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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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정보_김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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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기사보기|
|DB유형 =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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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기사=[[조선 정관이 사명당에게]]
|국문명 = 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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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자명 = 惟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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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려정보
|이칭/호 = (): 이환, 속명: 임응규(任應奎), 법명: 유정(惟政). /사명당(四溟堂), 송운(松雲), 별호: 종봉(鍾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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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BHST_Buseoksa_Josadang_Yujeong.jpg
|시대 =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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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영주 부석사 조사당 내 유정 진영
|성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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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유정
|출생 - 사망 = 1544년(중종 39) - 몰년 1610년(광해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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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성격 = 승려, 승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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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惟政
|본관 = 풍천(豊川, 지금의 황해도 송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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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1544년(중종 39)
|이미지 출처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ref>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범어사에 소장됨</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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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1610년(광해군 2)
|image = 사명대사영정.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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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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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사명당(四溟堂), 사명(四溟), 송운(松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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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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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명=유정(惟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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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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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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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환(離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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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칭=종봉(鍾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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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임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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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풍천(豊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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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명=임응규(任應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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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경상남도 밀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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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탑=[[합천 해인사 홍제암 사명대사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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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탑비=[[합천 해인사 홍제암 사명대사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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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조선 후기 대표적 지리학자이며 지도 제작자로, 가장 많은 지도를 제작하였고, 가장 많은 지리지를 편찬하였다.<br/>
 
자는 백원(伯源), 호는 고산자(古山子), 황해도 토산(兎山) 출생으로 본관은 청도(淸道)다. 한자가 다른 김정호(金正皡)로도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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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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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승려
  
