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소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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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현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8월 27일 (일) 17:11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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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韶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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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소현
한자 韶顯
생몰년 1038(정종 4)-1096(숙종 1)
시호 혜덕(慧德)
소현(韶顯)
탑호 진응(眞應)
범위(範圍)
성씨 이씨(李氏)
본관 인주(仁州)
출신지 황해북도 개성
승탑비 김제 금산사 혜덕왕사탑비



정의

고려시대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혜덕왕사 소현(韶顯)은 자(字)는 범위(範圍)이고, 속성은 이씨(李氏)로, 1038년(정종 4)에 개경에서 태어났다. 소현의 할아버지(祖)는 한(翰)이고, 아버지는 이자연(李子淵), 어머니는 계림국태부인(鷄林國太夫人) 김씨(金氏)이다. 소현은 이자연의 8남 3녀 중 다섯째 아들로, 이른바 고려 문벌인 인주이씨 가문의 사람이었다. ‘혜덕왕사비’에도 소현의 조부인 이한 이래로 이어진 가문의 명성을 ‘閥閱之聲’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인주이씨와 왕실 사이의 중첩된 혼인관계도 말하고 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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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혜덕왕사(慧德王師)의 휘는 소현(韶顯)이요, 자(字)는 범위(範圍)이며, 속성은 이씨(李氏)요, 그의 선조(先祖)는 경원군(慶源郡) 사람이다.

...(중략)...

왕부(王父)의 휘는 한(翰)이니 광록대부(光祿大夫)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증태자태부(贈太子太傅)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공(▨▨▨▨▨▨公)이니, 효도로써 힘을 다하고, 충성으로써 생명을 바쳤다.

...(중략)...

현고(顯考)의 휘는 자연(子淵)이니, 수태사(守太師)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증중서시랑(贈中書侍郞) 문화공(文和公)이니, 문장으로써 어렴(御簾)고제(高第)에 발탁되었다. 남다른 주략(籌略)이 있어, 독보적인 지모(智謀)로 많은 사람을 힘껏 돕는다는 소문이 자자하며, 만기(萬機)를 돕는 사보(四輔) 중에 으뜸이었으니, 어찌 이윤(伊尹)이 은(殷)나라의 우상(右相)이 되어 천하를 태평성세로 이룩한 것에 그칠 뿐이며, 공광(孔光)이 한(漢)나라의 상공(上公)에 임명되니, 해내(海內)가 어찌 그의 위엄(威嚴)에만 두려워 함이겠는가?

...(중략)...

어머니는 김씨(金氏)니, 여러 차례에 걸쳐 계림국태부인(鷄林國太夫人)으로 추증(推贈)받았다. 성품은 선천적으로 온유하고 아름다움을 타고 났으며, 장성(長成)해서는 (결락) 부인(婦人)의 사덕(四德)을 갖추어 영광스럽게 공족(公族)의 부인이 되고, 마음은 삼보(三寶)에 귀의하여 법왕(法王)의 제자가 될 아들을 간구하였더니, 과연 부처님의 성응(感應)을 입어 임신하였다. 태평기력(太平紀曆) 17년 세재무인(歲在戊寅) 7월 재생명(哉生明)에 궁궐 남쪽 불령(佛嶺)의 사제(私第)에서 탄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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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출가수행

소현은 1048년(문종 2)에 해린에게 낙발함으로써 인주이씨를 대표하여 법상종 승려로 출가하였다. 그리고 소현은 출가한 다음 1070년(문종 24)에 스승인 해린이 입적할 때까지 그의 문하에서 법상종 승려로서 기반을 다져갔다.[2]

소현은 1049년(문종 3)에 복흥사 관단에서 구족계를 받았고, 1054년(문종 8)에 스승인 해린이 현화사의 주지가 됨으로써 그도 해린을 따라 현화사로 이주하였다. 소현은 이 때부터 1070년(문종 24)까지 16년 동안 현화사에 머무르게 되었다. 이 때 해린은 현화사 보수 공사를 추진하였으며, 차례로 왕사와 국사에 책봉됨으로써 명실공이 법상종단을 영도하는 인물이 되었다. 이런 해린의 문하에서 소현은 금언을 수학하였고, 왕륜사 대선장에 나아가 대덕이 되었으며, 중대사가 되었다.[3]


활동

소현은 1071년(문종 25) 해안사 주지가 된 후, 1074년(문종 28)에 삼중대사의 법계를 제수하였다.59) 그리고 1079년(문종 33) 가을에는 內殿에서 열린 法席에서 說法主로 초청되었다. 소현은 해안사에 이어서 1079년(문종 33)에 왕명으로 금산사의 주지가 되었다. 그리고 소현은 수좌와 승통의 법계를 제수하였다.[4]

금산사에서 소현의 활동으로 손꼽을 수 있는 것은 첫째 廣敎院의 설치와 둘째 광교원에서 이루어진 章疏의 간행이다. . 소현은 금산사의 중창과 함께 법상종 관련 장소를 간행·유통할 수 있는 광교원을 두어 법상종단을 정비하였다. 그리고 절의 남쪽 지역에 원을 두고 ‘광교원’이라고 하였다.[5]


소현은 금산사에서 약 5년 여 동안 주지로 있다가 1084년(선종 1)에 현화사의 주지가 되어 전주에서 개경으로 다시 올라오게 된다. 그리고 소현은 1096년(숙종 1)에 봉천원에서 입적하였다고 하니, 말년이 되어서는 금산사로 하산한 것으로 보인다

입적

12월 금산사 남쪽의 봉천원(奉天院)에서 입적하였다. 세수 58세, 법랍 47세였다. 숙종은 혜덕왕사(慧德王師)라는 시호를 내렸고, 탑호(塔號)는 진응(眞應)이라 하였다.

지식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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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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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가상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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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주석

  1. 5쪽
  2. 12쪽.
  3. 17쪽.
  4. 20-22쪽.
  5. 23-24쪽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