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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 서봉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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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규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8월 23일 (수) 14:16 판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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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 서봉사지
(龍仁 瑞峰寺址)
대표명칭 용인 서봉사지
한자 龍仁 瑞峰寺址
주소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신봉동 산21
경내문화재 용인 서봉사지 현오국사탑비



정의

경기도 용인시 수지읍 신봉리에 있는 절터.

내용

창건연대 및 창건자는 미상이나 고려시대 국사 현오(玄梧)가 이곳에 주석하면서 국왕을 강학(講學)하였다는 일설이 전해지고 있으며, 절에 대한 역사는 거의 전래되지 않고 있다. 임진왜란 때 절에서 떠내려 오는 쌀뜨물이 10리 나 흘러내렸기 때문에 왜적이 뭍을 따라 올라가서 절을 불태웠다고 하며, 임진왜란 때 전라감사 이광(李廣)이 이끄는 근왕병 5만이 이곳에서 왜적과 싸웠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 절에서는 『인천안목(人天眼目)』·『불조삼경(佛祖三經)』 등 10여종의 목판본을 간행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불설예수시왕경(佛說豫修十王經)』은 특출하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1]

『태종실록』 7년에 따르면 용구(龍駒)[용인] 서봉사를 전국적인 자복사(資福寺)의 하나로 선정하고, 천태종 소속으로 삼았다 한다. 또한 조선 전기에 시행된 사찰의 혁파 대상에서 제외된 거찰(巨刹)로서, ‘명찰(名刹)’ 또는 ‘명당 터의 대가람’에 해당하는 절이었다.[2]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관련 기록으로 보아 18세기 후반까지 운영되었고, 19세기경에 폐사(廢寺)된 것으로 추정된다. [3]

이곳이 서봉사임을 알게 된 것은 현오국사탑비의 비각을 건립하는 공사 중 명문와편(銘文瓦片)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사지(寺址)의 크기로 보아 굉장한 규모의 사찰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절은 서북을 등진 동남향으로 배치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상·중·하의 계단식으로 나누어져 있다. 맨 위쪽의 절터가 법당자리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주춧돌과 탑재 등도 흩어져 있다. [4]

관련문화유산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용인 서봉사지 현오국사탑비 용인 서봉사지 A는 B에 있다
종린 용인 서봉사지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인천안목 용인 서봉사지 A는 B와 관련있다
천태종 용인 서봉사지 A는 B를 포함한다

시각자료

주석

  1. "서봉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서봉사지",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용인 서봉사지", 『두산백과』online.
  4. "서봉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 "서봉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서봉사지",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용인 서봉사지", 『두산백과』onl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