'''유정'''(惟政, [[1544년]] [[10월 17일]] ~[[1610년]] [[음력 8월 26일]]<ref name="인물정보" /> (양력 [[10월 12일]])은 [[조선]] 중기의 고승, 승장(僧將)이다. 속성은 임(任), 속명은 응규(應奎), 자는 이환(離幻), 호는 송운(松雲), 당호는 사명당(泗溟堂), 별호는 종봉(鍾峯), 본관은 [[풍천 임씨|풍천]]이며,<ref name="인물정보">[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6JOb_A1544_1_0008227&curSetPos=0&curSPos=0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ref> 시호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이다. 법명인 유정보다 당호인 '''사명당'''(泗溟堂)으로 더 유명하고, 존경의 뜻을 담아 '''사명대사'''(泗溟大師)라고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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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파일:사명대사 기적비.jpeg|thumb|right|250px|1912년 촬영된 사명대사 기적비(紀蹟碑). 언젠가 파괴되었다가, 1996년 파편이 [[건봉사]]에서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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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와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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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은 1544년([[조선 중종|중종]] 39) 10월 17일에 밀양(密陽)의 삼강동에서 [[임수성|임수성(任守成)]]과 그 부인인 [[달성서씨|달성서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유정의 집안은 선대에 대대로 명성과 신망이 높았던 풍천의 이름난 집안이었다. 증조부 [[임효곤|임효곤(任孝昆)]]은 문과에 급제하여 장악원정(掌樂院正)을, 조부 [[임종원|임종원(任宗元)]]은 강계부사를 지냈는데, 증조부가 일찍이 대구의 수령을 지냈기 때문에 밀양에 살게 되었다. 그가 태어나던 날에는 어머니가 꿈에 흰 구름을 타고 황색 두건을 쓴 금인(金人)을 데리고 만 길이나 되는 높은 대에 올라가니 늙은 신선이 그 위에 걸터앉아 있다가 머리를 땅에 대고 절을 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ref>양혜원,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60 유정(사명대사) (惟政)]",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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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조부 효곤(孝昆)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관직이 장악원 정(掌樂院 正)에 이르렀는데, 일찍이 대구(大丘)의 수령으로 있을 적에 밀성(密城, 밀양)에다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하였다. 그는 유학(幼學) 종원(宗元)을 낳았고, 종원은 교생(校生) 수성(守成)을 낳았으며, 수성은 달성서씨(達城徐氏)에게 장가들었다. 서씨가 어느 날 저녁에 주부의 거처에 있다가 잠깐 졸면서 꿈을 꾸었는데, 누런 두건을 두른 황금빛 사람이 흰 구름을 타고 높은 누대에 올라가서 늙은 선옹(仙翁)에게 허리를 굽혀 절을 하니, 선옹이 미소를 지으며 말하기를, "이 사람은 고해(苦海)를 건네주는 장년삼로(長年三老, 뱃사공)인데 , 어찌하여 나에게 와서 절을 하시는가?"라고 하였다. 그 소리를 귀로 듣는 순간에 갑자기 놀라 꿈에서 깨고 보니, 마치 오래 굶주렸다가 한 번 배불리 먹은 것 같고, 뭔가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두려운 생각과 함께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런 일이 있은 뒤로부터는 웃어도 잇몸을 보이지 않았으며 감히 트림이나 한숨이나 하품이나 기지개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1년 뒤인 가정(嘉靖) 23년(1544) 갑진년 10월 17일에 대사를 낳았으니, 그때는 우리 중종(中宗) 성효대왕(誠孝大王)이 즉위하신 지 39년이 되는 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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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사명 유정 지음, 이상현 옮김, 『사명대사집』, 동국대학교출판부, 2014, 4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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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惟政, 1544년~1610년)은 조선 중기의 고승, 승장(僧將)이다. 속성은 임(), 속명은 응규(應奎), 자는 이환(離幻), 호는 송운(松雲), 당호는 사명당(泗溟堂), 별호는 종봉(鍾峯), 본관은 풍천이며, 시호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이다. 법명인 유정(惟政)보다 당호인 사명당(泗溟堂)으로 더 유명하고, 존경의 뜻을 담아 사명대사(泗溟大師)라고도 부른다.[1] 승려의 몸으로 국가의 위기에 몸소 뛰쳐나와 의승(義僧)을 이끌고 전공을 세웠으며 전후의 대일 강화조약 등 눈부신 활약은 후세 국민이 민족의식을 발현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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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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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은 7세를 전후하여 역사를 배우고, 13세 때 [[황여헌|황여헌(黃汝獻)]]에게 『맹자』를 배웠다. 1558년([[조선 명종|명종]] 13) 어머니가 죽고, 1559년 아버지가 죽자 [[김천 직지사|김천 직지사(直指寺)]]로 출가하여 [[신묵|신묵(信默)]]의 제자가 되었다.<ref>목정배,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1805 유정]",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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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살 때 스님의 할아버지가 史記를 가르치려고 했더니 스님이 “學者의 業이 貴한 것입니까? 賤한 것입니까? 만약 귀한 것이라면 마땅히 배워서 게을리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물었다. 할아버지가 말씀하시기를 “이 世上에서 배움보다 더 貴한 것은 없다. 古今의 賢聖이 모두 배움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니, 어찌 감히 이를 疏忽히 할 수 있겠는가?”라 하였다. 스님이 말하기를 “만약 聖賢의 마음으로써 배움을 삼는 것이라면 貴한 것이고, 이를 어기는 것은 賤한 것이라 하겠으나, 그러나 간혹 世上에서 배운 바가 오히려 사람을 해롭게 하는 說이 많고, 반면 사람을 이롭게 하는 敎訓이 적으니, 이를 어찌 貴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라 하자 할아버지께서 말씀하되 “사람을 이롭게 하거나, 해롭게 하는 것이 空虛한 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마음의 善과 惡에 매여 있는 것이다. 너의 말이 참으로 一理가 있다.”고 칭찬하였다. 그리하여 스님은 이 때부터 스스로 힘써 공부하고 게을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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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살 때 柳村 黃汝獻으로부터 󰡔孟子󰡕를 배우다가 어느 날 저녁 책을 덮고 탄식하면서 말하되, “俗學은 微賤하고 固陋하여 世緣을 번거롭게 하는 것이니, 어찌 불교의 無漏學說을 배우는 것만 같겠는가!”하고 곧 김천 黃獄山의 直指寺로 가서 信黙和尙을 은사로 하여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처음부터 禪典中 󰡔景德傳燈錄󰡕을 열람하다가 얼마되지 않아 이미 오묘한 宗旨를 깨달았으므로 여러 老宿들이 모두 찾아와서 배우고 質問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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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이지관, "합천 해인사 사명대사석장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116-1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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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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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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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은 1561년 [[승과|선과(禪科)]]에 응시하여 장원급제한 후 [[서울 봉은사|봉은사]]에 머물며 불교 경전을 부지런히 읽었다. 20여 세에 동녀배들과 갑회(甲會)를 조직하고 갑회문(甲會文)을 지어 나라와 백성을 위해 기도하며 건전한 승려 생활을 실행하자는 뜻을 다짐하였다. 한편 [[박순|사암(思菴) 박순(朴淳)]], [[이산해|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고경명|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 [[최경창|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 [[임제|자순(子順) 임제(林悌)]], [[이달|손곡(蓀谷) 이달(李達)]] 등 사대부 문인들과 시를 지으며 교유하였다. 한번은 [[허봉|하곡(荷谷) 허봉(許篈)]]과 중국의 문장가 [[한유|한유(韓愈)]]의 글 한 편을 외우는 내기에 이겨 책 한 권을 받았다. [[기대승|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이 이 이야기를 듣고 "재주만 믿고 스스로 만족하면 학문에 발전은 없을 것"이라 하니, 이 말을 새겨듣고 공부에 열중하였으며, [[노수신|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에게서 많은 책을 빌려 읽는 이외에도 사자(四子, 공자·맹자·증자·자사)와 [[이백|이백(李白)]], [[두보|두보(杜甫)]]의 시를 배워 일취월장하였다.<ref>사명 유정 지음, 이상현 옮김, 『사명당대사집』, 동국대학교출판부, 2014, 9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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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酉年에 禪科에 합격한 후부터 스님의 華麗한 所聞이 점차로 높아지자 一時의 學士·大夫·詩人인 朴思 菴·李鵞溪·高霽峰·崔嘉運·許美叔·林子順·李益之 등의 학자들이 모두 스님과 깊은 交驩을 가지면서 詩와 文翰을 唱和함으로써 詞林人들에게 널리 전파되어 美談이 되었다. 일찍이 荷谷과 더불어 韓愈(退之)의 文章 中 가장 많은 鉅篇을 골라 외우기 내기를 하였는데 스님은 한 번 읽고 완전하게 暗誦하였으므로 荷谷은 감탄하면서 곧 바로 手寫本을 전해 주었다. 奇高峰이 격려하되 “만약 이 재주만 믿어 自足하면 학문이 반드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할 것이며 세월을 虛費할 뿐 아니라 지금까지의 功勞를 그르칠 것이니 可惜하다.”고 하였다. 스님은 이 말을 듣고 정신을 가다듬고 엄숙한 마음으로 부지런히 연마하고 조금도 게을리하지 아니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四子書를 蘇齋相에게서 수학하였고, 또 李白과 杜甫의 詩도 배웠다. 이로부터 文章이 날마다 더욱 進趣를 보였을 뿐만 아니라, 內典의 千函도 또한 모두 섭렵하였으니, 方袍를 입은 스님으로서 竺墳을 익힌 강주들이 스님이 있는 山門으로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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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이지관, "합천 해인사 사명대사석장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117-1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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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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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은 1573년 [[김천 직지사|직지사]] 주지로 있으면서 [[보우(조선)|허응당(虛應堂) 보우(普雨)]]의 문집과 잡저의 간행에 발문을 쓰고 교정을 보았다. 1575년 [[선종|선종(禪宗)]]의 수찰(首刹)인 [[서울 봉은사|봉은사]]의 주지로 천거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 [[향산 보현사|보현사]] [[휴정|서산대사]]의 문하로 들어갔다. 이로부터 3년 동안 수행을 거듭하였으며, 그 사이에 유정은 대동강 [[평양 부벽루|부벽루(浮碧樓)]]에 오르고, [[최치원|고운 최치원]]의 족적을 따라 [[합천 해인사|해인사]]를 비롯하여 [[사천 곤양성|사천 곤양성(昆陽城)]]과 [[하동 악양루|하동 악양루(岳陽樓)]]를 유력하였다. 1578년 [[휴정|서산대사]]의 문하를 떠나 금강산 [[금강 표훈사 보덕암|보덕암(報德庵)]]으로 들어가 세번의 안거(安居)를 지내며 「동해사(東海辭)」 등 많은 시를 지었다. 1579년 『선가귀감(禪家龜鑑)』의 발문, 1580년 「부석사 안양루 중창기문(浮石寺安養樓重創記文) 」을 짓고 썼다. 이어 팔공산, 지리산, 청량산, 태백산 등을 순력하면서, 특히 태백산 [[삼척 영은사|운망사(雲望寺)]]의 이름을 고쳐 영은사(靈隱寺)라 한 것으로 보인다. 1583년 가을 관서로 가는 도중에 귀양살이하는 친한 벗 [[허봉|하곡]]을 생각하며 시를 지었다. 1586년 봄 옥천(沃天)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던 중 간밤의 비바람에 떨어진 낙화를 보고 문득 '무상(無常)'의 법을 깨달았다. 이에 제자들을 다 돌려보내고 홀로 선방에 들어가 가부좌하고 열흘 동안 선정에 들었다. 1589년에는 오대산 영감난야(靈鑑蘭若)에 머물면서 「월정사 법당의 서까래를 고치고 올린 글(月精寺法堂改椽錄)」을 지어 모금하며 사찰의 중수에 매달렸다. 이 가운데 [[정여립]]의 역모 사건에 모함을 받아 투옥되었으나 강릉 사림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5년 동안 계속된 공사는 단오절을 맞아 낙성식과 향조대회를 열어 완성을 고한 다음 유정은 금강산으로 들어갔다.<ref>사명 유정 지음, 이상현 옮김, 『사명당대사집』, 동국대학교출판부, 2014, 9-10쪽.</ref>
김정호에 대한 기록은 [[청구도|『청구도』]]에 수록된 [[최한기]]의 [[청구도제|「청구도제(靑邱圖題)]],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수록된「만국경위지구도변증설(萬國經緯地地球圖辨證說」과 「지지변증설(地志辨證說)」, [[신헌]]의 [[금당초고|『금당초고(琴堂初槁)]]에 수록된 「대동방여도서(大東方輿圖序)」, [[유재건]]의 [[이향견문록|『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수록된 「김고산정호(金古山正浩)」에 불과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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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
남아있는 기록을 모두 합해도 A4 용지 한 장 안팎밖에 되지 않는 아주 적은 양이다. 이에 따라 김정호가 황해도 토산 출신이라든지, 도성 숭례문 밖의 만리재나 약현 부근에 살았다는 등의 일설이 전해지고 있지만 생몰 연대, 본관, 신분, 고향, 주요 주거지, 가계 등에 대해 어느 것도 정확하게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이 없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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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亥年에는 空門의 衆望을 받아 禪宗寺刹의 주지 추천을 받았으나, 굳게 사양하고,錫杖을 짚고 떠나 妙香山으로 들어가서 비로소 淸虛座下에서 법문을 청하였다. 서산스님은 心地法門을 제시하여 바로 性宗의 道理를 傳授하므로 스님은 청허의 言下에 大悟하고 곧 言語文字인 群言을 모두쓸어버리고 閑習도 함께 끊어버렸다. 從來에 詞家들과 교류하여 遊戱하면서 綺言妙句로 말 잔치를 벌리던 모든 것을 참회하는 마음으로 정리하고 安心과 定性에 뜻을 집중하여 3년 동안 苦行精進하여 正法의 골수를 얻었다. 戊寅年에 이르러 청허스님을 하직하고 楓岳山으로 가서 報德寺에서 3년간 정진한 후, 남쪽으로 발길을 돌려八公山, 淸凉山, 太白山 등을 두루 순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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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戌年 봄 음성 沃川山 上東菴에 이르러 잠시 머무는 동안, 어느 날 밤 폭우가 내려 뜰 앞에 피었던 꽃이 모두 떨어졌다. 이를 본 스님은 문득 無常을 깨닫고 門人들을 모아 놓고 이르기를 “어제 활짝 피어 정원에 가득하였던 꽃 가지가 오늘은 쓸쓸한 빈 가지뿐이니, 人間 世上의 變滅함도 또한 이와 다를 바 없건마는, 허무한 人生이 마치 蜉蝣와 같은 데도 세월을 虛送하고 있으니, 참으로 가련한 일이아닐 수 없다. 너희들은 각각 신비한 自性을 具足하고 있거늘, 어찌 이를 다시 찾아 生死大事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가? 부처는 나의 마음속에 있거늘 어찌하여 마음 밖으로만 달려가 추구하여 세월만 보내고 있는가?”라 하고, 곧 문도를 四方으로 흩어 보내고는 홀로 禪室에 들어가서 가부좌를 맺고 黙言하면서 골똘히 精進하였다. 간혹 10여 일씩 문 밖으로 나오지 않으므로 문 구멍으로 엿보면 오뚝하게 앉아 있어 마치 흙으로 빚어 놓은 사람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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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丑年에 강원도 平昌郡 五臺山靈鑑蘭若에 머물고 있었는데, 鄭汝立의 逆謀 사건에 연루되어 江陵府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儒士들이 그 억울함을 官에 호소하여풀려났다. 庚寅年에는 楓岳山으로 가서 3년간 住錫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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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이지관, "합천 해인사 사명대사석장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119-1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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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호의 신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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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그의 신분을 알 수 있는 전기는 전혀 없으나, 몇가지 사실로 그의 신분을 유추해 볼 수 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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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병으로서의 활동=====
첫째, [[유재건]][[이향견문록|『이향견문록』]]에 수록된 인물들의 신분을 통해서 김정호의 신분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은 전기가 전해지지 않는 하층계급 출신으로 각방면에 뛰어난 인물들의 행적을 모은 책으로, 여기에 수록된 김정호도 하층계급 출신이었을 것이라 추측된다.<br/>
+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당시 [[고성 유점사|유점사(楡岾寺)]]에 있으면서 인근 아홉 고을의 백성들을 구출하였다. 이때 조정의 근왕문(勤王文)과 스승 [[휴정|서산대사]]의 격문을 받고 승병을 모아 순안 [[평원 법흥사|법흥사(法興寺)]]로 가서 [[휴정|서산대사]]와 합류하였다. 그곳에서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이 되어 승병 2,000명을 이끌고 평양성 탈환의 전초 구실을 담당하였다. 1593년(선조 26) 1월 명나라 구원군이 주축이 되었던 평양성 탈환의 혈전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그해 3월 서울 근교의 삼각산 노원평(蘆原坪) 및 우관동 전투에서도 큰 공을 세웠다. [[조선 선조|선조]]는 사명대사의 전공을 포장하여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를 제수하였다.<ref>손경희, "[http://gimcheon.grandculture.net/Contents?local=gimcheon&dataType=01&contents_id=GC03200875 사명대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디지털김천문화대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둘째, [[신헌]]의 [[대동방여도서|『대동방여도서(大東方輿圖序)]] 서문을 통해서도 김정호의 신분을 추측할 수 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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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헌)는 일찍이 우리나라 지도에 뜻을 두고 비변사와 규장각에 소장된 것, 오래된 집안에 좀먹다 남은 것들을 널리 수집하여 증정하고, 여러 본들을 서로 참고하고, 여러 책들에 근거하여 합쳐서 편집하였다. 이리하여 '''김군백원(金君百源)'''에게 물어 그것을 맡겨 만들게 하였다. 가리켜 증명하고 입으로 전해주기를 수십 년이나 하여 비로소 한 부가 만들어졌는데 모두 23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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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辰年 여름에는 倭賊이 嶺東으로 침입하여 유점사에까지 이르렀다. 그 때 어떤 사람이 “우리 나라 사람이 왜적들의 길잡이가 되었다.”라고 하는 말을 듣고, 스님이 말씀하되 “만약 倭賊뿐이라면 설득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혹시 우리 나라 사람이 案內를 하고 있다면 또한 筆談으로 이해를 시킬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10여 명의 문도를 거느리고 곧 유점사 山門으로 들어갔다. 문도들은 모두 결박을 당하였으나, 오직 스님만은 泰然한 자세로 당당하게 一柱門·中門을 거쳐 中堂인 큰 법당에 이르렀다. 이 때 倭將의 頭目이 스님을 보고 非常한 人物인 줄 알고 賓主의 禮儀로써 공경히 접대하고 결박했던 모든 스님들을 풀어 주었다. 스님께서 글로써(筆談) 주고 받으면서 法門을 들려 주었더니, 모든 倭寇들이 敬服하고 산중의 깊고 고요한 곳으로 보내드렸다. 스님께서 門徒들에게 이르시되, “如來께서 出世하신 본 뜻은 중생을 救護하기 위함인데, 이 倭賊들이 앞으로 횡포가 심하여져서 우리 백성들을 殘害할까 염려되니, 내가 마땅히 그들을 찾아가 狂賊들을 說諭하여 흉악한 무기를 버리게 한다면 아마 부처님의 慈悲한 가르침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 될 것이다.”라 하고, 곧 바로 육환장을 짚고 高城으로 들어가니 賊將 3人이 함께 禮遇를 지극히 하였다. 스님께서 글을 써서 그들에게 절대로 殺生하기를 즐겨하지 말 것을 권하니, 세 장수가 모두 合掌하고 꿇어 앉아 戒를 받았다. 3일 동안 그들의 營內에 머물면서供養을 받고 떠날 때, 倭將들이 高城 문 밖까지 나와서 祖宴(錢別)을 베풀어 주었다. 당시 高城·杆城 등九個郡의 백성들이 모두 虔劉의 殘酷을 면하게 된 것은 대개 스님의 덕택이었다.
[[신헌]]은 자신보다 7-8세 연상인 김정호를 [[신헌]]은 김정호를 '김군백원(金君百源)'이라 칭하고 있는데, 같은 양반 출신이라면 김공(金公)이라고 표기했을 것이다. 그리고 성명을 적지 않고 성과 자만을 적은 것도 신분적 차이 때문이다. 이런 정황으로 보아 김정호는 [[신헌]]과는 다른 신분계층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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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4월 마침내 宣祖大王이 한양을 내어주고 義州를 向하여 떠날 때, 비분 강개하여 모든 스님들에게 이르되, “우리들이 나라 땅에 살면서 편안히 먹고 자고 지금까지 살 수 있었던 것은 秋毫만한 작은 것도 모두 임금의 恩惠가 아닌 것이 없다. 이와 같이 어렵고 위태한 國難을 당하여, 그 어찌 앉아서만 바라볼 수 있겠는가?” 하고, 곧 數百名의 스님을 모아 火急히 順安 法興寺로 달려가니, 이미 각지에서 몰려온 數千名의 義僧兵이 모여 있었다. 이 때 淸虛스님은 朝廷으로부터 「摠攝諸道僧兵」이라는 직책을 받았으나, 스님께서는 自身이 年老하여 氣力이 衰耗하다는 이유로 代身 사명스님을 추천하였다. 그리하여 드디어 사명스님은 義僧兵인 대중을 통솔하고 軆察使 柳成龍을 따라 明나라로부터 온 응원군의 總司令官劉挺을 도왔다.
셋째, 김정호의 족보가 없다는 사실로도 그의 신분을 추측할 있다. [[청도 김씨]] 대동보에 따르면 김정호는 봉산파로 분류되어 있는데 한국 전쟁으로 봉산파가 실계(失系; 가계가 끊김)된 것으로 적혀 있다. 그러나 6.25동란과 관계없이 한국 전쟁 이전에 편찬된 예전 족보(구보)에도 김정호는 실려 있지 않다. 이를 근거로 김정호의 집안이 [[청도 김씨]] 봉산파이기는 하나 가정 형편은 빈한한 몰락한 잔반(殘班)이나 중인으로 추정된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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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해인 1593년 1월에 平壤을 탈환하고, 倭將인 小西行長을 몰아냈다. 그 후 都元帥 權慄을 따라 嶺南으로 내려가 宜寧에주둔하면서 적을 죽이고 生捕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선조 임금은 이를 嘉賞히 여겨 堂上官의 官階를 내렸다.
