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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조부 효곤(孝昆)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관직이 장악원 정(掌樂院 正)에 이르렀는데, 일찍이 대구(大丘)의 수령으로 있을 적에 밀성(密城, 밀양)에다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하였다. 그는 유학(幼學) 종원(宗元)을 낳았고, 종원은 교생(校生) 수성(守成)을 낳았으며, 수성은 달성서씨(達城徐氏)에게 장가들었다. 서씨가 어느 날 저녁에 주부의 거처에 있다가 잠깐 졸면서 꿈을 꾸었는데, 누런 두건을 두른 황금빛 사람이 흰 구름을 타고 높은 누대에 올라가서 늙은 선옹(仙翁)에게 허리를 굽혀 절을 하니, 선옹이 미소를 지으며 말하기를, "이 사람은 고해(苦海)를 건네주는 장년삼로(長年三老, 뱃사공)인데 , 어찌하여 나에게 와서 절을 하시는가?"라고 하였다. 그 소리를 귀로 듣는 순간에 갑자기 놀라 꿈에서 깨고 보니, 마치 오래 굶주렸다가 한 번 배불리 먹은 것 같고, 뭔가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두려운 생각과 함께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런 일이 있은 뒤로부터는 웃어도 잇몸을 보이지 않았으며 감히 트림이나 한숨이나 하품이나 기지개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1년 뒤인 가정(嘉靖) 23년(1544) 갑진년 10월 17일에 대사를 낳았으니, 그때는 우리 중종(中宗) 성효대왕(誠孝大王)이 즉위하신 지 39년이 되는 해였다.
 
|증조부 효곤(孝昆)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관직이 장악원 정(掌樂院 正)에 이르렀는데, 일찍이 대구(大丘)의 수령으로 있을 적에 밀성(密城, 밀양)에다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하였다. 그는 유학(幼學) 종원(宗元)을 낳았고, 종원은 교생(校生) 수성(守成)을 낳았으며, 수성은 달성서씨(達城徐氏)에게 장가들었다. 서씨가 어느 날 저녁에 주부의 거처에 있다가 잠깐 졸면서 꿈을 꾸었는데, 누런 두건을 두른 황금빛 사람이 흰 구름을 타고 높은 누대에 올라가서 늙은 선옹(仙翁)에게 허리를 굽혀 절을 하니, 선옹이 미소를 지으며 말하기를, "이 사람은 고해(苦海)를 건네주는 장년삼로(長年三老, 뱃사공)인데 , 어찌하여 나에게 와서 절을 하시는가?"라고 하였다. 그 소리를 귀로 듣는 순간에 갑자기 놀라 꿈에서 깨고 보니, 마치 오래 굶주렸다가 한 번 배불리 먹은 것 같고, 뭔가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두려운 생각과 함께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런 일이 있은 뒤로부터는 웃어도 잇몸을 보이지 않았으며 감히 트림이나 한숨이나 하품이나 기지개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1년 뒤인 가정(嘉靖) 23년(1544) 갑진년 10월 17일에 대사를 낳았으니, 그때는 우리 중종(中宗) 성효대왕(誠孝大王)이 즉위하신 지 39년이 되는 해였다.
|출처=사명 유정 지음, 이상현 옮김, 「유명조선국 자통광제존자 사명당 송운 대사 행적」, 『사명대사집』, 동국대학교출판부, 2014, 4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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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사명 유정 지음, 이상현 옮김, 『사명대사집』, 동국대학교출판부, 2014, 4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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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살 때 스님의 할아버지가 史記를 가르치려고 했더니 스님이 “學者의 業이 貴한 것입니까? 賤한 것입니까? 만약 귀한 것이라면 마땅히 배워서 게을리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물었다. 할아버지가 말씀하시기를 “이 世上에서 배움보다 더 貴한 것은 없다. 古今의 賢聖이 모두 배움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니, 어찌 감히 이를 疏忽히 할 수 있겠는가?”라 하였다. 스님이 말하기를 “만약 聖賢의 마음으로써 배움을 삼는 것이라면 貴한 것이고, 이를 어기는 것은 賤한 것이라 하겠으나, 그러나 간혹 世上에서 배운 바가 오히려 사람을 해롭게 하는 說이 많고, 반면 사람을 이롭게 하는 敎訓이 적으니, 이를 어찌 貴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라 하자 할아버지께서 말씀하되 “사람을 이롭게 하거나, 해롭게 하는 것이 空虛한 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마음의 善과 惡에 매여 있는 것이다. 너의 말이 참으로 一理가 있다.”고 칭찬하였다. 그리하여 스님은 이 때부터 스스로 힘써 공부하고 게을리하지 않았다.  
 
