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

Encyves Wiki
AKS김지선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6년 12월 27일 (화) 12:25 판 (지도와 지리지)

이동: 둘러보기, 검색

틀:인물정보 김지선

개요

유정(惟政)은 조선 중기의 고승, 승장(僧將)이다. 속성은 임(任), 속명은 응규(應奎), 자는 이환(離幻), 호는 송운(松雲), 당호는 사명당(泗溟堂), 별호는 종봉(鍾峯), 본관은 풍천이며, 시호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이다. 법명인 유정보다 당호인 사명당(泗溟堂)으로 더 유명하고, 존경의 뜻을 담아 사명대사(泗溟大師)라고도 부른다.
승려의 몸으로 국가의 위기에 몸소 뛰쳐나와 의승(義僧)을 이끌고 전공을 세웠으며 전후의 대일 강화조약 등 눈부신 활약은 후세 국민이 민족의식을 발현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생애

경상남도 밀양에서 임수성(任守成)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 부모를 여읜 사명당은 13세에 황여헌(黃汝獻)에게 사사(師事)하다가 황악산 직지사에 들어가 신묵화상(信默和尙)에게 선(禪)을 받아 승려가 되었고, 거기에서 불교의 오의(奧義)를 깨달았다. 1561년(명종 16) 선과(禪科)에 급제하고 당시의 학자·대부·시인들이었던 사암(思菴) 박순(朴淳)·하곡(荷谷) 허봉(許篈)·백호(白湖) 임제(林悌) 등과 교제하였다.

1575년(선조 8년) 선종(禪宗)의 주지로 추대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에 들어가 휴정(서산대사)에게서 성종(成宗)을 강의 받고 크게 각성하였다.[3] 금강산 보덕사(報德寺)에서 3년을 지내고, 다시 팔공산·청량산·태백산 등을 유람했으며, 43세 때 옥천산(沃川山) 상동암(上東菴)에서 하룻밤 소나기에 뜰에 떨어진 꽃을 보고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고 문도들을 해산시킨 다음 오랫동안 참선하였으며, 46세에 오대산 영감란야(靈鑑蘭若)에 있다가 역옥에 죄 없이 걸렸으나 무죄 석방되어 금강산에서 3년 동안 지냈다.

임진왜란 이전

경상남도 밀양에서 임수성(任守成)의 아들로 태어났다. 사명당은 7세를 전후하여 『사략』을 배웠고, 13세에 황여헌(黃汝獻)을 사사(師事)하다가 1558년(명종 13) 어머니가 죽고, 1559년 아버지가 죽자 김천 황악산 직지사(直指寺)로 출가하여 들어가 직지사(直指寺)로 출가하여 신묵(信默)의 제자가 되었다. 3년 뒤 승과(僧科)에 합격하자, 박순(朴淳),임제(林悌) 등의 유생들과 사귀었으며, 재상인 노수신(盧守愼)으로부터 『노자』, 『장자』, 『문자』, 『열자』와 시를 배웠다.
그 뒤 직지사의 주지를 지냈으며, 1575년(선조 8) 선종이 선종수사찰(禪宗首寺刹)인 봉은사(奉恩寺)의 주지로 천거하였으나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普賢寺)의 휴정(休靜)을 찾아가서 도를 닦았다.
1578년부터 팔공산·금강산·청량산·태백산 등을 다니면서 선을 닦아, 1586년(선조 19) 옥천산(沃川山) 상동암(上東庵)에서 하룻밤 소나기에 뜰에 떨어진 꽃을 보고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고 문도들을 해산시킨 다음 오랫동안 참선하였다.
1589년 그의 나이 43세 때 정여립 모반사건에 연류되었다는 모함을 받았으나, 강릉의 유생들이 무죄를 항소하여 석방되어 금강산에서 3년 동안 지냈다.

