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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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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韶顯)
금산사 소현 진영
대표명칭 소현
한자 韶顯
생몰년 1038(정종 4)-1096(숙종 1)
시호 혜덕(慧德)
소현(韶顯)
탑호 진응(眞應)
범위(範圍)
성씨 이씨(李氏)
본관 인주(仁州)
출신지 황해북도 개성
승탑비 김제 금산사 혜덕왕사탑비



정의

고려시대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혜덕왕사 소현(韶顯)의 자(字)는 범위(範圍), 속성은 이씨(李氏)로, 1038년(정종 4) 개경에서 태어났다. 소현의 할아버지(祖)는 한(翰)이고, 아버지는 이자연(李子淵), 어머니는 계림국태부인(鷄林國太夫人) 김씨(金氏)이다. 소현은 이자연의 8남 3녀 중 다섯째 아들로, 이른바 고려 문벌인 인주이씨 가문 사람이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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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혜덕왕사(慧德王師)의 휘는 소현(韶顯)이요, 자(字)는 범위(範圍)이며, 속성은 이씨(李氏)요, 그의 선조(先祖)는 경원군(慶源郡) 사람이다.

...(중략)...

왕부(王父)의 휘는 한(翰)이니 광록대부(光祿大夫)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증태자태부(贈太子太傅)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공(▨▨▨▨▨▨公)이니, 효도로써 힘을 다하고, 충성으로써 생명을 바쳤다.

...(중략)...

현고(顯考)의 휘는 자연(子淵)이니, 수태사(守太師)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증중서시랑(贈中書侍郞) 문화공(文和公)이니, 문장으로써 어렴(御簾)고제(高第)에 발탁되었다. 남다른 주략(籌略)이 있어, 독보적인 지모(智謀)로 많은 사람을 힘껏 돕는다는 소문이 자자하며, 만기(萬機)를 돕는 사보(四輔) 중에 으뜸이었으니, 어찌 이윤(伊尹)이 은(殷)나라의 우상(右相)이 되어 천하를 태평성세로 이룩한 것에 그칠 뿐이며, 공광(孔光)이 한(漢)나라의 상공(上公)에 임명되니, 해내(海內)가 어찌 그의 위엄(威嚴)에만 두려워 함이겠는가?

...(중략)...

어머니는 김씨(金氏)니, 여러 차례에 걸쳐 계림국태부인(鷄林國太夫人)으로 추증(推贈)받았다. 성품은 선천적으로 온유하고 아름다움을 타고 났으며, 장성(長成)해서는 (결락) 부인(婦人)의 사덕(四德)을 갖추어 영광스럽게 공족(公族)의 부인이 되고, 마음은 삼보(三寶)에 귀의하여 법왕(法王)의 제자가 될 아들을 간구하였더니, 과연 부처님의 성응(感應)을 입어 임신하였다. 태평기력(太平紀曆) 17년 세재무인(歲在戊寅) 7월 재생명(哉生明)에 궁궐 남쪽 불령(佛嶺)의 사제(私第)에서 탄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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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지관, "금구 금산사 해덕왕사 진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39-44쪽.


출가 수행

소현은 1048년(문종 2)에 개성 해인사에서 해린에게 낙발함으로써 인주이씨를 대표하여 법상종 승려로 출가했다. 그리고 소현은 출가한 다음 1070년(문종 24)에 스승인 해린이 입적할 때까지 그의 문하에서 법상종 승려로서 기반을 다져갔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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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겨우 11살 때 해안사(海安寺)의 해린(海麟)스님을 찾아가서 그를 은사로 하여 낙발득도(落髮得度)하였는데, 해린은 이미 입적(入寂)하신 법천사(法泉寺)의 국사(國師)이니, 시호는 지광(智光)이요, 휘는 해린이다. 이보다 앞서 인공(麟公)이 왕의 부름을 받아 궐내에 들어가서 어느날 밤 삼고(三鼓)의 꿈에 서조(瑞鳥)를 보니, 봉(鳳)과 비슷하나 자색(紫色)이며, (결락) 자(紫) (결락) 완심(玩深) 공실지(恐失之) (결락) 화공(和公)이 스님을 데리고 와서 제자로 삼아 달라고 간청하였는데 인공이 스님의 모습을 보니, 웅걸(雄傑)하고 자색(紫色) 옷을 입고 있었다. 인공이 이르기를, “어제 밤에 서조를 보는 꿈을 꾸었으니, 어찌 이것이 거짓이겠는가”라 하고 받아 들였다. 처음부터 『금광명경(金光明經)』과 유식론(唯識論)을 배웠는데, 숙세(夙世)로부터 많이 문훈(聞薰)하였으므로, 날마다 식견(識見)이 증승(增勝)하였다. 그리하여 인공이 마음으로 깊이 사랑하고 이르기를, “현철(賢哲)의 재질(才質)이 때를 기다려, 그 이름이 나타나는 것이 마치 도리(桃李)나무가 봄 빛을 받아 점점 자라는 것과 같으므로, 소현(韶顯)으로써 법명(法名)을 삼는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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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지관, "금구 금산사 해덕왕사 진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44-45쪽.