|7살 때 스님의 할아버지가 史記를 가르치려고 했더니 스님이 “學者의 業이 貴한 것입니까? 賤한 것입니까? 만약 귀한 것이라면 마땅히 배워서 게을리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물었다. 할아버지가 말씀하시기를 “이 世上에서 배움보다 더 貴한 것은 없다. 古今의 賢聖이 모두 배움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니, 어찌 감히 이를 疏忽히 할 수 있겠는가?”라 하였다. 스님이 말하기를 “만약 聖賢의 마음으로써 배움을 삼는 것이라면 貴한 것이고, 이를 어기는 것은 賤한 것이라 하겠으나, 그러나 간혹 世上에서 배운 바가 오히려 사람을 해롭게 하는 說이 많고, 반면 사람을 이롭게 하는 敎訓이 적으니, 이를 어찌 貴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라 하자 할아버지께서 말씀하되 “사람을 이롭게 하거나, 해롭게 하는 것이 空虛한 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마음의 善과 惡에 매여 있는 것이다. 너의 말이 참으로 一理가 있다.”고 칭찬하였다. 그리하여 스님은 이 때부터 스스로 힘써 공부하고 게을리하지 않았다.  
 
13살 때 柳村 黃汝獻으로부터 󰡔孟子󰡕를 배우다가 어느 날 저녁 책을 덮고 탄식하면서 말하되, “俗學은 微賤하고 固陋하여 世緣을 번거롭게 하는 것이니, 어찌 불교의 無漏學說을 배우는 것만 같겠는가!”하고 곧 김천 黃獄山의 直指寺로 가서 信黙和尙을 은사로 하여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처음부터 禪典中 󰡔景德傳燈錄󰡕을 열람하다가 얼마되지 않아 이미 오묘한 宗旨를 깨달았으므로 여러 老宿들이 모두 찾아와서 배우고 質問하였다.
 
13살 때 柳村 黃汝獻으로부터 󰡔孟子󰡕를 배우다가 어느 날 저녁 책을 덮고 탄식하면서 말하되, “俗學은 微賤하고 固陋하여 世緣을 번거롭게 하는 것이니, 어찌 불교의 無漏學說을 배우는 것만 같겠는가!”하고 곧 김천 黃獄山의 直指寺로 가서 信黙和尙을 은사로 하여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처음부터 禪典中 󰡔景德傳燈錄󰡕을 열람하다가 얼마되지 않아 이미 오묘한 宗旨를 깨달았으므로 여러 老宿들이 모두 찾아와서 배우고 質問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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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이지관, "합천 해인사 사명대사석장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116-1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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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15일 (화) 12:05 판

유정(惟政)
BHST Monk1.png
대표명칭 유정
한자 惟政
생몰년 1544년(중종 39)-1610년(광해군 2)
시호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
사명당(四溟堂), 사명(四溟), 송운(松雲)
법명 유정(惟政)
이환(離幻)
이칭 종봉(鍾峯)
성씨 임씨
본관 풍천(豊川)
속명 임응규(任應奎)
출신지 경상남도 밀양
승탑 합천 해인사 홍제암 사명대사탑
승탑비 합천 해인사 홍제암 사명대사탑비



정의

조선시대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유정은 1544년(중종 39) 10월 17일에 밀양(密陽)의 삼강동에서 임수성(任守成)과 그 부인인 달성서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유정의 집안은 선대에 대대로 명성과 신망이 높았던 풍천의 이름난 집안이었다. 증조부 임효곤(任孝昆)은 문과에 급제하여 장악원정(掌樂院正)을, 조부 임종원(任宗元)은 강계부사를 지냈는데, 증조부가 일찍이 대구의 수령을 지냈기 때문에 밀양에 살게 되었다. 그가 태어나던 날에는 어머니가 꿈에 흰 구름을 타고 황색 두건을 쓴 금인(金人)을 데리고 만 길이나 되는 높은 대에 올라가니 늙은 신선이 그 위에 걸터앉아 있다가 머리를 땅에 대고 절을 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1]