임진왜란

1592년 임진왜란 때, 유점사(楡岾寺) 인근 아홉 고을의 백성들을 구출하였다. 이 때 조정의 근왕문(勤王文)과 스승 휴정의 격문을 받고 의승병을 모아 순안으로 가서 휴정과 합류하였다. 그곳에서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이 되어 승병 2,000명을 이끌고 평양성과 중화(中和) 사이의 길을 차단하여 평양성 탈환의 전초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 뒤 전후 네 차례에 걸쳐 대표로 나아가 적진에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회담을 가졌다. 제1차 회담(1594년 4월 13∼16일)·제2차 회담(1594년 7월 12∼16일)·제3차 회담(1594년 12월 23일)·제4차 회담(1597년 3월 18일)에서, 강화5조약으로 제시된 ‘천자와 결혼할 것, 조선 4도를 일본에 할양할 것, 전과 같이 교린 할 것, 왕자 1명을 일본에 영주하게 할 것, 조선의 대신·대관을 일본에 볼모로 보낼 것’ 등을 하나하나 논리적인 담판으로 물리쳤다.
제2차 회담 후, 선조에게 회담의 전말과 적의 동정 및 대처 방안을 내용으로 하는 「토적보민사소(討賊保民事疏)」를 올렸는데, 국민을 총동원하여 빈틈없는 작전을 세울 것, 적과 교린(交隣)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농업을 장려하는 동시에 민력(民力)을 무장할 것, 군수 무기를 준비할 것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또한, 1595년에 올린 을미상소의 주요 내용은, 탐관오리들을 소탕할 것, 국세 회복을 위해 방어책을 세울 것, 인물 본위로 등용할 것, 군정(軍政)과 중농정책을 확립할 것, 산성을 수축하고 군량·마초·방어무기를 준비할 것, 승려도 국가 수비의 일익을 담당하게 할 것 등이다.
그가 수축한 산성은 팔공산성(八公山城)·금오산성(金烏山城)·용기산성(龍起山城)·악견산성(岳堅山城)·이숭산성(李崇山城, 또는 美崇山城)·부산성(釜山城) 및 남한산성 등이다. 군기 제조에도 힘을 기울여 활촉 등의 무기를 만들었고, 투항한 왜군 조총병을 비변사에 인도하여 화약 제조법과 조총 사용법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또한, 1594년 의령에 주둔하였을 때 군량을 모으기 위하여 각 사찰의 전답에 봄보리를 심도록 하였고, 산성 주위를 개간하여 정유재란이 끝날 때까지 군량미 4,000여 석을 비장하였다. 선조는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의 벼슬을 내렸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명나라 장수 마귀를 따라 울산왜성에 쳐들어갔으며, 이듬해 명나라 장수 유정을 따라 순천왜성에 이르러 공을 세워 가선동지중추부사(架善同知中樞府事)에 올랐다.

임진왜란 이후

1604년(선조 37) 휴정의 부음을 받고 가던 중, 선조의 명으로 국서를 받들고 일본에 가서 교토 후시미 성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 강화를 맺고 포로가 되어 갔던 사람 3천 5백 명을 데리고 이듬해 돌아와 가의(嘉義)의 직위와 어마(御馬) 등을 하사받았다. 같은 해 10월에 묘향산에 들어가서 스승 휴정의 영탑에 애하고 치악산으로 들어갔다.
선조의 부보를 듣고 한양으로 달려와 배곡한 후 광해군의 서변을 지키게 하려 하였으나 병을 얻어 응하지 못했다. 그는 해인사에서 요양하다가 1610년 8월 26일 설법하고 결가부좌한 채 입적하였다.


활동사항

김정호는 국토정보를 효율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지도와 지리지를 동시에 이용해야 한다는 점을 「청구도 범례(靑邱圖凡例)」등 여러 곳에서 언급하였다. 또한 그는 지도의 제작과 지리지의 편찬에서 정확성에도 초점을 맞추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 것은 이용의 편리에 대한 고민이다. 이와 같은 두 가지 관점에서 김정호의 업적을 시대별로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1834년(순조 34) 이전부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 시문(詩文)·인물 등을 제외한 내용을 큰 글씨로 적고 다른 자료를 참고하여 여백이나 첨지에 깨알 같은 글씨로 교정·첨가한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동여편고(東輿便攷)』 2책(1책 결본)을 편찬하였다. 1834년(순조 34)에는 『청구도』 2책을 편찬하였고, 이어 1840년(헌종 6)대 후반까지 3차에 걸쳐 개정판 『청구도』를 제작하였다. 기본 정보의 차원에서 『청구도』『해동여지도』의 내용을 그대로 따랐지만 이용의 편리라는 측면에서 혁신적인 변화를 가했다.

