)를 문학하고 천태불롱(天台佛隴)에서 천태종지를 전래하여 중흥하기로 서원(誓願)을 세운 이후로는 하루도 이 서원을 마음에 잊은 적이 없다. 인예태후가 이 소식을 듣고 마음에 기꺼워하여 이 절을 경영하기 시작하였고, 숙종이 즉위하여 이 창건 불사(佛事)를 계속하여 낙성하였다. 국사는 이 때에 천태교문(天台敎文)에 의하여 교리를 나타내며, 그 교리를 연구하여 모두 깨닫게 하였다. 그러므로 삼지(三止)와 삼관(三觀)이 원명(圓明)하고 언어와 묵언(黙言)이 자재하여 경서만 믿고 고수하려는 집유(執有)의 생각을 발진(拔盡)하고 악견(惡見)으로 공(空)을 취하는 집착을 파(破)하는 중도(中道)를 제시하였다. 그리하여 일시에 학자(學者)가 국사의 성애(聖涯)를 첨앙하여 옛 것을 버리고 스스로 천태종(天台宗)으로 찾아오는 스님이 1,000명이나 되었다. 왕성한 지라! 세상에서 천태종을 논하는 자들이 국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백세에 불천(不遷)하는 종지(宗旨)라 하였으니 어찌 신행(信行)하지 않겠는가” 라 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영통사대각국사비


Quote-left.png 태후(太后)께서 예전에 세웠던 대원(大願)을 다시 발하여 가감(伽監)을 창건하여 국청사(國淸寺)라 이름하고 불교를 크게 선양(宣揚)하여 진행(進行)하다가, 대원(大願)이 이루지지 못하고 1083년에 선가(僊駕)께서 상천(上天)하고 숙조(肅祖)가 왕위를 계승하고 건축불사를 계속하여 공사가 끝난 다음, 국사를 청하여 주지(住持)를 겸임하게 하였다.

국청사의 낙성법회(落成法會)에 법가(法駕)께서 친히 행림(幸臨)하시고, 천태일종(天台一宗)의 학자와 모든 종파의 석덕(碩德)들이 무려 수천명이 국사의 도풍(道風)을 들으려고 모여왔다. 국사께서 법좌(法座)에 올라앉아 해조음(海潮音)을 떨쳐 미증유법(未曾有法)인 일종묘의(一宗妙義)를 연설하시니, 무상근기(無上根機)는 다분히 중도(中道)와 무생법인(無生法忍)을 터득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선봉사대각국사비


또한 1101년에 의천은 봉은사(奉恩寺)에서 천태종의 승려 선발시험인 승선(僧選)을 처음으로 실시하였다. 이로써 고려 초부터 있던 조계종·화엄종·유가종의 3대 종파에 천태종이 더해짐으로써 4대 종파가 되었다.[7]

Quote-left.png 건통(乾統) 원년(元年) 신사(辛巳)에 대각국사가 비로소 천태의 굉강(宏綱)을 거양(擧揚)하면서, 우수한 학자 일백명을 뽑아 봉은사(奉恩寺)에 있게 하고, 천태종의 경론(經論) 일백이십권으로써 고시(考試)를 보아 현량(賢良) 사십여인(四十餘人)을 선발하였으니, 선국(先國)의 초기에 대행(大行)하였던 조계(曹溪)·화엄(華嚴)·유가(瑜伽)·궤범(軌範)등으로 더불어 같았으므로, 세상에서 이를 일러 사대업(四大業)이라 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선봉사대각국사비


입적

의천은 1101년(숙종 6년)에 개성의 총지사(摠持寺)에서 병으로 47세의 나이로 입적(入寂)하였다.

Quote-left.png 8월에 이르러 병을 만나 궤상(几床)에 편안히 기대고 앉아 관심(觀心)을 하다가 때로는 지경(持經)도 하여 피로하다고 하여 스스로를 중지하지 않았다. 문인들이 불사(佛事)를 하겠다고 요청하면 말하되, “부처님을 섬긴지 이미 오래 되었다” 라고 하였다. 임금께서 중사(中使)를 시켜 법체(法體)의 안후(安候)를 문안하고 명의(名醫)와 처방을 보내어 보의(寶衣)의 이름을 널리 알리고 모든 사찰로 하여금 국사의 건강회복을 위한 기도를 하게 하고 왕이 직접 찾아와서 위문하여 이르되, “불가휘(不可諱)의 일이 있을까 두려우니 원컨대 하고자 하는 바에 대하여 말씀해 달라” 고 하였다. 국사가 이르기를, “나의 소원은 정도(正道)를 중흥하는 것이나 병이 나의 뜻을 뺏어 갔으니 엎드려 바라는 바는 왕께서는 지성으로 불교를 외호하여 여래의 유교에 부합하면, 이는 죽어도 썩지 않는 불멸의 공덕이라” 하고, 10월 5일 임진에 우협으로 누워 입적하시니 세수는 47이요, 승랍은 36세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영통사대각국사비



죽은 뒤에 ‘대각국사(大覺國師)’의 시호를 받았으며, 개성 영통사(靈通寺)에 묘탑이 세워졌다.