넷째, 『지구전후도』, 『수전전도』, 목판본의 [[대동여지도|『대동여지도』]] 22첩, 『대동여지전도』에서 확인되듯이 판각에 뛰어난 각수(刻手)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평민의 장인 출신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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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이지관, "합천 해인사 사명대사석장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121-1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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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토 기요마사와의 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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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4년 4월 명나라의 [[심유경|심유경(沈惟敬)]]과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협상과는 별도로 사명대사는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도요토미 히데요시|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을 이간시키려는 계책의 주역을 맡게 되었다. 이때 처음으로 송운(松雲)이라는 법명으로 서생포(西生浦) 왜성을 찾아 [[가토 기요마사]]와 네 차례의 회담을 진행하였다.<ref>사명 유정 지음, 이상현 옮김, 『사명당대사집』, 동국대학교출판부, 2014, 11쪽.</ref> 제1차 회담은 1594년 4월 13~16일 서생포 일본 본진에서 열렸는데 강화 5조약으로 제시된 ①천자와 결혼할 것 ②조선 4도를 일본에 할양할 것 ③전과 같이 교린할 것 ④왕자 한 명을 일본에 보내 영주하게 할 것 ⑤조선의 대신 및 대관을 일본에 볼모로 보낼 것 등을 하나하나 논리적인 담판으로 척파하였다. 제2차 회담은 1594년 7월 12~16일, 제3차 회담은 1594년 12월 23일, 제4차 회담은 1597년 3월 18일 열렸는데, 이때도 대표로 나아가 강화 5조약의 모순을 지적하여 적들의 죄상을 낱낱이 척파하였다. 특히 제2차 적진 담판을 마치고 돌아와 선조에게 전말과 적정을 알리는 「토적보민사소(討賊保民事疏)」를 올렸으며, 1595년([[조선 선조|선조]] 28)에는 장편의 「을미상소(乙未上疏)」를 올렸다.<ref>손경희, "[http://gimcheon.grandculture.net/Contents?local=gimcheon&dataType=01&contents_id=GC03200875 사명대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디지털김천문화대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또한 [[가토 기요마사]]와 오갔던 대화와 관련된 일화도 회담시기에 있었던 일이다. 제2차 회담에서 [[가토 기요마사]]는 담판의 주요한 부분이 결렬되자 유정을 놀리기 위해 "귀국에도 보물이 있소?"라고 물었다. 그러자 "우리나라에서는 귀하의 머리를 금 천 근과 읍(邑) 만 호(戶)를 주고 산다고 하오. 이러한 막중한 것이 어찌 보배가 되지 않겠소" 라고 호방하게 맞받아쳤다고 한다.<ref>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14 - 경남』, 돌베개, 2002.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56765&cid=42840&categoryId=42844 사명대사 유정]",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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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午年 봄 總司令官인 劉挺의 命으로 스님은 釜山鎭營인 蔚山 西生浦로 세 번 찾아가서 倭將 加藤淸正을 만나 대화하면서 敵情의 자세한 內容을 파악하였다. 이 때 淸正이 탐욕스러운 눈으로 “朝鮮에 貴重한 보물이 있는냐?”고 물었다. 스님은 소리를 높여 대답하되 “우리 나라에는 보배가 없고, 귀한 보물은 日本에 있다.”고 하였다. 청정이 “무슨 말입니까?”라 하자 스님이 말씀하되 “지금 우리 나라에서는 당신의 머리를 가장 귀한 보물로 보고 모두 노리고 있으므로 보배가 日本에 있다고 한것입니다.”라 하였다. 이 말을 들은 淸正이 깜짝 놀라면서 스님의 法力과 愛國精神에 감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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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이지관, "합천 해인사 사명대사석장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1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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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 강화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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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은 국방에도 깊은 관심을 보이며 산성 수축에 힘을 다하였다. 사명대사가 수축한 산성은 [[팔공산성|팔공산성(八公山城)]]·[[금오산성|금오산성(金烏山城)]]·[[용기산성|용기산성(龍起山城)]]·[[악견산성|악견산성(岳堅山城)]]·[[이숭산성|이숭산성(李崇山城)]]·[[부산성|부산성(釜山城)]] 및 [[남한산성]] 등이다. 그리고 군기 제조에도 힘을 기울여 [[합천 해인사|해인사]] 부근의 야로에서 활촉 등의 무기를 만들었고, 투항한 왜군 조총병을 비변사에 인도하여 화약 제조법과 조총 사용법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1594년([[조선 선조|선조]] 27) 의령에 주둔하였을 때 군량을 모으기 위하여 각 사찰의 전답에 봄보리를 심도록 하고, 산성 주위를 개간하여 [[정유재란]]이 끝날 때까지 군량미 4,000여 석을 갖추도록 하였다. [[조선 선조|선조]]는 사명대사의 공로를 크게 인정하여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의 벼슬을 내렸다.<ref>손경희, "[http://gimcheon.grandculture.net/Contents?local=gimcheon&dataType=01&contents_id=GC03200875 사명대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디지털김천문화대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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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임금께서 스님을 궁중으로 초빙하여 자세하게 平生에 대한 일을 묻고는 下敎하여 이르되, “옛날 元나라의 劉秉忠과 明나라의 姚廣孝는 모두 山人인 스님의 신분이었으나, 나라에 큰 功勳을 세웠으므로 그 이름이 後世에까지 널리 流布되었습니다. 지금 國勢가 이와 같이 어려운 형편이니 스님이 만약 下山하여 머리를 기른다면 마땅히 百里의 食邑을 주는 한편 三軍의 統帥權을 드리겠습니다.”라고 하였으나, 스님은 감히 굳게 사양하고 물러났다. 宣祖가 무기고에 보관된鎧仗을 스님께 주었으므로 스님은 嶺南으로 돌아와서 남아 있는 倭賊을抄擊하고, 龍起·八公·金烏 등 여러 山城을 높고 굳게 쌓고, 그 山城의 要所마다 鎭地를 구축하고는 각각 藩鎭을 修飾하여 마친 후,印綏와 戰馬를 왕에게 되돌려 보내고 尺籍을 정리하여 備邊司에 보내고는 장서를 올려 한가롭게 수도할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요청하였으나, 朝廷에서는 간곡히 만류하고 許諾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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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酉年 겨울 明나라에서 원군으로 온 提督 麻貴를 따라島山 陣地에 들어갔고, 戊戌年에는 또 提督 劉挺을 따라 曳橋 陣地에 들어가서 모두 큰 공을 세웠는데, 前後에 걸쳐 軍粮을 준비하여 먹인 것이 무려 4천여 섬이고, 武器와 갑옷의 수도 한량이 없었다. 임금께서 크게 嘉賞하게 여기시고 종2품 嘉善大夫로 特進하고 同知中樞府事를 제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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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丑年에 釜山城을 수축하고는內隱山으로 돌아갔으며, 癸卯年에는 王命을 받고 서울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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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이지관, "합천 해인사 사명대사석장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124-1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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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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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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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이 끝난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정권이 조선 정부에 강화를 청해오자, 유정은 1604년 8월 탐적사(探賊使)로 쓰시마섬에 파견되었다. 유정은 강화 사승(使僧: 사신의 임무를 띤 승려)의 신분으로 그해 12월 교토에 들어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본법사(本法寺)에서 회견했다. 회견의 성과로 1605년 4월 일본에 연행된 피로인(被擄人) 1,300여 명(혹은 3,000여 명)을 데리고 귀국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 공로로 유정은 종2품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유정의 이러한 외교적 성과로 조선과 일본 도쿠가와 정권과의 우호 관계는 급속도로 진전을 보게 되었고, [[임진왜란]] 후 일본에 첫 [[조선통신사]]를 파견하는 중요한 계기가 마련되었다.<ref>윤기엽, "[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3130 사승(使僧)]",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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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辰年 가을에는 國書를 받들고 日本으로 건너갔다. 그 때 모든 倭人들이 서로 “이 스님이 머리가 보배라는 얘기를 한 和尙이냐”면서 수군거렸다.對馬島에서부터 서울인大阪에 이르니 모든 總帥들이 함께 信受를 約束하고는 마치 麈尾를 따르듯 隨從하여 스님의 가르침을 받기를 원하였다. 스님이 자상하게 일러주니 모두 頂禮하고 生佛이라고 칭송하였다. 이어 德川家康을 만나서 구체적으로 “지금 兩國 백성이 도탄에 빠진지 이미 오래되었으므로 내가 이들을 救濟하기 위하여 왔다.”라고 말하였다. 家康도 또한 佛 敎를 믿는 信者였으므로 스님의 말씀을 듣고 信心을 發하여 마치 부처님과 같이 공경하였다. 순조롭게 講和를 성취시키고 歸國하는 길에 男女 포로 1천 5백 명을 인수받아 스스로 양식을 구하여 먹이면서 바다를 건너 돌아왔다. 乙巳年에 임금께 復命하였다. 왕은 크게 가상하게 여겨 그 功勞를 위로하고嘉義大夫의 官階를 더해주고 御馬와 紵絲를 하사하여 포창하고 장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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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이지관, "합천 해인사 사명대사석장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127-1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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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 이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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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5년 당시 조정에서는 전쟁에 불탄 사고(史庫)의 설치 문제로 고심하고 있었는데, 유정이 귀국하자 그에게 오대산 사고의 설치를 상의하였다. 유정은 곧장 오대산으로 들어갔다가 10월 하순에 묘향산 [[향산 보현사|보현사]]로 가서 [[휴정]]의 영탑전에 절하였다. 1606년 봄에는 [[조선 선조|선조]]의 부름을 받고 상경하여 삼청동에 초가를 지어 기거하면서 궁궐 공사를 감독하였다. 5월에는 법형제들과 의논하여 금강산 [[고성 유점사|유점사]]에 [[휴정]]의 사리탑을 세우는데, 대사는 공사에 매달려 있어 주지 태희(太熙)에게 「등계의 탑을 세우며 올린 축문(登階建塔祝文)」을 지어 보냈다. 윤6월에는 궁궐 역사의 공로로 정2품 형조판서겸지의금부사(刑曹判書兼知義禁府事)에 올랐다. 1608년 [[조선 선조|선조]]가 승하하자 서울로 올라와 배곡하니, 이로 인하여 병히 심해져 [[합천 해인사|해인사]]로 내려갔다.<ref>사명 유정 지음, 이상현 옮김, 『사명당대사집』, 동국대학교출판부, 2014, 17-18쪽.</ref>
[[경상남도]] [[밀양시|밀양]]에서 임수성(任守成)아들로 태어났다.<ref name="인물정보" /> 일찍 부모를 여읜 사명당은 13세에 황여헌(黃汝獻)을 사사(師事)하다가 황악산 [[직지사]]에 들어가 신묵화상(信默和尙)에게 선(禪)을 받아 승려가 되었고, 거기에서 불교의 오의(奧義)를 깨달았다. [[1561년]](명종 16) 선과(禪科)에 급제하고 당시의 학자·대부·시인들이었던 박사암(朴思菴)·허하곡(許荷谷)·임백호(林白湖) 등과 교제하였다. [[1575년]](선조 8) 선종(禪宗)의 주지로 추대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에 들어가 청허(淸虛)대사([[서산대사]])에게서 성종(成宗)을 강의 받고 크게 각성하였다. 금강산 보덕사(報德寺)에서 3년을 지내고, 다시 팔공산·청량산·태백산 등을 유람했으며, 43세 때 옥천산(沃川山) 상동암(上東菴)에서 하룻밤 소나기에 뜰에 떨어진 꽃을 보고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고 문도들을 해산시킨 다음 오랫동안 참선하였으며, 46세에 오대산 영감란야(靈鑑蘭若)에 있다가 역옥에 죄 없이 걸렸으나 무죄 석방되어 금강산에서 3년 동안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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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는 이미 淸虛스님이 入寂한 후였으므로 스님은 곧 그 길로 妙香山으로 가서 淸虛의 영정과 사리탑에 예배하고 普賢寺에서 守制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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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午年 봄에는營繕軍을 거느리고 法宮의 役事에 나아가 三淸洞에 茅屋을 짓고 거주하였다. 丁未年 가을 允許를 받고 雉岳山으로 돌아갔다. 戊申年 宣祖大王이 승하하였다는 諱音을 듣고 서울로 올라가 拜哭한 후 병이 생겨 매우 고통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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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임금(光海君)께서 스님으로 하여금 西道의 邊方으로 가서 胡侵을 방비하게 하려고 하였다. 스님은 받아들이지 않고 伽耶山 해인사로 들어가 병을 치료하면서 요양하였는데, 광해군이 여러 차례 御藥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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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이지관, "합천 해인사 사명대사석장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128-1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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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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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적===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집하여 [[순안군|순안]]에 가서 청허의 휘하에 활약하였고 청허가 늙어서 물러난 뒤 승군(僧軍)을 통솔하고 체찰사 [[류성룡]]을 따라 [[명나라]] 장수들과 협력하여 [[평양]]을 회복하고 도원수 [[권율]]과 함께 경상도 [[의령군|의령]]에 내려가 전공을 많이 세워 당상(堂上)에 올랐다. [[1594년]]에 명나라 총병(摠兵) [[유정 (명나라)|유정]](劉綎)과 의논하고 왜장 [[가토 기요마사]]를 [[울산광역시|울산]] 진중으로 세 번 방문하여 일본군의 동정을 살폈다. 왕의 퇴속(退俗) 권유를 거부하고, 영남에 내려가 팔공(八公)·용기(龍起)·금오(金烏) 등의 산성을 쌓고 양식과 무기를 저축한 인신(印信)과 전마(戰馬)를 바치고 산으로 돌아가기를 청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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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은 1610년 8월 26일 설법하고 결가부좌한 채 입적하였다. 광해군은 전교를 내려 조상하고 장례에 쓸 물목을 지급하게 하였다. 같은 해 11월 [[합천 해인사|해인사]] 서쪽 기슭에서 화장하였으며, 1612년([[조선 광해군|광해군]] 4)에 비가 건립되었다. 밀양의 [[밀양 표충사|표충사(表忠祠)]], 묘향산의 [[향산 수충사|수충사(酬忠祠)]], 공주시 계룡면의 [[갑사 표충원|표충원(表忠院)]] 등에 제향되었다.<ref>정제규, "[http://jecheon.grandculture.net/Contents?local=jecheon&dataType=01&contents_id=GC03300770 유정]", <html><online style="color:purple">『디지털제천문화대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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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戌年 가을에 왕이 크게 염려하여 스님을 서울로 모시고 와서치료를 받게 하려고方伯으로 하여금 火急히 보내게 하였다. 그 해 8월 26일 스님은 문도와 많은 大衆을 모아놓고 말씀하시기를 “四大肉身은 본시 假合한 것이다. 나는 머지 않아 眞如의 世界로 돌아가려 하거늘, 어찌 屑屑하게 왔다 갔다하면서 허망한 몸뚱이를 괴롭힐 必要가 있겠는가! 나는 곧 入滅하여大化를 따를 것이다.”라 하고는 드디어 跏趺坐를 맺고 단정히 앉아 조용히 入寂하였다. 11월 20일에 문도들이 스님의 法軀를 모시고 해인사의 서쪽 산 기슭에서 화장하니 祥瑞로운 광명이 하늘을 찔렀고, 날아가던 새들도 슬피 울었다. 화장이 끝난 , 位牌를 모시고 갔던 侍輦의 앞 부분에서 頂珠 一顆를 얻어 石鐘을 다듬어 安藏하고 窣堵坡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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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이지관, "합천 해인사 사명대사석장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129-1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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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년]] 정유재란 때 명나라 장수 [[마귀 (명나라)|마귀]]를 따라 [[울산왜성]]에 쳐들어갔으며, 이듬해 명나라 장수 유정을 따라 [[순천왜성]]에 이르러 공을 세워 가선동지중추부사(架善同知中樞府事)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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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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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에 『[[사명당대사집|사명당대사집(泗溟堂大師集)]]』, 『[[분충서난록|분충서난록(奮忠紓難錄)]]』 등이 있다. 『[[사명당대사집]]』은 7권 1책으로 1612년(광해군 4) 제자 혜구(惠球) 등이 유정의 유문을 처음 수집·간행한 후 1652년(효종 3) 공봉산인(公峰山人) 성일(性一) 등이 간행하였다. 시(詩), 문(文) 등 10여 편이 수록되어 있다. 『[[분충서난록]]』은 2권 1책으로 유정의 일기와 상소문(上疏文), 기타 사적이 수록되어 있다. [[이의현]]의 「표충사송운영당비명(表忠詞松雲影堂碑銘)」과 왜장 [[가토 기요마사]]의 진중을 정탐한 기록인 「진중탐정기(陣中探偵記)」, 명나라 장수 [[유정(중국)|유정(劉綎)]]을 찾아가 회담한 기록, 적을 토벌할 방책에 대한 상소(上疏), [[조선 선조|선조]]의 전교(傳敎) 및 [[유정(중국)|유정(劉綎)]]의 서첩 등이 수록되어 있다.<ref>정제규, "[http://jecheon.grandculture.net/Contents?local=jecheon&dataType=01&contents_id=GC03300770 유정]", <html><online style="color:purple">『디지털제천문화대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임진왜란 이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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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과 관련된 문화유산===
[[1604년]](선조 37) 국서를 받들고 일본에 가서 교토 [[후시미 성]]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 강화를 맺고 포로가 되어 갔던 사람 3천 5백 명을 데리고 이듬해 돌아와 가의(嘉義)의 직위와 어마(御馬) 등을 하사받았다. 그때는 청허가 입적한 이듬해로 묘향산에 들어가서 스승의 영탑에 애하고 [[치악산]]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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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표충사|밀양 표충사(表忠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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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표충사|해남 표충사(表忠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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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산 수충사|향산 수충사(酬忠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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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사 표충원|갑사 표충원(表忠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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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 해인사 홍제암 사명대사탑|합천 해인사 홍제암 사명대사탑(陜川 海印寺 弘濟庵 四溟大師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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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 해인사 홍제암 사명대사탑비|합천 해인사 홍제암 사명대사탑비(陜川 海印寺 弘濟庵 四溟大師塔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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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표충비|밀양 표충비(表忠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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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당유정비|묘향산 수충사 사명당유정비(四溟堂惟政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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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 해인사 홍제암|합천 해인사 홍제암(陜川 海印寺 弘濟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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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대사생가지|사명대사생가지(四溟大師生家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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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대사의 금란가사와 장삼|사명대사의 금란가사와 장삼(泗溟大師의 金襴袈裟와 長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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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대사일본상륙행렬도팔곡병|사명대사일본상륙행렬도팔곡병(四溟大師日本上陸行列圖八曲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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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국대장사령깃발|양국대장사령깃발(兩國大將司令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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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대성사 소장 금동여래좌상|포항 대성사 소장 금동여래좌상(浦項 大聖寺 所藏 金銅如來坐像)]]
  