김정호는 1834년(순조 34) 경부터 영남대학교 도서관 소장 『동여도지』의 편찬을 시작하여 1844년(헌종 10)경에 완성하며, 이후 지속적인 교정과 첨가를 하다가 1861년(철종 12)에 서문을 작성하여 수록한다. 이어 1850년(철종 1) 전후로 대축척 고을지도와 지지가 결합된 지리지인 대영도서관 소장 『동여도지』 3책(경기·강원·황해)을 편찬하기 시작하였지만 완성을 보지 못하고 포기한다.

이 때부터 김정호는 지도와 지지가 결합된 『청구도』의 형식을 포기하고 순수하게 지도적 속성이 강한 지도첩의 제작을 시작하였다. 표지에는 『동여(東輿)』라고 기록되어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필사본의 『대동여지도』 14첩이 그러한 노력의 첫 번째 결실이다. 이 지도첩에서 김정호는 『청구도』에 첨가된 통계와 지지 정보를 대폭 삭제하고 기호의 사용을 정교화 하였다.

대신 1853년(철종 4)에서 1856년(철종 7) 사이에 대축척 고을지도를 생략한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여도비지(輿圖備志)』 20책을 최성환(崔瑆煥)과 함께 편찬하였고, 비슷한 시기에 기본 정보가 『청구도』와 상당히 달라진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필사본의 『대동여지도』 18첩을 제작하였다. 이어 1856년(철종 7)에서 1859년(철종 10) 사이에는 기본 내용을 완전히 개정한 필사본의 『동여도』 23첩을, 1861년(철종 12)에 목판본의 『대동여지도』 22첩을 제작하였다. 또한 1864년(고종 1)에 목판본의 『대동여지도』 22첩을 교정하여 재간하였으며, 1861년(철종 12)부터 1866년(고종 3)경까지 『대동지지』 32권 15책을 편찬하다 미완으로 남기고 사망하였다.

김정호는 이외에도 보급용의 중형 낱장본 지도로 1834년(순조 34)에 최한기의 부탁을 받고 판각한 서양식 세계지도인 『지구전후도(地球前後圖)』, 1840년(헌종 6)대에는 한양 지도인 목판본의 『수선전도(首善全圖)』, 전통식과 서양식이 결합된 세계지도인 『여지전도(輿地全圖)』, 1860년(철종 11)대에는 목판본의 『대동여지도』 22첩이 너무 커서 한눈에 조선 전체를 보기 어려운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제작한 목판본의 『대동여지전도(大東輿地全圖)』를 제작하였다.

김정호의 사상

김정호는 자신에 대한 글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그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글은 《지도유설》과 《동여도지》 서문인데, 둘 다 김정호가 쓴 글이다. 다만 《지도유설》은 김정호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생각을 듣고 정리하여 쓴 글이며, 《동여도지》만 김정호의 사상을 나타낸 글이다. 《동여도지》에 나타난 김정호의 사상이나 역사지리 인식은 다음과 같다.

김정호는 지도(地圖)와 지지(地誌)가 서로 불가분의 관계라고 인식하였다. 지도로써 천하의 형세를 살필 수 있고 지지로써 역대의 제도와 문물을 헤아려 볼 수 있으므로 지도와 지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위국(爲國) 곧 치국(治國)의 대경(大經)이라고 지도와 지지의 관계를 강조하였다.

지도와 지지가 위와 같이 중요함에도 단기(檀箕; 단군기자) 이래로 지도가 없고 지지는 《삼국사기》에 이르러 비로소 만들어졌기 때문에 지지의 첫머리에 신라 이전의 사항을 두어 알게 하였다. 조선에 들어서는 초기에 《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되어 비로소 도적(圖籍)이 환연해졌지만, 김정호가 사는 때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편찬된 지 3백여 년이 지나 지리 정보에 차이가 많아졌으므로 이를 바로잡으려고 《동여도지》를 만들었다. 이에 따라 편목이나 구성이 《동국여지승람》의 구성과 비슷하다.

김정호는 또한 지도와 지지의 제작이 치국의 대경이라는 자신의 주장대로 치국경제에 유용하도록 《동여도지》 등을 제작할 때 문교무비(文敎武備)에 해당하는 관방과 역참, 학교와 서원 등 42개 편목을 자세히 설명하거나 표기하였다.

저서(작품)

지도와 지리지

저서로는 문집인 『사명당대사집』 7권과 『분충서난록(奮忠紓難錄)』 1권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일제강점기인 1925년 10월 8일과 9일 2번에 걸친 『동아일보』의 '고산자를 회함'이라는 칼럼에서 김정호와 『대동여지도』를 통해 민족적 우수성을 되짚어보려고 하였다. 여기에서 처음으로 전국답사설·백두산등정설·판목몰수설이 나타났는데, 그 목적은 다음과 같다.