소현은 1049년(문종 3)에 복흥사(福興寺) 관단에서 구족계를 받았고, 1054년(문종 8)에 스승인 해린개성 현화사의 주지가 되면서 해린을 따라 현화사로 이주했다. 소현은 이때부터 1070년(문종 24)까지 16년 동안 현화사에 머물렀다. 이 시기에 해린현화사 보수 공사를 추진하였으며, 차례로 왕사국사에 책봉됨으로써 명실공히 법상 종단을 영도하는 인물이 되었다. 이런 해린의 문하에서 소현은 금언을 수학했고, 왕륜사 대선장에 나아가 대덕이 되었으며, 중대사가 되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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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년(明年)에 복흥사(福興寺)의 관단(官壇)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으니, 세간을 초월하는 계주(戒珠)가 스스로 청결(淸潔)하여 마롱(磨礱)을 빌리지 않았다. 출진(出塵)의 마음 거울이 본래로 청정한 것이어늘, 어찌 수고롭게 불식(拂拭)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 무렵 인공이 현화사(玄化寺)로 이주하여 높이강장(絳帳)에 앉아 후학을 지도하고 있었다. 왕사(王師)도 그곳으로 따라가서 금언(金言)을 수학하였으니, 어찌 중니(仲尼)의 문하(門下)에서 수학(受學)하는 안회(顔回)와 다를 것이며, 선광(善光) (결락) 재(哉)아! 청령(淸寧) 7년 왕륜사(王輪寺)의 대선장(大選場)에 나아가, 일첩(一捷)에 대덕법계(大德法階)에 합격하였다. 함태(咸泰) 5년에 중대사(重大師)의 법계가 첨가되었고, 6년 5월에 이르러 문종이 금륜왕(金輪王)과 같이 나라를 통어(統御)하고, 옥의(玉扆)으로부터 저절로 상서(祥瑞)가 응집(凝集)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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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지관, "금구 금산사 해덕왕사 진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45쪽.


활동

소현은 1071년(문종 25) 해안사 주지가 된 후, 1074년(문종 28)에 삼중대사의 법계를 제수하였다. 그리고 1079년(문종 33) 가을에는 내전(內殿)에서 열린 법도(法席)에서 설법주(說法主)로 초청되었다. 소현은 해안사에 이어 1079년(문종 33)에 왕명으로 금산사 주지가 되었다. 그리고 소현은 수좌와 승통의 법계를 제수하였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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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1071, 함옹 7) 초부터 해안사(海安寺)에 주석(住錫)하였는데, 10년에는 삼중대사(三重大師)의 법계를 가수(加授)하였다. 태강(太康) 5년 가을 문종 임금이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내전(內殿)에서 크게 법석(法席)을 베풀고, 왕사를 초청하여 설법주(說法主)로 모신 것은 대송(大宋)에서 왔다가 돌아가는 사신(使臣) 일행이 무사히 바다를 건너가도록 기원하기 위한 것이었고, 그리하여 보리(普利)라는 이자(二字)의 법칭(法稱)을 첨가하였다. 그 후 십육자(十六字)의 법호(法號)를 누가(累加)한 것은 모두 그의 덕행을 현창한 것이다. 다시 그 해에 전주 금산사로 왕명에 따라 이주하였다. 9년에 이르러 수좌(首座)의 직계(職階)를 더하였는데, 이 해에 문종이 승하(昇遐)하고, 순종(順宗)이 즉위하였으나, 4개월만에 순종도 승하하고, 선종(宣宗)이 보위(寶位)를 승계한 원년(元年)이다. 임금이 단정히 두 손을 마주잡고 앉아 무위태평(無爲太平)을 이루었으며, 편안히 앉아 중흥(中興)을 이룩한 것이 어찌 왕사가 끼친 복리(福利)의 공(功)이 아니겠는가? 비서(批署)를 내려 승통(僧統)으로 추대하였는데, 그 때 왕사의 나이는 47세였다. 비로소 수좌가 되고 (결락) 이어 승통이 되었는데, 지위(地位)란 덕으로 말미암아 진계(進階)되는 것이니 위대하다고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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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지관, "금구 금산사 해덕왕사 진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46-47쪽.