선조의 부보를 듣고 한양으로 달려와 배곡한 후 [[광해군]]의 서변을 지키게 하려 하였으나 병을 얻어 응하지 못하고 [[가야산]]에 들어가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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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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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대사 유정 지식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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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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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ript>function reload() {window.location.reload();} </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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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put type="button" value="Graph" onclick="relo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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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rame width="100%" height="740px" src="http://dh.aks.ac.kr/Encyves/Graph/D031/monk_samyeong2.htm"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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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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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dh.aks.ac.kr/Encyves/Graph/D031/monk_samyeong.htm 유정, 휴정, 영규가 제향된 사당 및 사찰 지식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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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dh.aks.ac.kr/Encyves/Graph/D100/Ilseon-Yujeong.htm 사명대사 유정과 정관 일선 지식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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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dh.aks.ac.kr/Encyves/Graph/C036/C036.htm "승군을 지휘하는 휴정(서산대사)"(박광진) 지식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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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dh.aks.ac.kr/Encyves/Graph/C035/C035.htm '''"설법으로 왜장을 감동시킨 사명당(송운대사)"(박서보) 지식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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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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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wikitable sortable" style="background:white; text-align: center; width: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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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yle="width:30%"|항목A!!style="width:30%"|항목B!!style="width:25%"|관계!!style="width:15%"|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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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합천 해인사 홍제암 사명대사탑]] || [[유정]] || A는 B를 위한 승탑이다 || A ekc:isStupaOf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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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합천 해인사 홍제암 사명대사탑비]] || [[유정]] || A는 B를 위한 비이다 || A ekc:isSteleOf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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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수성]] || [[유정]] || A는 B의 아버지이다 || A ekc:hasSon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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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여헌]] || [[유정]] || A는 B의 스승이다 || A ekc:hasDisciple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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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묵]] || [[유정]] || A는 B의 스승이다 || A ekc:hasDisciple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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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정]] || [[유정]] || A는 B의 스승이다 || A ekc:hasDisciple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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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정]] || [[노수신]] || A는 B와 교유하였다 || A foaf:knows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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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정]] || [[가토 기요마사]] || A는 B와 대립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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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정]] || [[조선 선조]]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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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정]] || [[도쿠가와 이에야스]]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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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정]] || [[평양 부벽루]] || A는 B를 방문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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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정]] || [[사천 곤양성]] || A는 B를 방문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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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정]] || [[하동 악양루]] || A는 B를 방문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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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정]] || [[기축옥사]]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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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정]] || [[임진왜란]]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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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정]] || [[4차 평양전투]]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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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정]] || [[조선통신사]]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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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정]] || [[삼척 영은사]]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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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정]] || [[김천 직지사]] || A는 B에서 출가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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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정]] || [[김천 직지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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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정]] || [[서울 봉은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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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정]] || [[금강 표훈사 보덕암]]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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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정]] || [[고성 유점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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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정]] || [[합천 해인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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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 동화사]] || [[유정]] || A는 B가 중창하였다 || A ekc:renovator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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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정]] || [[향산 보현사]]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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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충서난록]] || [[유정]] || A는 B가 저술하였다 || A dcterms:creator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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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은 법주사]] || [[유정]] || A는 B가 중건하였다 || A ekc:renovator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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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명대사의 금란가사와 장삼]] || [[유정]]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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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명대사일본상륙행렬도팔곡병]] || [[유정]]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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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국대장사령깃발]] || [[유정]]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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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양 표충사]] || [[유정]]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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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명당대사집]] || [[유정]] || A는 B가 저술하였다 || A dcterms:creator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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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선]] || [[유정]] || A는 B와 교유하였다 || A foaf:knows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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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사 표충원]] || [[유정]]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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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항 대성사 소장 금동여래좌상]] || [[유정]]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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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산 수충사]] || [[유정]]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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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남 표충사]] || [[유정]]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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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정 진영(압곡사)]] || [[유정]] || A는 B를 묘사하였다 || A ekc:depicts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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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정 진영(월정사)]] || [[유정]] || A는 B를 묘사하였다 || A ekc:depicts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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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서보-설법으로 왜장을 감동시킨 사명당(송운대사)]] || [[유정]] || A는 B를 소재로 삼았다 || A ekc:depicts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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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활동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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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정보===
김정호는 국토정보를 효율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지도와 지리지를 동시에 이용해야 한다는 점을 「청구도 범례(靑邱圖凡例)」등 여러 곳에서 언급하였다. 또한 그는 지도의 제작과 지리지의 편찬에서 정확성에도 초점을 맞추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 것은 이용의 편리에 대한 고민이다. 이와 같은 두 가지 관점에서 김정호의 업적을 시대별로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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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wikitable" style="background:white; width: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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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yle="width:20%"|시간정보!!style="width:80%"|내용
1834년(순조 34) 이전부터 [[신증동국여지승람|『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 시문(詩文)·인물 등을 제외한 내용을 큰 글씨로 적고 다른 자료를 참고하여 여백이나 첨지에 깨알 같은 글씨로 교정·첨가한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동여편고(東輿便攷)』 2책(1책 결본)을 편찬하였다. 1834년(순조 34)에는 [[청구도|『청구도』]] 2책을 편찬하였고, 이어 1840년(헌종 6)대 후반까지 3차에 걸쳐 개정판 [[청구도|『청구도』]]를 제작하였다. 기본 정보의 차원에서 [[청구도|『청구도』]]는 [[해동여지도|『해동여지도』]]의 내용을 그대로 따랐지만 이용의 편리라는 측면에서 혁신적인 변화를 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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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44년 10월 17일 || [[유정]] 출생
김정호는 1834년(순조 34) 경부터 영남대학교 도서관 소장 [[동여도지|『동여도지』]]의 편찬을 시작하여 1844년(헌종 10)경에 완성하며, 이후 지속적인 교정과 첨가를 하다가 1861년(철종 12)에 서문을 작성하여 수록한다. 이어 1850년(철종 1) 전후로 대축척 고을지도와 지지가 결합된 지리지인 대영도서관 소장 [[동여도지|『동여도지』]] 3책(경기·강원·황해)을 편찬하기 시작하였지만 완성을 보지 못하고 포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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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61년 || [[유정]]은 선과에 응시하여 장원급제하였다.
이 때부터 김정호는 지도와 지지가 결합된 [[청구도|『청구도』]]의 형식을 포기하고 순수하게 지도적 속성이 강한 지도첩의 제작을 시작하였다. 표지에는 『동여(東輿)』라고 기록되어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필사본의 [[대동여지도|『대동여지도』]] 14첩이 그러한 노력의 첫 번째 결실이다. 이 지도첩에서 김정호는 [[청구도|『청구도』]]에 첨가된 통계와 지지 정보를 대폭 삭제하고 기호의 사용을 정교화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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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73년 || [[유정]][[김천 직지사]] 주지로 있으면서 [[보우(조선)]]의 문집과 잡저의 간행에 발문을 쓰고 교정을 보았다.
대신 1853년(철종 4)에서 1856년(철종 7) 사이에 대축척 고을지도를 생략한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여도비지|『여도비지(輿圖備志)』]] 20책을 [[최성환|최성환(崔瑆煥)]]과 함께 편찬하였고, 비슷한 시기에 기본 정보가 [[청구도|『청구도』]]와 상당히 달라진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필사본의 [[대동여지도|『대동여지도』]] 18첩을 제작하였다. 이어 1856년(철종 7)에서 1859년(철종 10) 사이에는 기본 내용을 완전히 개정한 필사본의 [[동여도|『동여도』]] 23첩을, 1861년(철종 12)에 목판본의 [[대동여지도|『대동여지도』]] 22첩을 제작하였다. 또한 1864년(고종 1)에 목판본의 [[대동여지도|『대동여지도』]] 22첩을 교정하여 재간하였으며, 1861년(철종 12)부터 1866년(고종 3)경까지 [[대동지지|『대동지지』]] 32권 15책을 편찬하다 미완으로 남기고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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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74년 || [[유정]][[서울 봉은사]]의 주지로 천거되었으나 사양하고, [[향산 보현사]] [[휴정]]의 문하로 들어갔다.  
김정호는 이외에도 보급용의 중형 낱장본 지도로 1834년(순조 34)에 [[최한기]]의 부탁을 받고 판각한 서양식 세계지도인 『지구전후도(地球前後圖)』, 1840년(헌종 6)대에는 한양 지도인 목판본의 『수선전도(首善全圖)』, 전통식과 서양식이 결합된 세계지도인 『여지전도(輿地全圖)』, 1860년(철종 11)대에는 목판본의 [[대동여지도|『대동여지도』]] 22첩이 너무 커서 한눈에 조선 전체를 보기 어려운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제작한 목판본의 『대동여지전도(大東輿地全圖)』를 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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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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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78년 || [[유정]][[휴정]]의 문하를 떠나 [[금강 표훈사|금강 표훈사 보덕암]]으로 들어갔다.
==='''김정호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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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호는 자신에 대한 글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그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글은 《지도유설》과 [[동여도지|《동여도지》]] 서문인데, 둘 다 김정호가 쓴 글이다. 다만 《지도유설》은 김정호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생각을 듣고 정리하여 쓴 글이며, [[동여도지|《동여도지》]]만 김정호의 사상을 나타낸 글이다. [[동여도지|《동여도지》]]에 나타난 김정호의 사상이나 역사지리 인식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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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79년 || [[유정]]은 『선가귀감(禪家龜鑑)』의 발문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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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호는 지도(地圖)와 지지(地誌)가 서로 불가분의 관계라고 인식하였다. 지도로써 천하의 형세를 살필 수 있고 지지로써 역대의 제도와 문물을 헤아려 볼 수 있으므로 지도와 지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위국(爲國) 곧 치국(治國)의 대경(大經)이라고 지도와 지지의 관계를 강조하였다.
+
| 1580년 || [[유정]]은 「부석사 안양루 중창기문(浮石寺安養樓重創記文) 」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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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와 지지가 위와 같이 중요함에도 단기(檀箕; [[단군]]과 [[기자 (고조선)|기자]]) 이래로 지도가 없고 지지는 [[삼국사기|《삼국사기》]]에 이르러 비로소 만들어졌기 때문에 지지의 첫머리에 [[신라]] 이전의 사항을 두어 알게 하였다. [[조선]]에 들어서는 초기에 [[동국여지승람|《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되어 비로소 도적(圖籍)이 환연해졌지만, 김정호가 사는 때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편찬된 지 3백여 년이 지나 지리 정보에 차이가 많아졌으므로 이를 바로잡으려고 [[동여도지|《동여도지》]]를 만들었다. 이에 따라 편목이나 구성이 [[동국여지승람|《동국여지승람》]]의 구성과 비슷하다.
+
| 1586년 || [[유정]]은  옥천(沃天)에서 무상(無常)의 법을 깨달았다.
 