첫째, 김정호가 국가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신이 직접 측량하여 『대동여지도』를 제작했다는 점을 부각시켜 1800년(순조 즉위) 초반에 에도막부[江戶幕府]의 도움을 받아 전국을 답사하면서 일본을 측량하여 지도를 제작한 이노 다다타카(伊能忠敬)보다 더 뛰어나다는 것을 내세우려 하였다.

둘째, 근대식 측량지도 못지않은 정확한 지도가 조선에도 『대동여지도』란 이름으로 제작되었음을 부각시켜 민족적 우수함을 설명함으로써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 백성에게 자긍심을 불어넣어 주려고 하였다.

셋째, 관에 의한 판목몰수설을 통해 조선의 멸망을 백성 전체의 문제가 아니라 집권층의 무능력 탓으로 돌리려 하였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서 편찬한 『조선어독본(朝鮮語讀本)』에 김정호의 전기가 처음으로 수록되었는데, 전국답사설·백두산등정설·판목몰수설은 『동아일보』의 「고산자를 회함」에서 그대로 따왔다.

다만 첫째, 김정호와 『대동여지도』의 우수함을 부각시키려 비교의 대상으로 삼았던 이노 다다타카(伊能忠敬)와 그가 제작한 지도에 대한 이야기를 생략하였다. 둘째, 김정호가 어린 시절에 보았던 조선의 지도가 정확성에서 엉터리라는 이야기를 삽입시킴으로써 김정호 이전 조선의 지도 제작 능력을 폄하시켰다. 셋째, 흥선대원군이란 구체적인 인물을 등장시켜 개항기 조선 정부의 무능력을 부각시킴으로써 조선이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편입된 것을 정당화시키려 하였다. 넷째, 조선 정부의 무능력을 더욱 부각시키기 위해 김정호 부녀의 옥사설을 추가하였다.

판목소각설은 『동아일보』의 기사나 『조선어독본』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 이야기로, 후대의 다른 자료에서 첨가된 것이다. 이와 같은 김정호의 전기는 1980년대까지도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으며, 1990년대부터 전국답사설·백두산등정설·옥사설·판목소각설이 모두 잘못된 이야기라는 새로운 연구가 나타나 점점 교정되기 시작했다.

김정호와 『대동여지도』에 관한 네 가지 설은 첫째, 전통시대에 필요한 거리 정보의 종류와 그것에 기초를 둔 지도의 제작 과정을 모르는 비전문가가 만들었기 때문에, 둘째, 김정호 이전에도 상당한 수준에 있었던 조선의 지도와 지리지 제작의 변천사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셋째, 김정호가 국토정보의 체계적 이해를 위해 평생에 걸쳐 지속적으로 지도와 지리지를 제작했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넷째, 김정호가 지도의 정확성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맞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 것이 이용의 편리였다는 점을 몰랐기 때문에 만들어진 잘못된 주장이다.

관련 기록

  • 최한기가 쓴 〈청구도〉 제문(題文)을 보면, 김정호는 동관(童冠)의 나이 때부터 지도와 지지에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동관'은 18세나 19세로 추정한다.
나의 벗 김정호는 소년 시절부터 지리학에 뜻을 두고 오랜 세월 동안 지도와 지리지를 수집하여 여러 지도의 도법을 상호비교해서 <청구도>를 만들었다.(金友正浩 年自童冠 深留意圖志...)
김정호는 재주가 많아 그림도 잘 그리고 조각도 잘 했는데 특히 지리학에 깊이 빠져 지도와 지리지를 깊이 고찰하고 널리 수집하여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다
나(신헌)는 일찍이 우리나라 지도에 뜻을 두고 비변사와 규장각에 소장된 것, 오래된 집안에 좀먹다 남은 것들을 널리 수집하여 증정하고, 여러 본들을 서로 참고하고, 여러 책들에 근거하여 합쳐서 편집하였다. 이리하여 김군백원(金君百源)에게 물어 그것을 맡겨 만들게 하였다. 가리켜 증명하고 입으로 전해주기를 수십 년이나 하여 비로소 한 부가 만들어졌는데 모두 23권이다.
근자에 김정호라는 사람이 대동여지도 20권을 지었는데… 잠시 보았을 뿐인데도 환히 알 수 있게 되어 매우 편리하다. 그 착상이 선인들에 비하여 분명히 우수하고, 그 정밀함은 이만저만하지 않다. … 그의 지도와 지지는 꼭 세상에 전해져야 할 것이다.