Quote-left.png 증조부 효곤(孝昆)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관직이 장악원 정(掌樂院 正)에 이르렀는데, 일찍이 대구(大丘)의 수령으로 있을 적에 밀성(密城, 밀양)에다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하였다. 그는 유학(幼學) 종원(宗元)을 낳았고, 종원은 교생(校生) 수성(守成)을 낳았으며, 수성은 달성서씨(達城徐氏)에게 장가들었다. 서씨가 어느 날 저녁에 주부의 거처에 있다가 잠깐 졸면서 꿈을 꾸었는데, 누런 두건을 두른 황금빛 사람이 흰 구름을 타고 높은 누대에 올라가서 늙은 선옹(仙翁)에게 허리를 굽혀 절을 하니, 선옹이 미소를 지으며 말하기를, "이 사람은 고해(苦海)를 건네주는 장년삼로(長年三老, 뱃사공)인데 , 어찌하여 나에게 와서 절을 하시는가?"라고 하였다. 그 소리를 귀로 듣는 순간에 갑자기 놀라 꿈에서 깨고 보니, 마치 오래 굶주렸다가 한 번 배불리 먹은 것 같고, 뭔가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두려운 생각과 함께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런 일이 있은 뒤로부터는 웃어도 잇몸을 보이지 않았으며 감히 트림이나 한숨이나 하품이나 기지개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1년 뒤인 가정(嘉靖) 23년(1544) 갑진년 10월 17일에 대사를 낳았으니, 그때는 우리 중종(中宗) 성효대왕(誠孝大王)이 즉위하신 지 39년이 되는 해였다. Quote-right.png
출처: 사명 유정 지음, 이상현 옮김, 『사명대사집』, 동국대학교출판부, 2014, 458쪽.


출가수행

유정은 7세를 전후하여 역사를 배우고 13세 때 황여헌(黃汝獻)에게 『맹자』를 배웠다. 1558년(명종 13) 어머니가 죽고, 1559년 아버지가 죽자 김천 직지사(直指寺)로 출가하여 신묵(信默)의 제자가 되었다.[2]

Quote-left.png 7살 때 스님의 할아버지가 史記를 가르치려고 했더니 스님이 “學者의 業이 貴한 것입니까? 賤한 것입니까? 만약 귀한 것이라면 마땅히 배워서 게을리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물었다. 할아버지가 말씀하시기를 “이 世上에서 배움보다 더 貴한 것은 없다. 古今의 賢聖이 모두 배움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니, 어찌 감히 이를 疏忽히 할 수 있겠는가?”라 하였다. 스님이 말하기를 “만약 聖賢의 마음으로써 배움을 삼는 것이라면 貴한 것이고, 이를 어기는 것은 賤한 것이라 하겠으나, 그러나 간혹 世上에서 배운 바가 오히려 사람을 해롭게 하는 說이 많고, 반면 사람을 이롭게 하는 敎訓이 적으니, 이를 어찌 貴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라 하자 할아버지께서 말씀하되 “사람을 이롭게 하거나, 해롭게 하는 것이 空虛한 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마음의 善과 惡에 매여 있는 것이다. 너의 말이 참으로 一理가 있다.”고 칭찬하였다. 그리하여 스님은 이 때부터 스스로 힘써 공부하고 게을리하지 않았다.

13살 때 柳村 黃汝獻으로부터 󰡔孟子󰡕를 배우다가 어느 날 저녁 책을 덮고 탄식하면서 말하되, “俗學은 微賤하고 固陋하여 世緣을 번거롭게 하는 것이니, 어찌 불교의 無漏學說을 배우는 것만 같겠는가!”하고 곧 김천 黃獄山의 直指寺로 가서 信黙和尙을 은사로 하여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처음부터 禪典中 󰡔景德傳燈錄󰡕을 열람하다가 얼마되지 않아 이미 오묘한 宗旨를 깨달았으므로 여러 老宿들이 모두 찾아와서 배우고 質問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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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지관, "합천 해인사 사명대사석장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116-1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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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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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양혜원, "유정(사명대사) (惟政)",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2. 목정배, "유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 이지관, "합천 해인사 사명대사석장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102-137쪽.
  • "해인사사명대사석장비", 금석문 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