+
|-
김정호는 또한 지도와 지지의 제작이 치국의 대경이라는 자신의 주장대로 치국경제에 유용하도록 [[동여도지|《동여도지》]] 등을 제작할 때 문교무비(文敎武備)에 해당하는 관방과 역참, 학교와 서원 등 42개 편목을 자세히 설명하거나 표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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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89년 || [[유정]]은 1589년에는 오대산 영감난야(靈鑑蘭若)에 머물면서 「월정사 법당의 서까래를 고치고 올린 글(月精寺法堂改椽錄)」을 지어 모금하며 사찰의 중수에 매달렸다.
 
+
|-
=='''저서(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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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92년 || [[유정]][[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성 유점사]]에 있으면서 인근 아홉 고을의 백성들을 구출하였다.  
===지도와 지리지===
+
|-
김정호가 편찬한 지도와 지리지는 다음과 같다.
+
| 1593년 || [[유정]]은 평양성 탈환의 혈전과 삼각산 노원평(蘆原坪) 및 우관동 전투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
|-
* 1834년(순조 34년) : 지지 [[동여도지|《동여도지》]] 제1차 편찬 / 지도 [[청구도|〈청구도〉]]
+
| 1594년 4월 13-4월 16일 || [[유정]][[가토 기요마사]]의 1차 회담.
* 1851년(철종 2년)부터 1856년(철종 7년) 사이 : 지지 [[여도비지|《여도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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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56년(철종 7년)부터 1861년(철종 12년) 사이 : 지도 [[동여도|〈동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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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94년 7월 12- 7월 16일 || [[유정]][[가토 기요마사]]의 2차 회담.
* 1861년(철종 12년) : 지도 [[대동여지도|〈대동여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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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6년(고종 3년) : 지지 [[대동지지|《대동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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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94년 12월 23일 || [[유정]][[가토 기요마사]]의 3차 회담.
* [[지구전후도|〈지구전후도(地球前後圖)〉]] : [[최한기]]가 펴냈으며, 김정호가 판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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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595년 || [[유정]]은 조정에「을미상소(乙未上疏)」를 올렸다.
위에서 [[청구도|〈청구도〉]]·[[동여도|〈동여도〉]]·[[대동여지도|〈대동여지도〉]]와 [[동여도지|《동여도지》]]·[[여도비지|《여도비지》]]·[[대동지지|《대동지지》]]를 ‘김정호의 3대 지도와 3대 지지’라고도 부른다.
 
 
 
* 《사명당대사집》
 
* 《분충서난록》
 
 
 
=='''상훈과 추모'''==
 
일제강점기인 1925년 10월 8일과 9일 2번에 걸친 『동아일보』의 '[https://ko.wikisource.org/wiki/%EA%B3%A0%EC%82%B0%EC%9E%90%EB%A5%BC_%ED%9A%8C%ED%95%A8 고산자를 회함]'이라는 칼럼에서 김정호와 [[대동여지도|『대동여지도』]]를 통해 민족적 우수성을 되짚어보려고 하였다. 여기에서 처음으로 전국답사설·백두산등정설·판목몰수설이 나타났는데, 그 목적은 다음과 같다.
 
 
 
첫째, 김정호가 국가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신이 직접 측량하여 [[대동여지도|『대동여지도』]]를 제작했다는 점을 부각시켜 1800년(순조 즉위) 초반에 에도막부[江戶幕府]의 도움을 받아 전국을 답사하면서 일본을 측량하여 지도를 제작한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352942&cid=58180&categoryId=58321 이노 다다타카(伊能忠敬)]보다 더 뛰어나다는 것을 내세우려 하였다.
 
 
 
둘째, 근대식 측량지도 못지않은 정확한 지도가 조선에도 [[대동여지도|『대동여지도』]]란 이름으로 제작되었음을 부각시켜 민족적 우수함을 설명함으로써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 백성에게 자긍심을 불어넣어 주려고 하였다.
 
 
 
셋째, 관에 의한 판목몰수설을 통해 조선의 멸망을 백성 전체의 문제가 아니라 집권층의 무능력 탓으로 돌리려 하였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서 편찬한 『조선어독본(朝鮮語讀本)』에 김정호의 전기가 처음으로 수록되었는데, 전국답사설·백두산등정설·판목몰수설은 『동아일보』의 「[https://ko.wikisource.org/wiki/%EA%B3%A0%EC%82%B0%EC%9E%90%EB%A5%BC_%ED%9A%8C%ED%95%A8 고산자를 회함]」에서 그대로 따왔다.
 
 
 
다만 첫째, 김정호와 [[대동여지도|『대동여지도』]]의 우수함을 부각시키려 비교의 대상으로 삼았던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352942&cid=58180&categoryId=58321 이노 다다타카(伊能忠敬)]와 그가 제작한 지도에 대한 이야기를 생략하였다. 둘째, 김정호가 어린 시절에 보았던 조선의 지도가 정확성에서 엉터리라는 이야기를 삽입시킴으로써 김정호 이전 조선의 지도 제작 능력을 폄하시켰다. 셋째, [[흥선대원군]]이란 구체적인 인물을 등장시켜 개항기 조선 정부의 무능력을 부각시킴으로써 조선이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편입된 것을 정당화시키려 하였다. 넷째, 조선 정부의 무능력을 더욱 부각시키기 위해 김정호 부녀의 옥사설을 추가하였다.
 
 
 
판목소각설은 『동아일보』의 기사나 『조선어독본』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 이야기로, 후대의 다른 자료에서 첨가된 것이다. 이와 같은 김정호의 전기는 1980년대까지도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으며, 1990년대부터 전국답사설·백두산등정설·옥사설·판목소각설이 모두 잘못된 이야기라는 새로운 연구가 나타나 점점 교정되기 시작했다.
 
 
 
김정호와 [[대동여지도|『대동여지도』]]에 관한 네 가지 설은 첫째, 전통시대에 필요한 거리 정보의 종류와 그것에 기초를 둔 지도의 제작 과정을 모르는 비전문가가 만들었기 때문에, 둘째, 김정호 이전에도 상당한 수준에 있었던 조선의 지도와 지리지 제작의 변천사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셋째, 김정호가 국토정보의 체계적 이해를 위해 평생에 걸쳐 지속적으로 지도와 지리지를 제작했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넷째, 김정호가 지도의 정확성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맞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 것이 이용의 편리였다는 점을 몰랐기 때문에 만들어진 잘못된 주장이다.
 
 
 
=='''관련 기록'''==
 
*[[최한기]]가 쓴 [[청구도|〈청구도〉]] 제문(題文)을 보면, 김정호는 동관(童冠)나이 때부터 지도와 지지에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동관'은 18세나 19세로 추정한다.
 
나의 벗 김정호는 소년 시절부터 지리학에 뜻을 두고 오랜 세월 동안 지도와 지리지를 수집하여 여러 지도의 도법을 상호비교해서 [[청구도|<청구도>]]를 만들었다.(金友正浩 年自'''童冠''' 深留意圖志...)
 
 
 
*[[유재건]]의 [[이향견문록|「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 중 김정호전
 
김정호는 재주가 많아 그림도 잘 그리고 조각도 잘 했는데 특히 지리학에 깊이 빠져 지도와 지리지를 깊이 고찰하고 널리 수집하여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다
 
 
 
*[[신헌]][[대동방여도| <대동방여도>]] 서문
 
나(신헌)는 일찍이 우리나라 지도에 뜻을 두고 비변사와 규장각에 소장된 것, 오래된 집안에 좀먹다 남은 것들을 널리 수집하여 증정하고, 여러 본들을 서로 참고하고, 여러 책들에 근거하여 합쳐서 편집하였다. 이리하여 김군백원(金君百源)에게 물어 그것을 맡겨 만들게 하였다. 가리켜 증명하고 입으로 전해주기를 수십 년이나 하여 비로소 한 부가 만들어졌는데 모두 23권이다.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
 
근자에 김정호라는 사람이 [[대동여지도]] 20권을 지었는데… 잠시 보았을 뿐인데도 환히 알 수 있게 되어 매우 편리하다. 그 착상이 선인들에 비하여 분명히 우수하고, 그 정밀함은 이만저만하지 않다. … 그의 지도와 지지는 꼭 세상에 전해져야 할 것이다.
 
 
 
=='''평가'''==
 
[[초서]]를 잘 썼으며 밀양의 [[표충사 (밀양시)|표충사]], 묘향산의 수충사(酬忠祠)에 배향되었다.<ref>{{지만지|제목=사명당집 |주소=http://zmanz.blogi.kr/entry/0065}}</ref> 해인사에 홍제존자비(弘濟尊者碑)가 있다. 승려의 몸으로 국가의 위기에 몸소 뛰쳐나와 의승(義僧)을 이끌고 전공을 세웠으며 전후의 대일 강화(외교) 등 눈부신 활약은 후세 국민이 민족의식을 발현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기타==
 
===민족기록화와의 연관성===
 
[[박서보]]의 1979년 민족기록화 작품 [[박서보-설법으로 왜장을 감동시킨 사명당(송운대사)]]의 중심 소재로 등장한다.<br/>
 
 
 
=='''노드 및 관계'''==
 
{| class="wikitable"
 
! 노드 || 관계 || 클래스||노드 || 설명
 
 
|-
 
|-
||[[김정호]]||isTheSubjectOf ||민족기록화||[[김태-김정호의 대동여지도]] || [[김태-김정호의 대동여지도]][[김정호]]를 소재로 그려진 민족기록화이다.
+
| 1597년 3월 18일 || [[유정]][[가토 기요마사]]의 4차 회담.
 
|-
 
|-
|[[김정호]]|| creates||기록||[[대동여지도]] || [[대동여지도]]는 [[김정호]]에 의해 제작된 기록이다.
+
| 1604년 8월 || [[유정]]은 탐적사(探賊使)로 쓰시마섬에 파견되었다.
 
|-
 
|-
|[[김정호]]||isMentionedIn||기록||[[이향견문록]] || [[이향견문록]]은 [[김정호]]가 언급된 기록이다.  
+
| 1604년 12월 || [[유정]]은 교토에 들어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본법사(本法寺)에서 회견했다.
 
|-
 
|-
|[[김정호]]||isMentionedIn||기록||[[청구도제]] || [[청구도제]]는 [[김정호]]가 언급된 기록이다.
+
| 1605년 4월 || [[유정]]은 일본에 연행된 피로인(被擄人) 1,300여 명(혹은 3,000여 명)을 데리고 귀국하였다.
 
|-
 
|-
|[[김정호]]||isMentionedIn||기록||[[금당초고]] || [[금당초고]]는 [[김정호]]가 언급된 기록이다.
+
| 1605년 10월 || [[유정]][[향산 보현사]]로 가서 [[휴정]]의 영탑전에 절하였다.
|-
 
|[[김정호]]||creates||기록||[[청구도]] || [[청구도]][[김정호]]에 의해 제작된 기록이다.
 
 
|-
 
|-
|[[김정호]]||isMentionedIn||기록||[[오주연문장전상고]] || [[오주연문장전상고]]는 [[김정호]]가 언급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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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06년 || [[유정]][[조선 선조|선조]]의 부름을 받고 상경하여 삼청동에 초가를 지어 기거하면서 궁궐 공사를 감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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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hasFriendshipWith||인물||[[최한기]] || [[최한기]][[김정호]]와 친분관계가 있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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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08년 || [[유정]][[조선 선조|선조]]가 승하하자 서울로 올라와 배곡하니, 이로 인하여 병히 심해져 [[합천 해인사]]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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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hasFriendshipWith||인물||[[김정희]] || [[김정희]]는 [[김정호]]와 친분관계가 있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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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10년 8월 26일 || [[유정]]은 설법하고 결가부좌한 채 입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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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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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대동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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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지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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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llery mode=packed heights=200px>
*95016 김정호 - 김정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소행성의 이름에 김정호를 따서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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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BHST_Buseoksa_Josadang_Yujeong.jpg|[[영주 부석사 조사당]] 내 유정 진영
*고산자로 - 서울특별시 성동구 행당동의 옛 청량리 부근. 김정호의 호를 따서 지었다.
+
파일:역사인물초상화_초상_유정 진영(동화사).jpg|[[유정 진영(동화사)]]<ref>"[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2,15050000,22&flag=Y 대구 동화사 사명당 유정 진영]", 문화재검색,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재청』<sup>online</sup></online></html>.</ref>
*[https://ko.wikipedia.org/wiki/%EA%B3%A0%EC%82%B0%EC%9E%90,_%EB%8C%80%EB%8F%99%EC%97%AC%EC%A7%80%EB%8F%84 《고산자, 대동여지도》] - 영화, 2016.09.07 개봉, 감독:강우석, 출연:차승원, 유준상
+
파일:역사인물초상화_초상_유정 진영(대곡사).jpg|[[유정 진영(대곡사)]]<ref>"[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21,04270000,37&flag=Y 의성 대곡사 삼화상 · 조사진영]", 문화재검색,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재청』<sup>online</sup></online></html>.</ref>
== 관련 작품 ==
+
파일:역사인물초상화_초상_유정 진영(월정사).jpg|[[유정 진영(월정사)]]<ref>"[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2&VdkVgwKey=21,01410000,32 영은사사명당대선사진영]", 문화재검색,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재청』<sup>online</sup></online></html>.</ref>
=== 드라마 ===
+
파일:역사인물초상화_초상_유정 진영(압곡사).jpg|[[유정 진영(압곡사)]]<ref>"[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2&VdkVgwKey=31,02390000,37 압곡사선사영정]", 문화재검색,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재청』<sup>online</sup></online></html>.</ref>
* 《[[징비록 (드라마)|징비록]]》 - ([[KBS1]], [[2015년]] , 배우:[[박병호]])
+
파일:박서보-왜장감화(사명당)-1976s.jpg|1592년 [[박서보-설법으로 왜장을 감동시킨 사명당(송운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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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llery>
== 관련 문화재 ==
 
* [[합천 해인사 홍제암 사명대사탑 및 석장비]] - 보물 제1301호 (2000년 9월 28일 지정)
 
* [[대구 동화사 사명당 유정 진영]] - 보물 제1505호 (2006년 12월 29일 지정)
 
* [[사명대사의 금란가사와 장삼]] - 중요민속문화재 제29호 (1973년 7월 16일 지정)
 
* [[사명대사일본상륙행렬도팔곡병]] - 경상남도 시도유형문화재 제274호 (1990년 1월 16일 지정)
 
* [[사명대사생가지]] - 경상남도 시도기념물 제116호 (1992년 10월 21일 지정)
 
 
 
* [[사명당기념사업회]]
 
  
 +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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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참고문헌'''==
 
=='''참고문헌'''==
*[https://namu.wiki/w/%EC%82%AC%EB%AA%85%EB%8B%B9?from=%EC%82%AC%EB%AA%85%EB%8C%80%EC%82%AC 나무위키 "유정"]
+
*사명 유정 지음, 이상현 옮김, 『사명당대사집』, 동국대학교출판부, 2014.
*[https://ko.wikipedia.org/wiki/%EC%9C%A0%EC%A0%95_(1544%EB%85%84) 위키백과 "유정"]
+
*신유한 지음, 이상현 옮김, 『송운대사분충서난록』, 동국대학교출판부, 2015.
 