Quote-left.png 임금께서 부음을 듣고 통곡하시고,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부의를 보내게 하는 한편, 국사를 책봉하고 시호를 대각이라 추증하고는, 16일 계묘에 다비(茶毘)하여 유골을 수습하고, 11월 4일 신유에 오관산 영통사의 진방(震方)에 안적(安庴)하였으니, 이는 본교(本敎)의 제도를 따른 것이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영통사대각국사비


Quote-left.png 국사가 입적(入寂)함에 책서(冊書)를 보내 국사(國師)로 봉하고 시호를 대각(大覺)으로 추증하였다. 이 보다 앞서 이미 숙종이 대각이란 이자(二字)로써 국사의 호를 삼으려 하였으나, 국사가 간절히 사양하기를, “대각은 부처님의 덕칭(德稱)이어늘, 어찌 감히 외람되게 의거(依據)할 수 있겠습니까”라면서 끝내 받아들이지 아니했었다. 이 때에 이르러 유사(有司)로 하여금 국사의 시호(謚號)를 논의케 하였으나, 역시 대각이란 이 이자(二字)를 벗어나지 못하였으니, 옛날 영공(靈公)이 죽어서 사구(沙丘)에 묻으려고 땅을 파던 중 석곽(石槨)이 나타났는데, 다음과 같은 명(銘)이 새겨져 있었다. “영공이 탈취(奪取)하여 묻힐 것이다”라 하였으니, 대저 영공이 다시 영공이 된 것이 이미 오래라고 하였다. 이런 사실로써 관찰하여 보건데, 이제 국사가 또한 대각이 된 것이 이미 오래라고 하겠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선봉사대각국사비


시각자료

갤러리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칠곡 선봉사 대각국사비 의천 A는 B를 위한 비이다
영통사 대각국사비 의천 A는 B를 위한 비이다
순천 선암사 대각암 승탑 의천 A는 B를 위한 승탑이다
칠곡 선봉사 대각국사비 칠곡 선봉사 A는 B에 있다
순천 선암사 대각암 승탑 순천 선암사 A는 B에 있다
영통사 대각국사비 개성 영통사 A는 B에 있다
의천 순천 선암사 A는 B를 중창하였다
의천 개성 영통사 A는 B에서 출가하였다
난원 개성 영통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난원 의천 A는 B의 스승이다
의천 문종 A는 B의 아들이다
의천 개성 흥왕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교장도감 개성 흥왕사 A는 B에 설치되었다
의천 교장(속장경) A는 B를 편찬하였다
교장(속장경) 교장도감 A는 B와 관련있다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055년 의천 출생
1065년 5월 의천 출가. 경덕국사 사법승.
1065년 10월 불일사에서 구족계 받음.
1067년? 1069년? 의천은 문종으로부터 우세라는 호와 승통의 직위를 하사받음.
1085년 의천 송나라 유학
1086년 의천 송나라 유학을 마치고 귀국. 흥왕사의 주지가 됨.
1190년 의천은 신편제종교장총록을 저술함.
1091년 의천흥왕사교장도감 설치을 설치함.
1094년 2월 홍원사의 주지가 됨.
1094년 5월 해인사에 안거함
1095년 흥왕사로 돌아옴
1097년 국청사의 최초의 주지가 됨
1101년 천태종의 승려 선발시험인 승선을 실시함
1101년 10월 의천 입적
1137년 칠곡 선봉사 대각국사탑비 건립

참고문헌

각주

  1. "순천 선암사 대각국사 의천 진영",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문화재청. 최종확인: 2017년 4월 26일.
  2. 허흥식, 의천의 사상과 시련, 329쪽.
  3. 비문에 따라 의천이 문종으로부터 호와 직위를 하사받은 시기에 대해 각각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선봉사비에는 1069년. 영통사비에는 1067년.
  4. [네이버 지식백과] 의천 [義天] (두산백과)
  5. 민백, 교장
  6. 장휘옥, 의천의 천태장 개창 재고, 222쪽.
  7. 장휘옥, 의천의 천태종 개창 재고, 224쪽.
  8. 사진출처: 평화문제연구소, 『조선향토대백과』, 2008. 온라인 참조: "영통사대각국사비", 조선향토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최종확인: 2017년 4월 26일.
  9. 사진출처: "대각국사 묘지석", 『주요 소장품 검색』online, 국립중앙박물관. 최종확인: 2017년 4월 26일.
  10. 사진출처: "선암사 소장 가사·탁의",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문화재청. 최종확인: 2017년 4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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