금산사에서 소현의 활동으로 손꼽을 수 있는 것은 광교원(廣敎院)의 설치와 광교원에서 이루어진 장소(章疏)의 간행이다. 소현은 금산사의 중창과 함께 법상종 관련 장소를 간행·유통할 수 있는 광교원(廣敎院)을 두어 법상 종단을 정비했다. 그리고 절의 남쪽 지역에 원을 두고 ‘광교원’이라 하였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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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일찍이 금산사의 남쪽 60보쯤 되는 지점에 승지(勝地)를 골라 광교원(廣敎院)을 창설하고, 유식종에 관한 경론(經論)을 각조(刻雕)하여 광교원에 진장(鎭藏)하였다. 그리고 원중(院中)에 일금당(一金堂)을 따로 두어 노사나불(盧舍那佛)과 현장(玄奘)과 규기(窺基) 두 스님의 상(像)을 (결락) 봉안하였다. 태강(太康) 9년으로부터 스님의 말년에 이르기까지 자은대사(慈恩大師)가 지은 법화현찬(法華玄贊)과 유식술기(唯識述記) 등 장소(章䟽)를 찾아서 32부(部) 공계(共計) 353권을 그 본(本)을 고정(考正)하고 각공(刻工)을 모집하여 판각(板刻)하고는 개인적으로 지묵(紙墨)을 갖추어 인경(印經)하여 유통함으로써 널리 법포시(法布施)를 행하였다. 자세히 상고해 보니, 대송고승전(大宋高僧傳)에 현장은 유식론을 개창한 시조이며, 규기는 이에 유식론문(唯識論文)을 보수(保守)하여 술작(述作)한 종조(宗祖)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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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지관, "금구 금산사 해덕왕사 진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49-50쪽.


소현은 금산사에서 약 5년 동안 주지로 있다가 1084년(선종 1)에 현화사의 주지가 되어 전주에서 개경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소현은 1096년(숙종 1)에 봉천원에서 입적하였다고 하니, 말년에는 금산사로 하산한 것으로 보인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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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께서 현화사에 거주할 때, (결락) 완전히 보수하는 것이 급무(急務)라고 생각하여 곧 상계(狀啓)를 갖추어 왕에게 주문(奏聞)하였더니, 임금께서 주청한 것을 가하다고 인가하시고, 선리궁(繕理宮)을 설치하였다. 대안(大安) 4년 기사(己巳)에 역사(役事)를 시작하여 수창(壽昌) 2년 병자(丙子)에 준공하였는데, 그 규모가 굉장히 웅대하였다. 비록 구지(舊址)에 복원하였으나, 장엄한 승개(勝槩)가 완전히 새로 건축한 것과 같았다. 그리고 또 중외(中外)의 각지에 산재해 있는 본종(本宗)의 모든 사찰에 정재(淨財)를 시납(施納)케 하여, 매년 양회(兩會)에 걸쳐 법회(法會)를 여는 것을 연례화(年例化)하였다. 호두명수(虎頭名手)인 뛰어난 화가(畵家)를 모집하여 석가여래(釋迦如來)의 탱화와 장기이사(獎基二師)와 해동육조(海東六祖) 등의 영정을 일당(一㡧)에 모두 그려서 각각 그 절에 봉안하였다. 의학자(義學者)들로 하여금 성상(聖像)을 보고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키며, 공경함으로부터 신심(信心)을 내고, 신심이 견고함으로부터 지혜를 발하게 되는 것이라고, 날마다 상생정토(上生淨土)를 발원하도록 권장하였다. 수창원년(壽昌元年) 을해(乙亥) 10월에 성고(聖考)인 숙종께서 경사스럽게 종사(宗社)를 계습하였으며, 마음으로 깊이 불법(佛法)에 귀의하여 (결락) 왕명으로 스님을 청해 법주(法主)로 모시고, 잉왕경(仁王經)을 강설한 것은 천조(天祚)의 성업(聖業)을 기도하기 위함이었다. 수창 2년 12월 18일에 이르러 왕사께서 금산사 봉천원(奉天院)에서 심야에 경을 보다가 미질(微疾)이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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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지관, "금구 금산사 해덕왕사 진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52-53쪽.