+
*이지관, "합천 해인사 사명대사석장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102-137쪽.  
 
+
*"[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1715 해인사사명대사석장비]", 금석문 세부정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sup>online</sup></online></html>, 국립문화재연구소.
 
+
*양혜원,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60 유정(사명대사) (惟政)]",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
**2차 자료: 이상태, 『한국 고지도 발달사』, 혜안, 1999년, 185~242쪽.
+
*목정배,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1805 유정]",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준섭, 『조선인물실록 1』, 도서출판 자작나무, 1996년. 中 8장 「대동여지도의 김정호는 옥사하지 않았다」
+
*손경희, "[http://gimcheon.grandculture.net/Contents?local=gimcheon&dataType=01&contents_id=GC03200875 사명대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디지털김천문화대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
*정제규, "[http://jecheon.grandculture.net/Contents?local=jecheon&dataType=01&contents_id=GC03300770 유정]", <html><online style="color:purple">『디지털제천문화대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14 - 경남』, 돌베개, 2002.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56765&cid=42840&categoryId=42844 사명대사 유정]",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1805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유정"]
 
 
 
 
 
 
 
**2차 자료: 이기봉, 『조선 고지도 여행 (I)·(II)』, 새문사, 2011년.
 
**이기봉, 『평민 김정호의 꿈』 새문사, 2010년
 
**국토해양부 국립지리정보원, 『지도 발달사』 2009년.
 
**오상학, 『옛 삶터의 모습 고지도』 국립중앙박물관, 2005년.
 
**대한측량협회, 『고산자 김정호 관련 측량 및 지도 사료 연구』, 2003년.
 
** 이상태, 『한국의 고지도 발달사』, 혜안, 1999년.
 
**이기봉, 「『청구도』이본 4개 유형의 지도적 특징과 변화에 대한 연구」, 『한국고지도연구』1(2), 2010년.
 
**이기봉,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동여』와 『청구도』의 관계에 대한 비판적 재검토」, 『한국지역지리학회지』14(3), 2008년.
 
**장진숙,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필사본 『대동여지도』연구」 부산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8년.
 
**배우성, 「대동여지도 연구의 쟁점과 과제」, 『한국과학사학회지』, 28(1), 2007년.
 
**이기봉, 「김정호의 『동여도』제작 시기에 대한 일고찰」, 『문화역사지리』17(3), 2005년.
 
**오상학, 「고산자 김정호의 지도제작과 그 의의」, 『고산자 기념사업 연구 용역 논문집』, 2001년.
 
**양보경, 「고산자 김정호의 지리지 편찬과 그 의의」, 『고산자 기념사업 연구 용역 논문집』, 2001년.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content_id=cp023300070001 한국문화콘텐츠닷컴 "김정호의 생애"]
 
**2차 자료: 이상태, 『한국의 고지도 발달사』, 혜안, 1999년.
 
*[https://ko.wikisource.org/wiki/%EA%B3%A0%EC%82%B0%EC%9E%90%EB%A5%BC_%ED%9A%8C%ED%95%A8 고산자를 회함]
 
**2차 자료: 최남선, "고산자를 懷함", 1925년 8월 9일 및 10일자 『동아일보』 칼럼.  
 
*유재건,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4400848 이향견문록], 글항아리, 2008년.
 
 
 
=='''각주'''==
 
<references/>
 
 
 
=='''추가자료'''==
 
*정명목 서용선 진행, 「작가와의 대담」, 『김태, 1952–1972』,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1996.
 
*[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SS2D&office_id=143&article_id=0000040057&section_id=103&section_id2=245&menu_id=103 "김정호, 20년 동안 골방에서 대동여지도 만들었다"] - 김정호의 전국답사설을 비판하는 기사.
 
  
[[분류:인물]][[분류:민족기록화]][[분류:박서보-설법으로 왜장을 감동시킨 사명당(송운대사)]][[분류:역사인물]][[분류:조선]][[분류:승려]][[분류:고승]][[분류: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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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탑비문 Top ic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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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불교 사찰의 승탑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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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승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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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역사인물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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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역사인물]]

2017년 11월 27일 (월) 08:21 기준 최신판


유정(惟政)
영주 부석사 조사당 내 유정 진영
대표명칭 유정
한자 惟政
생몰년 1544년(중종 39)-1610년(광해군 2)
시호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
사명당(四溟堂), 사명(四溟), 송운(松雲)
법명 유정(惟政)
이환(離幻)
이칭 종봉(鍾峯)
성씨 임씨
본관 풍천(豊川)
속명 임응규(任應奎)
출신지 경상남도 밀양
승탑 합천 해인사 홍제암 사명대사탑
승탑비 합천 해인사 홍제암 사명대사탑비



정의

조선시대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유정은 1544년(중종 39) 10월 17일에 밀양(密陽)의 삼강동에서 임수성(任守成)과 그 부인인 달성서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유정의 집안은 선대에 대대로 명성과 신망이 높았던 풍천의 이름난 집안이었다. 증조부 임효곤(任孝昆)은 문과에 급제하여 장악원정(掌樂院正)을, 조부 임종원(任宗元)은 강계부사를 지냈는데, 증조부가 일찍이 대구의 수령을 지냈기 때문에 밀양에 살게 되었다. 그가 태어나던 날에는 어머니가 꿈에 흰 구름을 타고 황색 두건을 쓴 금인(金人)을 데리고 만 길이나 되는 높은 대에 올라가니 늙은 신선이 그 위에 걸터앉아 있다가 머리를 땅에 대고 절을 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1]

Quote-left.png 증조부 효곤(孝昆)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관직이 장악원 정(掌樂院 正)에 이르렀는데, 일찍이 대구(大丘)의 수령으로 있을 적에 밀성(密城, 밀양)에다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하였다. 그는 유학(幼學) 종원(宗元)을 낳았고, 종원은 교생(校生) 수성(守成)을 낳았으며, 수성은 달성서씨(達城徐氏)에게 장가들었다. 서씨가 어느 날 저녁에 주부의 거처에 있다가 잠깐 졸면서 꿈을 꾸었는데, 누런 두건을 두른 황금빛 사람이 흰 구름을 타고 높은 누대에 올라가서 늙은 선옹(仙翁)에게 허리를 굽혀 절을 하니, 선옹이 미소를 지으며 말하기를, "이 사람은 고해(苦海)를 건네주는 장년삼로(長年三老, 뱃사공)인데 , 어찌하여 나에게 와서 절을 하시는가?"라고 하였다. 그 소리를 귀로 듣는 순간에 갑자기 놀라 꿈에서 깨고 보니, 마치 오래 굶주렸다가 한 번 배불리 먹은 것 같고, 뭔가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두려운 생각과 함께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런 일이 있은 뒤로부터는 웃어도 잇몸을 보이지 않았으며 감히 트림이나 한숨이나 하품이나 기지개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1년 뒤인 가정(嘉靖) 23년(1544) 갑진년 10월 17일에 대사를 낳았으니, 그때는 우리 중종(中宗) 성효대왕(誠孝大王)이 즉위하신 지 39년이 되는 해였다. Quote-right.png
출처: 사명 유정 지음, 이상현 옮김, 『사명대사집』, 동국대학교출판부, 2014, 458쪽.


출가수행

유정은 7세를 전후하여 역사를 배우고, 13세 때 황여헌(黃汝獻)에게 『맹자』를 배웠다. 1558년(명종 13) 어머니가 죽고, 1559년 아버지가 죽자 김천 직지사(直指寺)로 출가하여 신묵(信默)의 제자가 되었다.[2]

Quote-left.png 7살 때 스님의 할아버지가 史記를 가르치려고 했더니 스님이 “學者의 業이 貴한 것입니까? 賤한 것입니까? 만약 귀한 것이라면 마땅히 배워서 게을리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물었다. 할아버지가 말씀하시기를 “이 世上에서 배움보다 더 貴한 것은 없다. 古今의 賢聖이 모두 배움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니, 어찌 감히 이를 疏忽히 할 수 있겠는가?”라 하였다. 스님이 말하기를 “만약 聖賢의 마음으로써 배움을 삼는 것이라면 貴한 것이고, 이를 어기는 것은 賤한 것이라 하겠으나, 그러나 간혹 世上에서 배운 바가 오히려 사람을 해롭게 하는 說이 많고, 반면 사람을 이롭게 하는 敎訓이 적으니, 이를 어찌 貴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라 하자 할아버지께서 말씀하되 “사람을 이롭게 하거나, 해롭게 하는 것이 空虛한 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마음의 善과 惡에 매여 있는 것이다. 너의 말이 참으로 一理가 있다.”고 칭찬하였다. 그리하여 스님은 이 때부터 스스로 힘써 공부하고 게을리하지 않았다.

13살 때 柳村 黃汝獻으로부터 󰡔孟子󰡕를 배우다가 어느 날 저녁 책을 덮고 탄식하면서 말하되, “俗學은 微賤하고 固陋하여 世緣을 번거롭게 하는 것이니, 어찌 불교의 無漏學說을 배우는 것만 같겠는가!”하고 곧 김천 黃獄山의 直指寺로 가서 信黙和尙을 은사로 하여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처음부터 禪典中 󰡔景德傳燈錄󰡕을 열람하다가 얼마되지 않아 이미 오묘한 宗旨를 깨달았으므로 여러 老宿들이 모두 찾아와서 배우고 質問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합천 해인사 사명대사석장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116-117쪽.


활동

임진왜란 이전

유정은 1561년 선과(禪科)에 응시하여 장원급제한 후 봉은사에 머물며 불교 경전을 부지런히 읽었다. 20여 세에 동녀배들과 갑회(甲會)를 조직하고 갑회문(甲會文)을 지어 나라와 백성을 위해 기도하며 건전한 승려 생활을 실행하자는 뜻을 다짐하였다. 한편 사암(思菴) 박순(朴淳),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 자순(子順) 임제(林悌), 손곡(蓀谷) 이달(李達) 등 사대부 문인들과 시를 지으며 교유하였다. 한번은 하곡(荷谷) 허봉(許篈)과 중국의 문장가 한유(韓愈)의 글 한 편을 외우는 내기에 이겨 책 한 권을 받았다.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이 이 이야기를 듣고 "재주만 믿고 스스로 만족하면 학문에 발전은 없을 것"이라 하니, 이 말을 새겨듣고 공부에 열중하였으며,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에게서 많은 책을 빌려 읽는 이외에도 사자(四子, 공자·맹자·증자·자사)와 이백(李白), 두보(杜甫)의 시를 배워 일취월장하였다.[3]

Quote-left.png 辛酉年에 禪科에 합격한 후부터 스님의 華麗한 所聞이 점차로 높아지자 一時의 學士·大夫·詩人인 朴思 菴·李鵞溪·高霽峰·崔嘉運·許美叔·林子順·李益之 등의 학자들이 모두 스님과 깊은 交驩을 가지면서 詩와 文翰을 唱和함으로써 詞林人들에게 널리 전파되어 美談이 되었다. 일찍이 荷谷과 더불어 韓愈(退之)의 文章 中 가장 많은 鉅篇을 골라 외우기 내기를 하였는데 스님은 한 번 읽고 완전하게 暗誦하였으므로 荷谷은 감탄하면서 곧 바로 手寫本을 전해 주었다. 奇高峰이 격려하되 “만약 이 재주만 믿어 自足하면 학문이 반드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할 것이며 세월을 虛費할 뿐 아니라 지금까지의 功勞를 그르칠 것이니 可惜하다.”고 하였다. 스님은 이 말을 듣고 정신을 가다듬고 엄숙한 마음으로 부지런히 연마하고 조금도 게을리하지 아니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四子書를 蘇齋相에게서 수학하였고, 또 李白과 杜甫의 詩도 배웠다. 이로부터 文章이 날마다 더욱 進趣를 보였을 뿐만 아니라, 內典의 千函도 또한 모두 섭렵하였으니, 方袍를 입은 스님으로서 竺墳을 익힌 강주들이 스님이 있는 山門으로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합천 해인사 사명대사석장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117-119쪽.