평가

초서를 잘 썼으며 밀양의 표충사, 묘향산의 수충사(酬忠祠)에 배향되었다.[1] 해인사에 홍제존자비(弘濟尊者碑)가 있다. 승려의 몸으로 국가의 위기에 몸소 뛰쳐나와 의승(義僧)을 이끌고 전공을 세웠으며 전후의 대일 강화(외교) 등 눈부신 활약은 후세 국민이 민족의식을 발현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기타

민족기록화와의 연관성

박서보의 1979년 민족기록화 작품 박서보-설법으로 왜장을 감동시킨 사명당(송운대사)의 중심 소재로 등장한다.

노드 및 관계

노드 관계 클래스 노드 설명
유정 isTheSubjectOf 민족기록화 박서보-설법으로 왜장을 감동시킨 사명당(송운대사) 박서보-설법으로 왜장을 감동시킨 사명당(송운대사)김정호를 소재로 그려진 민족기록화이다.
유정 isTheSubjectOf 승탑비 합천 해인사 홍제암 사명대사탑 및 석장비 합천 해인사 홍제암 사명대사탑 및 석장비유정을 소재로 한 승탑비다.
유정 isRelatedTo 사건 정여립 모반사건 정여립 모반사건유정이 연루된 사건이다.
유정 isMentionedIn 기록 이향견문록 이향견문록유정이 언급된 기록이다.
유정 isRelatedTo 사건 평양성 전투 평양성 전투유정이 참전한 사건이다.
유정 hasRelationshipWith 인물 권율 권율유정과 함께 전공을 세운 인물이다.
유정 isDiscipleOf 인물 휴정 휴정유정이 섬긴 스승이다.

함께 보기

관련 작품

  • 징비록》: KBS1, 2015년, 배우:박병호

관련 문화재


참고문헌


    • 2차 자료: 이상태, 『한국 고지도 발달사』, 혜안, 1999년, 185~242쪽.
    • 소준섭, 『조선인물실록 1』, 도서출판 자작나무, 1996년. 中 8장 「대동여지도의 김정호는 옥사하지 않았다」



    • 2차 자료: 이기봉, 『조선 고지도 여행 (I)·(II)』, 새문사, 2011년.
    • 이기봉, 『평민 김정호의 꿈』 새문사, 2010년
    • 국토해양부 국립지리정보원, 『지도 발달사』 2009년.
    • 오상학, 『옛 삶터의 모습 고지도』 국립중앙박물관, 2005년.
    • 대한측량협회, 『고산자 김정호 관련 측량 및 지도 사료 연구』, 2003년.
    • 이상태, 『한국의 고지도 발달사』, 혜안, 1999년.
    • 이기봉, 「『청구도』이본 4개 유형의 지도적 특징과 변화에 대한 연구」, 『한국고지도연구』1(2), 2010년.
    • 이기봉,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동여』와 『청구도』의 관계에 대한 비판적 재검토」, 『한국지역지리학회지』14(3), 2008년.
    • 장진숙,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필사본 『대동여지도』연구」 부산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8년.
    • 배우성, 「대동여지도 연구의 쟁점과 과제」, 『한국과학사학회지』, 28(1), 2007년.
    • 이기봉, 「김정호의 『동여도』제작 시기에 대한 일고찰」, 『문화역사지리』17(3), 2005년.
    • 오상학, 「고산자 김정호의 지도제작과 그 의의」, 『고산자 기념사업 연구 용역 논문집』, 2001년.
    • 양보경, 「고산자 김정호의 지리지 편찬과 그 의의」, 『고산자 기념사업 연구 용역 논문집』, 2001년.
  • 한국문화콘텐츠닷컴 "김정호의 생애"
    • 2차 자료: 이상태, 『한국의 고지도 발달사』, 혜안, 1999년.
  • 고산자를 회함
    • 2차 자료: 최남선, "고산자를 懷함", 1925년 8월 9일 및 10일자 『동아일보』 칼럼.
  • 유재건, 『이향견문록』, 글항아리, 2008년.

각주

  1. 틀:지만지

추가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