입적

12월 금산사 남쪽 봉천원(奉天院)에서 입적하였다. 세수 58세, 법랍 47세였다. 숙종은 혜덕왕사(慧德王師)라는 시호를 내렸고, 탑호(塔號)는 진응(眞應)이라 하였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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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에 들기 하루전에 흰 무지개가 밤에 나타났으므로 식자(識者)들은 스님께서 임종하실 예고를 보인 것이라고 하였다. 산동(山僮)과 야로(野老)들이 울부짖지 않는 이가 없으며, 새와 짐승들도 서로 처참하였다. 이른 새벽에 입적하시니, 왕이 부음(訃音)을 듣고 크게 진도(震悼)하시고 입내봉어(入內奉御)인 왕하(王嘏)를 파견하여 조문(弔問)과 위로를 표하고, 다음날 우가승록(右街僧錄) 계통(繼通)과 사천감(司天監)이며 지태사국사(知太史局事)인 문상(文象) 등을 보내서 장사(葬事)를 감호(監護)토록 하였다. 27일에는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진위사(陳謂使)와 부상서(副尙書) 좌승(左丞)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인 김통(金統) 등을 보내어 새서(璽書)를 지참하고 가서 왕사로 진봉(進封)하고, 시호를 혜덕(慧德), 탑호를 진응(眞應)이라 하고, 아울러 자색(紫色) 바탕에 수를 놓은 가사(袈裟)와 여러 가지의 옷과 대기완(對器玩) 다향(茶香) 등 물류를 증사(贈賜)하였다. 신시(申時) (결락) 말에 절 서남쪽에서 다비(茶毗)하였다가, 다음 해 정월(正月) 11일 병신(丙申)에 절의 서북쪽으로 천장(遷葬)하여 유골을 안치하였는데, 이는 상법(像法)을 준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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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지관, "금구 금산사 해덕왕사 진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54-55쪽.


지식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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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김제 금산사 혜덕왕사탑비 소현 A는 B를 위한 비이다 A ekc:isSteleOf B
김제 금산사 혜덕왕사탑비 김제 금산사 A는 B에 있다 A edm:currentLocation B
이자연 소현 A는 B의 아버지이다 A ekc:hasSon B
해린 소현 A는 B의 스승이다 A ekc:hasDisciple B
소현 개성 해안사 A는 B에서 수행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소현 개성 복흥사 A는 B에서 수행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소현 개성 왕륜사 A는 B에서 수행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소현 개성 현화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소현 김제 금산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소현 법상종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김제 금산사 혜덕왕사탑비 고려 숙종 A는 B가 이름을 지었다 A dc:contributor B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1. 박현진, 『고려중기 혜덕왕사 소현의 활동과 불교사적 위치』, 전북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4, 5쪽.
  2. 박현진, 『고려중기 혜덕왕사 소현의 활동과 불교사적 위치』, 전북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4, 12쪽.
  3. 박현진, 『고려중기 혜덕왕사 소현의 활동과 불교사적 위치』, 전북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4, 17쪽.
  4. 박현진, 『고려중기 혜덕왕사 소현의 활동과 불교사적 위치』, 전북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4, 20-22쪽.
  5. 박현진, 『고려중기 혜덕왕사 소현의 활동과 불교사적 위치』, 전북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4, 23-24쪽.
  6. 박현진, 『고려중기 혜덕왕사 소현의 활동과 불교사적 위치』, 전북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4, 29쪽.
  7. 박상국, "소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 박상국, "소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박현진, 『고려중기 혜덕왕사 소현의 활동과 불교사적 위치』, 전북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4.
  • 이지관, "금구 금산사 해덕왕사 진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20-7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