유정은 1573년 직지사 주지로 있으면서 허응당(虛應堂) 보우(普雨)의 문집과 잡저의 간행에 발문을 쓰고 교정을 보았다. 1575년 선종(禪宗)의 수찰(首刹)인 봉은사의 주지로 천거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 서산대사의 문하로 들어갔다. 이로부터 3년 동안 수행을 거듭하였으며, 그 사이에 유정은 대동강 부벽루(浮碧樓)에 오르고, 고운 최치원의 족적을 따라 해인사를 비롯하여 사천 곤양성(昆陽城)하동 악양루(岳陽樓)를 유력하였다. 1578년 서산대사의 문하를 떠나 금강산 보덕암(報德庵)으로 들어가 세번의 안거(安居)를 지내며 「동해사(東海辭)」 등 많은 시를 지었다. 1579년 『선가귀감(禪家龜鑑)』의 발문, 1580년 「부석사 안양루 중창기문(浮石寺安養樓重創記文) 」을 짓고 썼다. 이어 팔공산, 지리산, 청량산, 태백산 등을 순력하면서, 특히 태백산 운망사(雲望寺)의 이름을 고쳐 영은사(靈隱寺)라 한 것으로 보인다. 1583년 가을 관서로 가는 도중에 귀양살이하는 친한 벗 하곡을 생각하며 시를 지었다. 1586년 봄 옥천(沃天)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던 중 간밤의 비바람에 떨어진 낙화를 보고 문득 '무상(無常)'의 법을 깨달았다. 이에 제자들을 다 돌려보내고 홀로 선방에 들어가 가부좌하고 열흘 동안 선정에 들었다. 1589년에는 오대산 영감난야(靈鑑蘭若)에 머물면서 「월정사 법당의 서까래를 고치고 올린 글(月精寺法堂改椽錄)」을 지어 모금하며 사찰의 중수에 매달렸다. 이 가운데 정여립의 역모 사건에 모함을 받아 투옥되었으나 강릉 사림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5년 동안 계속된 공사는 단오절을 맞아 낙성식과 향조대회를 열어 완성을 고한 다음 유정은 금강산으로 들어갔다.[4]

Quote-left.png 乙亥年에는 空門의 衆望을 받아 禪宗寺刹의 주지 추천을 받았으나, 굳게 사양하고,錫杖을 짚고 떠나 妙香山으로 들어가서 비로소 淸虛座下에서 법문을 청하였다. 서산스님은 心地法門을 제시하여 바로 性宗의 道理를 傳授하므로 스님은 청허의 言下에 大悟하고 곧 言語文字인 群言을 모두쓸어버리고 閑習도 함께 끊어버렸다. 從來에 詞家들과 교류하여 遊戱하면서 綺言妙句로 말 잔치를 벌리던 모든 것을 참회하는 마음으로 정리하고 安心과 定性에 뜻을 집중하여 3년 동안 苦行精進하여 正法의 골수를 얻었다. 戊寅年에 이르러 청허스님을 하직하고 楓岳山으로 가서 報德寺에서 3년간 정진한 후, 남쪽으로 발길을 돌려八公山, 淸凉山, 太白山 등을 두루 순례하였다.

丙戌年 봄 음성 沃川山 上東菴에 이르러 잠시 머무는 동안, 어느 날 밤 폭우가 내려 뜰 앞에 피었던 꽃이 모두 떨어졌다. 이를 본 스님은 문득 無常을 깨닫고 門人들을 모아 놓고 이르기를 “어제 활짝 피어 정원에 가득하였던 꽃 가지가 오늘은 쓸쓸한 빈 가지뿐이니, 人間 世上의 變滅함도 또한 이와 다를 바 없건마는, 허무한 人生이 마치 蜉蝣와 같은 데도 세월을 虛送하고 있으니, 참으로 가련한 일이아닐 수 없다. 너희들은 각각 신비한 自性을 具足하고 있거늘, 어찌 이를 다시 찾아 生死大事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가? 부처는 나의 마음속에 있거늘 어찌하여 마음 밖으로만 달려가 추구하여 세월만 보내고 있는가?”라 하고, 곧 문도를 四方으로 흩어 보내고는 홀로 禪室에 들어가서 가부좌를 맺고 黙言하면서 골똘히 精進하였다. 간혹 10여 일씩 문 밖으로 나오지 않으므로 문 구멍으로 엿보면 오뚝하게 앉아 있어 마치 흙으로 빚어 놓은 사람과 같았다. 己丑年에 강원도 平昌郡 五臺山靈鑑蘭若에 머물고 있었는데, 鄭汝立의 逆謀 사건에 연루되어 江陵府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儒士들이 그 억울함을 官에 호소하여풀려났다. 庚寅年에는 楓岳山으로 가서 3년간 住錫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합천 해인사 사명대사석장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119-121쪽.


임진왜란

승병으로서의 활동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당시 유점사(楡岾寺)에 있으면서 인근 아홉 고을의 백성들을 구출하였다. 이때 조정의 근왕문(勤王文)과 스승 서산대사의 격문을 받고 승병을 모아 순안 법흥사(法興寺)로 가서 서산대사와 합류하였다. 그곳에서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이 되어 승병 2,000명을 이끌고 평양성 탈환의 전초 구실을 담당하였다. 1593년(선조 26) 1월 명나라 구원군이 주축이 되었던 평양성 탈환의 혈전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그해 3월 서울 근교의 삼각산 노원평(蘆原坪) 및 우관동 전투에서도 큰 공을 세웠다. 선조는 사명대사의 전공을 포장하여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를 제수하였다.[5]

Quote-left.png 壬辰年 여름에는 倭賊이 嶺東으로 침입하여 유점사에까지 이르렀다. 그 때 어떤 사람이 “우리 나라 사람이 왜적들의 길잡이가 되었다.”라고 하는 말을 듣고, 스님이 말씀하되 “만약 倭賊뿐이라면 설득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혹시 우리 나라 사람이 案內를 하고 있다면 또한 筆談으로 이해를 시킬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10여 명의 문도를 거느리고 곧 유점사 山門으로 들어갔다. 문도들은 모두 결박을 당하였으나, 오직 스님만은 泰然한 자세로 당당하게 一柱門·中門을 거쳐 中堂인 큰 법당에 이르렀다. 이 때 倭將의 頭目이 스님을 보고 非常한 人物인 줄 알고 賓主의 禮儀로써 공경히 접대하고 결박했던 모든 스님들을 풀어 주었다. 스님께서 글로써(筆談) 주고 받으면서 法門을 들려 주었더니, 모든 倭寇들이 敬服하고 산중의 깊고 고요한 곳으로 보내드렸다. 스님께서 門徒들에게 이르시되, “如來께서 出世하신 본 뜻은 중생을 救護하기 위함인데, 이 倭賊들이 앞으로 횡포가 심하여져서 우리 백성들을 殘害할까 염려되니, 내가 마땅히 그들을 찾아가 狂賊들을 說諭하여 흉악한 무기를 버리게 한다면 아마 부처님의 慈悲한 가르침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 될 것이다.”라 하고, 곧 바로 육환장을 짚고 高城으로 들어가니 賊將 3人이 함께 禮遇를 지극히 하였다. 스님께서 글을 써서 그들에게 절대로 殺生하기를 즐겨하지 말 것을 권하니, 세 장수가 모두 合掌하고 꿇어 앉아 戒를 받았다. 3일 동안 그들의 營內에 머물면서供養을 받고 떠날 때, 倭將들이 高城 문 밖까지 나와서 祖宴(錢別)을 베풀어 주었다. 당시 高城·杆城 등九個郡의 백성들이 모두 虔劉의 殘酷을 면하게 된 것은 대개 스님의 덕택이었다.

1592년 4월 마침내 宣祖大王이 한양을 내어주고 義州를 向하여 떠날 때, 비분 강개하여 모든 스님들에게 이르되, “우리들이 나라 땅에 살면서 편안히 먹고 자고 지금까지 살 수 있었던 것은 秋毫만한 작은 것도 모두 임금의 恩惠가 아닌 것이 없다. 이와 같이 어렵고 위태한 國難을 당하여, 그 어찌 앉아서만 바라볼 수 있겠는가?” 하고, 곧 數百名의 스님을 모아 火急히 順安 法興寺로 달려가니, 이미 각지에서 몰려온 數千名의 義僧兵이 모여 있었다. 이 때 淸虛스님은 朝廷으로부터 「摠攝諸道僧兵」이라는 직책을 받았으나, 스님께서는 自身이 年老하여 氣力이 衰耗하다는 이유로 代身 사명스님을 추천하였다. 그리하여 드디어 사명스님은 義僧兵인 대중을 통솔하고 軆察使 柳成龍을 따라 明나라로부터 온 응원군의 總司令官劉挺을 도왔다. 그 다음 해인 1593년 1월에 平壤을 탈환하고, 倭將인 小西行長을 몰아냈다. 그 후 都元帥 權慄을 따라 嶺南으로 내려가 宜寧에주둔하면서 적을 죽이고 生捕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선조 임금은 이를 嘉賞히 여겨 堂上官의 官階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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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지관, "합천 해인사 사명대사석장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121-124쪽.


가토 기요마사와의 회담

1594년 4월 명나라의 심유경(沈惟敬)과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협상과는 별도로 사명대사는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을 이간시키려는 계책의 주역을 맡게 되었다. 이때 처음으로 송운(松雲)이라는 법명으로 서생포(西生浦) 왜성을 찾아 가토 기요마사와 네 차례의 회담을 진행하였다.[6] 제1차 회담은 1594년 4월 13~16일 서생포 일본 본진에서 열렸는데 강화 5조약으로 제시된 ①천자와 결혼할 것 ②조선 4도를 일본에 할양할 것 ③전과 같이 교린할 것 ④왕자 한 명을 일본에 보내 영주하게 할 것 ⑤조선의 대신 및 대관을 일본에 볼모로 보낼 것 등을 하나하나 논리적인 담판으로 척파하였다. 제2차 회담은 1594년 7월 12~16일, 제3차 회담은 1594년 12월 23일, 제4차 회담은 1597년 3월 18일 열렸는데, 이때도 대표로 나아가 강화 5조약의 모순을 지적하여 적들의 죄상을 낱낱이 척파하였다. 특히 제2차 적진 담판을 마치고 돌아와 선조에게 전말과 적정을 알리는 「토적보민사소(討賊保民事疏)」를 올렸으며, 1595년(선조 28)에는 장편의 「을미상소(乙未上疏)」를 올렸다.[7] 또한 가토 기요마사와 오갔던 대화와 관련된 일화도 회담시기에 있었던 일이다. 제2차 회담에서 가토 기요마사는 담판의 주요한 부분이 결렬되자 유정을 놀리기 위해 "귀국에도 보물이 있소?"라고 물었다. 그러자 "우리나라에서는 귀하의 머리를 금 천 근과 읍(邑) 만 호(戶)를 주고 산다고 하오. 이러한 막중한 것이 어찌 보배가 되지 않겠소" 라고 호방하게 맞받아쳤다고 한다.[8]

Quote-left.png 甲午年 봄 總司令官인 劉挺의 命으로 스님은 釜山鎭營인 蔚山 西生浦로 세 번 찾아가서 倭將 加藤淸正을 만나 대화하면서 敵情의 자세한 內容을 파악하였다. 이 때 淸正이 탐욕스러운 눈으로 “朝鮮에 貴重한 보물이 있는냐?”고 물었다. 스님은 소리를 높여 대답하되 “우리 나라에는 보배가 없고, 귀한 보물은 日本에 있다.”고 하였다. 청정이 “무슨 말입니까?”라 하자 스님이 말씀하되 “지금 우리 나라에서는 당신의 머리를 가장 귀한 보물로 보고 모두 노리고 있으므로 보배가 日本에 있다고 한것입니다.”라 하였다. 이 말을 들은 淸正이 깜짝 놀라면서 스님의 法力과 愛國精神에 감탄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합천 해인사 사명대사석장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124쪽.


국방 강화 활동

유정은 국방에도 깊은 관심을 보이며 산성 수축에 힘을 다하였다. 사명대사가 수축한 산성은 팔공산성(八公山城)·금오산성(金烏山城)·용기산성(龍起山城)·악견산성(岳堅山城)·이숭산성(李崇山城)·부산성(釜山城)남한산성 등이다. 그리고 군기 제조에도 힘을 기울여 해인사 부근의 야로에서 활촉 등의 무기를 만들었고, 투항한 왜군 조총병을 비변사에 인도하여 화약 제조법과 조총 사용법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1594년(선조 27) 의령에 주둔하였을 때 군량을 모으기 위하여 각 사찰의 전답에 봄보리를 심도록 하고, 산성 주위를 개간하여 정유재란이 끝날 때까지 군량미 4,000여 석을 갖추도록 하였다. 선조는 사명대사의 공로를 크게 인정하여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의 벼슬을 내렸다.[9]

Quote-left.png 선조 임금께서 스님을 궁중으로 초빙하여 자세하게 平生에 대한 일을 묻고는 下敎하여 이르되, “옛날 元나라의 劉秉忠과 明나라의 姚廣孝는 모두 山人인 스님의 신분이었으나, 나라에 큰 功勳을 세웠으므로 그 이름이 後世에까지 널리 流布되었습니다. 지금 國勢가 이와 같이 어려운 형편이니 스님이 만약 下山하여 머리를 기른다면 마땅히 百里의 食邑을 주는 한편 三軍의 統帥權을 드리겠습니다.”라고 하였으나, 스님은 감히 굳게 사양하고 물러났다. 宣祖가 무기고에 보관된鎧仗을 스님께 주었으므로 스님은 嶺南으로 돌아와서 남아 있는 倭賊을抄擊하고, 龍起·八公·金烏 등 여러 山城을 높고 굳게 쌓고, 그 山城의 要所마다 鎭地를 구축하고는 각각 藩鎭을 修飾하여 마친 후,印綏와 戰馬를 왕에게 되돌려 보내고 尺籍을 정리하여 備邊司에 보내고는 장서를 올려 한가롭게 수도할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요청하였으나, 朝廷에서는 간곡히 만류하고 許諾하지 않았다.

丁酉年 겨울 明나라에서 원군으로 온 提督 麻貴를 따라島山 陣地에 들어갔고, 戊戌年에는 또 提督 劉挺을 따라 曳橋 陣地에 들어가서 모두 큰 공을 세웠는데, 前後에 걸쳐 軍粮을 준비하여 먹인 것이 무려 4천여 섬이고, 武器와 갑옷의 수도 한량이 없었다. 임금께서 크게 嘉賞하게 여기시고 종2품 嘉善大夫로 特進하고 同知中樞府事를 제수하였다. 辛丑年에 釜山城을 수축하고는內隱山으로 돌아갔으며, 癸卯年에는 王命을 받고 서울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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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지관, "합천 해인사 사명대사석장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124-127쪽.


