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율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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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율희(蘇律熙)
대표명칭 소율희
한자표기 蘇律熙
영문명칭 So Yul-hui
생몰년 ?-?
이칭 김율희(金律熙)
출생지 김해



정의

신라 말 김해지방의 호족 세력.[1]

내용

개요

원래 김해 지방의 가장 유력한 호족 세력은 김인광(金仁匡)이었는데, 906년(효공왕 10)을 전후로 소충자(蘇忠子, 일명 蘇忠至)·소율희 형제가 새로 등장했다.[2] 김인광을 축출하고 세력을 장악하여 소충자가 김해부지군부사(金海府知軍府事)가 되었으며,[3] 907-911년 사이에는 소율희가 소충자의 대를 이어 김해부지군부사(金海府知軍府事)가 되었다.[4]

그 뒤 소율희는 김율희(金律熙)로 이름을 고쳤는데, 김율희는 '쇠유리'의 한자 표기로, 신라 말기에 와서 전래성(傳來姓)을 갖지 못한 지방의 피지배층 안에서 대두하던 호족 세력들이 새로운 성을 가지는 모습을 보여준다.[5]

그러나 소율희는 고려가 새로 건국해 태조왕건(王建)후백제견훤(甄萱)의 양대 세력이 낙동강 서쪽의 경상도 지역 일대에서 치열한 쟁탈전을 벌이기 시작할 무렵부터 점차 무력해졌고, 경애왕 대에 이르러 완전히 몰락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이 지역의 호족 세력들이 왕건을 지지하는 세력과 견훤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나뉘어 각축전을 벌였을 때, 소율희가 이미 잔존 세력으로서 방관자적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었던 신라와의 관계를 계속 유지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6]

선종 후원

소율희는 선종(禪宗) 승려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해 효공왕 때는 김해 지방이 선종의 요람지로 전국에 명성을 떨쳤다.[7] 그의 지원을 받은 대표 인물로 봉림산파(鳳林山派)를 개창한 심희(審希)가 있고, 그 밖에 사굴산파(闍崛山派)행적(行寂)이엄(利嚴)·충담(忠湛) 등과도 연결되었다.[8] 소율희의 세력이 몰락한 이후, 그의 후원을 받았던 선승(禪僧)들은 김해 지방을 떠나서도 각처에서 계속 활약함으로써 신라 말과 고려 초 불교계에서 주요 역할을 수행했다.[9]

소율희의 행적에 대해서는 행적봉화 태자사 낭공대사탑비(奉化 太子寺 朗空大師塔碑), 심희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비(昌原 鳳林寺址 眞鏡大師塔碑), 이엄해주 광조사 진철대사탑비(海州 廣照寺 眞澈大師塔碑) 등에 기록되어 있다.

Quote-left.png 이듬해(907, 천우 5, 효공왕 11) 늦여름에 갑자기 서울을 떠나 바닷가를 따라 잠시 노닐다가 김해부에 이르렀다. 김해부지군부사(金海府知軍府事)인 소충자(蘇忠子: 신라 효공왕 때 김해 지방의 세력가)와 그의 아우로 영군인 율희(律熙)가 옷깃을 여미어 풍화를 흠모하고 가슴을 열어 도를 사모하면서, 명사(名寺)에 머물기를 청하고 창생에게 복을 주기를 빌었다. 대사는 머물 만하다고 여기고 남모르게 자비의 교화를 베푸니 변방에서 요망한 기운을 쓸어버리고 산중에 단 이슬을 뿌렸다. Quote-right.png
출처: 임세권 저, 이우태 편저, 「태자사 낭공대사 백월서운탑비」, 『한국금석문집성 17 : 고려1 비문1』, 한국국학진흥원, 2014, 31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7 : 고려1 비문1",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Quote-left.png 얼마 뒤에 김해 서쪽에 복림(福林)이 있다는 말을 멀리서 듣고 홀연히 이 산을 떠나며 남쪽으로 가겠다고 말하였다. 진례에 도달하여 잠시 머뭇거리니 이에 ... 진례성제군사(進禮城諸軍事) 김율희(金律熙)가 있어 도를 흠모하는 정이 깊고 풍모를 득고 뜻이 간절하여 경계 밖에서 기다리다가 성 안으로 맞이하여 들어갔다. 그리고 사원을 고쳐서 스님이 머물러 줄 것을 요청하니 마치 고아가 자애로운 아비를 만나고 온갖 질병이 의왕(醫王)을 만난 듯 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하일식, 「봉림사 진경대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3 : 신라9 비문9』, 한국국학진흥원, 2014, 62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3 : 신라9 비문9",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Quote-left.png 이 때 스님은 부두의 한 구석에 배를 매어둔 채로 모든 것을 던져버리면서 잘 있으라 인사하고 이어 풍신(風神)인 병예(屛翳)에게 감사하고 동쪽으로 정처 없이 지나다가 김해(金海)까지 이르게 되었다. 마침 김해부(金海府) 지군사(知軍事) 소공(蘇公) 율희(律熙)의 귀의(歸依)를 받게 되었으니, 승광산(勝光山)중 연하(煙霞)의 절경(絶景)에 터를 잡아 절을 짓고 정성스러운 큰 뜻을 경주하여 이 절에 계시도록 청하였다. 마치 도리(桃李)나무는 구경꾼에게 찾아 오라고 불러들이지 아니하나 저절로 길이 생겨나는 것과 같이 또는 벼와 삼밭처럼 대중이 열을 지어 모여들었다. Quote-right.png
출처: "광조사진철대사비", 금석문 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



지식 관계망

  • 봉화 태자사 낭공대사탑비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소율희 행적 A는 B와 관련이 있다
소율희 심희 A는 B와 관련이 있다
소율희 이엄 A는 B와 관련이 있다
소율희 충담 A는 B와 관련이 있다
봉화 태자사 낭공대사탑비 소율희 A는 B를 기록하였다
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비 소율희 A는 B를 기록하였다
해주 광조사 진철대사탑비 소율희 A는 B를 기록하였다
봉화 태자사 낭공대사탑비 행적 A는 B를 위한 비이다
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비 심희 A는 B를 위한 비이다
해주 광조사 진철대사탑비 이엄 A는 B를 위한 비이다
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탑비 충담 A는 B를 위한 비이다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1. "소율희",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2. 최병헌, "소율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소율희",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4. 최병헌, "소율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5. 최병헌, "소율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6. 최병헌, "소율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7. 최병헌, "소율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8. "소율희",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9. 최병헌, "소율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 남재우, "김율희", 『디지털창원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최병헌, "소율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소율희",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