임진왜란 이후

임진왜란이 끝난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정권이 조선 정부에 강화를 청해오자, 유정은 1604년 8월 탐적사(探賊使)로 쓰시마섬에 파견되었다. 유정은 강화 사승(使僧: 사신의 임무를 띤 승려)의 신분으로 그해 12월 교토에 들어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본법사(本法寺)에서 회견했다. 회견의 성과로 1605년 4월 일본에 연행된 피로인(被擄人) 1,300여 명(혹은 3,000여 명)을 데리고 귀국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 공로로 유정은 종2품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유정의 이러한 외교적 성과로 조선과 일본 도쿠가와 정권과의 우호 관계는 급속도로 진전을 보게 되었고, 임진왜란 후 일본에 첫 조선통신사를 파견하는 중요한 계기가 마련되었다.[10]

Quote-left.png 甲辰年 가을에는 國書를 받들고 日本으로 건너갔다. 그 때 모든 倭人들이 서로 “이 스님이 머리가 보배라는 얘기를 한 和尙이냐”면서 수군거렸다.對馬島에서부터 서울인大阪에 이르니 모든 總帥들이 함께 信受를 約束하고는 마치 麈尾를 따르듯 隨從하여 스님의 가르침을 받기를 원하였다. 스님이 자상하게 일러주니 모두 頂禮하고 生佛이라고 칭송하였다. 이어 德川家康을 만나서 구체적으로 “지금 兩國 백성이 도탄에 빠진지 이미 오래되었으므로 내가 이들을 救濟하기 위하여 왔다.”라고 말하였다. 家康도 또한 佛 敎를 믿는 信者였으므로 스님의 말씀을 듣고 信心을 發하여 마치 부처님과 같이 공경하였다. 순조롭게 講和를 성취시키고 歸國하는 길에 男女 포로 1천 5백 명을 인수받아 스스로 양식을 구하여 먹이면서 바다를 건너 돌아왔다. 乙巳年에 임금께 復命하였다. 왕은 크게 가상하게 여겨 그 功勞를 위로하고嘉義大夫의 官階를 더해주고 御馬와 紵絲를 하사하여 포창하고 장려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합천 해인사 사명대사석장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127-128쪽.


1605년 당시 조정에서는 전쟁에 불탄 사고(史庫)의 설치 문제로 고심하고 있었는데, 유정이 귀국하자 그에게 오대산 사고의 설치를 상의하였다. 유정은 곧장 오대산으로 들어갔다가 10월 하순에 묘향산 보현사로 가서 휴정의 영탑전에 절하였다. 1606년 봄에는 선조의 부름을 받고 상경하여 삼청동에 초가를 지어 기거하면서 궁궐 공사를 감독하였다. 5월에는 법형제들과 의논하여 금강산 유점사휴정의 사리탑을 세우는데, 대사는 공사에 매달려 있어 주지 태희(太熙)에게 「등계의 탑을 세우며 올린 축문(登階建塔祝文)」을 지어 보냈다. 윤6월에는 궁궐 역사의 공로로 정2품 형조판서겸지의금부사(刑曹判書兼知義禁府事)에 올랐다. 1608년 선조가 승하하자 서울로 올라와 배곡하니, 이로 인하여 병히 심해져 해인사로 내려갔다.[11]

Quote-left.png 이 때는 이미 淸虛스님이 入寂한 후였으므로 스님은 곧 그 길로 妙香山으로 가서 淸虛의 영정과 사리탑에 예배하고 普賢寺에서 守制하였다.

丙午年 봄에는營繕軍을 거느리고 法宮의 役事에 나아가 三淸洞에 茅屋을 짓고 거주하였다. 丁未年 가을 允許를 받고 雉岳山으로 돌아갔다. 戊申年 宣祖大王이 승하하였다는 諱音을 듣고 서울로 올라가 拜哭한 후 병이 생겨 매우 고통을 받았다. 지금의 임금(光海君)께서 스님으로 하여금 西道의 邊方으로 가서 胡侵을 방비하게 하려고 하였다. 스님은 받아들이지 않고 伽耶山 해인사로 들어가 병을 치료하면서 요양하였는데, 광해군이 여러 차례 御藥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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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지관, "합천 해인사 사명대사석장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128-129쪽.


입적

유정은 1610년 8월 26일 설법하고 결가부좌한 채 입적하였다. 광해군은 전교를 내려 조상하고 장례에 쓸 물목을 지급하게 하였다. 같은 해 11월 해인사 서쪽 기슭에서 화장하였으며, 1612년(광해군 4)에 비가 건립되었다. 밀양의 표충사(表忠祠), 묘향산의 수충사(酬忠祠), 공주시 계룡면의 표충원(表忠院) 등에 제향되었다.[12]

Quote-left.png 庚戌年 가을에 왕이 크게 염려하여 스님을 서울로 모시고 와서치료를 받게 하려고方伯으로 하여금 火急히 보내게 하였다. 그 해 8월 26일 스님은 문도와 많은 大衆을 모아놓고 말씀하시기를 “四大肉身은 본시 假合한 것이다. 나는 머지 않아 眞如의 世界로 돌아가려 하거늘, 어찌 屑屑하게 왔다 갔다하면서 허망한 몸뚱이를 괴롭힐 必要가 있겠는가! 나는 곧 入滅하여大化를 따를 것이다.”라 하고는 드디어 跏趺坐를 맺고 단정히 앉아 조용히 入寂하였다. 11월 20일에 문도들이 스님의 法軀를 모시고 해인사의 서쪽 산 기슭에서 화장하니 祥瑞로운 광명이 하늘을 찔렀고, 날아가던 새들도 슬피 울었다. 화장이 끝난 후, 位牌를 모시고 갔던 侍輦의 앞 부분에서 頂珠 一顆를 얻어 石鐘을 다듬어 安藏하고 窣堵坡를 세웠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합천 해인사 사명대사석장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129-130쪽.


저술

저서에 『사명당대사집(泗溟堂大師集)』, 『분충서난록(奮忠紓難錄)』 등이 있다. 『사명당대사집』은 7권 1책으로 1612년(광해군 4) 제자 혜구(惠球) 등이 유정의 유문을 처음 수집·간행한 후 1652년(효종 3) 공봉산인(公峰山人) 성일(性一) 등이 간행하였다. 시(詩), 문(文) 등 10여 편이 수록되어 있다. 『분충서난록』은 2권 1책으로 유정의 일기와 상소문(上疏文), 기타 사적이 수록되어 있다. 이의현의 「표충사송운영당비명(表忠詞松雲影堂碑銘)」과 왜장 가토 기요마사의 진중을 정탐한 기록인 「진중탐정기(陣中探偵記)」, 명나라 장수 유정(劉綎)을 찾아가 회담한 기록, 적을 토벌할 방책에 대한 상소(上疏), 선조의 전교(傳敎) 및 유정(劉綎)의 서첩 등이 수록되어 있다.[13]

유정과 관련된 문화유산

지식 관계망

  • 사명대사 유정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합천 해인사 홍제암 사명대사탑 유정 A는 B를 위한 승탑이다 A ekc:isStupaOf B
합천 해인사 홍제암 사명대사탑비 유정 A는 B를 위한 비이다 A ekc:isSteleOf B
임수성 유정 A는 B의 아버지이다 A ekc:hasSon B
황여헌 유정 A는 B의 스승이다 A ekc:hasDisciple B
신묵 유정 A는 B의 스승이다 A ekc:hasDisciple B
휴정 유정 A는 B의 스승이다 A ekc:hasDisciple B
유정 응상 A는 B의 스승이다 A ekc:hasDisciple B
유정 박순 A는 B와 교유하였다 A foaf:knows B
유정 이산해 A는 B와 교유하였다 A foaf:knows B
유정 고경명 A는 B와 교유하였다 A foaf:knows B
유정 최경창 A는 B와 교유하였다 A foaf:knows B
유정 임제 A는 B와 교유하였다 A foaf:knows B
유정 이달 A는 B와 교유하였다 A foaf:knows B
유정 허봉 A는 B와 교유하였다 A foaf:knows B
유정 노수신 A는 B와 교유하였다 A foaf:knows B
유정 가토 기요마사 A는 B와 대립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유정 조선 선조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유정 도쿠가와 이에야스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유정 평양 부벽루 A는 B를 방문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유정 사천 곤양성 A는 B를 방문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유정 하동 악양루 A는 B를 방문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유정 기축옥사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유정 임진왜란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유정 4차 평양전투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유정 조선통신사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유정 삼척 영은사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유정 김천 직지사 A는 B에서 출가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유정 김천 직지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유정 서울 봉은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유정 금강 표훈사 보덕암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유정 고성 유점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유정 합천 해인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A edm:isRelatedTo B
대구 동화사 유정 A는 B가 중창하였다 A ekc:renovator B
유정 향산 보현사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분충서난록 유정 A는 B가 저술하였다 A dcterms:creator B
보은 법주사 유정 A는 B가 중건하였다 A ekc:renovator B
사명대사의 금란가사와 장삼 유정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사명대사일본상륙행렬도팔곡병 유정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양국대장사령깃발 유정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밀양 표충사 유정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사명당대사집 유정 A는 B가 저술하였다 A dcterms:creator B
일선 유정 A는 B와 교유하였다 A foaf:knows B
갑사 표충원 유정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포항 대성사 소장 금동여래좌상 유정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향산 수충사 유정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해남 표충사 유정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유정 진영(동화사) 유정 A는 B를 묘사하였다 A ekc:depicts B
유정 진영(대곡사) 유정 A는 B를 묘사하였다 A ekc:depicts B
유정 진영(압곡사) 유정 A는 B를 묘사하였다 A ekc:depicts B
유정 진영(월정사) 유정 A는 B를 묘사하였다 A ekc:depicts B
박서보-설법으로 왜장을 감동시킨 사명당(송운대사) 유정 A는 B를 소재로 삼았다 A ekc:depicts B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544년 10월 17일 유정 출생
1561년 유정은 선과에 응시하여 장원급제하였다.
1573년 유정김천 직지사 주지로 있으면서 보우(조선)의 문집과 잡저의 간행에 발문을 쓰고 교정을 보았다.
1574년 유정서울 봉은사의 주지로 천거되었으나 사양하고, 향산 보현사 휴정의 문하로 들어갔다.
1578년 유정휴정의 문하를 떠나 금강 표훈사 보덕암으로 들어갔다.
1579년 유정은 『선가귀감(禪家龜鑑)』의 발문을 지었다.
1580년 유정은 「부석사 안양루 중창기문(浮石寺安養樓重創記文) 」을 썼다.
1586년 유정은 옥천(沃天)에서 무상(無常)의 법을 깨달았다.
1589년 유정은 1589년에는 오대산 영감난야(靈鑑蘭若)에 머물면서 「월정사 법당의 서까래를 고치고 올린 글(月精寺法堂改椽錄)」을 지어 모금하며 사찰의 중수에 매달렸다.
1592년 유정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성 유점사에 있으면서 인근 아홉 고을의 백성들을 구출하였다.
1593년 유정은 평양성 탈환의 혈전과 삼각산 노원평(蘆原坪) 및 우관동 전투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1594년 4월 13-4월 16일 유정가토 기요마사의 1차 회담.
1594년 7월 12- 7월 16일 유정가토 기요마사의 2차 회담.
1594년 12월 23일 유정가토 기요마사의 3차 회담.
1595년 유정은 조정에「을미상소(乙未上疏)」를 올렸다.
1597년 3월 18일 유정가토 기요마사의 4차 회담.
1604년 8월 유정은 탐적사(探賊使)로 쓰시마섬에 파견되었다.
1604년 12월 유정은 교토에 들어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본법사(本法寺)에서 회견했다.
1605년 4월 유정은 일본에 연행된 피로인(被擄人) 1,300여 명(혹은 3,000여 명)을 데리고 귀국하였다.
1605년 10월 유정향산 보현사로 가서 휴정의 영탑전에 절하였다.
1606년 유정선조의 부름을 받고 상경하여 삼청동에 초가를 지어 기거하면서 궁궐 공사를 감독하였다
1608년 유정선조가 승하하자 서울로 올라와 배곡하니, 이로 인하여 병히 심해져 합천 해인사로 내려갔다.
1610년 8월 26일 유정은 설법하고 결가부좌한 채 입적하였다.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1. 양혜원, "유정(사명대사) (惟政)",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2. 목정배, "유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사명 유정 지음, 이상현 옮김, 『사명당대사집』, 동국대학교출판부, 2014, 9쪽.
  4. 사명 유정 지음, 이상현 옮김, 『사명당대사집』, 동국대학교출판부, 2014, 9-10쪽.
  5. 손경희, "사명대사", 『디지털김천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6. 사명 유정 지음, 이상현 옮김, 『사명당대사집』, 동국대학교출판부, 2014, 11쪽.
  7. 손경희, "사명대사", 『디지털김천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8.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14 - 경남』, 돌베개, 2002. 온라인 참조: "사명대사 유정",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9. 손경희, "사명대사", 『디지털김천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0. 윤기엽, "사승(使僧)", 『조선왕조실록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1. 사명 유정 지음, 이상현 옮김, 『사명당대사집』, 동국대학교출판부, 2014, 17-18쪽.
  12. 정제규, "유정", 『디지털제천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3. 정제규, "유정", 『디지털제천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4. "대구 동화사 사명당 유정 진영", 문화재검색, 『문화재청』online.
  15. "의성 대곡사 삼화상 · 조사진영", 문화재검색, 『문화재청』on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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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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