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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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호수(徐浩修)
한글팀 일러 조선중년문관.png
대표명칭 서호수
한자표기 徐浩修
생몰년 1736-1799
본관 대구(大邱)
시호 문민(文敏), 정헌(靖憲)
양직(養直)
시대 조선
국적 조선
대표저서 해동농서, 동국문헌비고, 연행기
대표직함 예조판서
서명응(徐命膺)
이정섭(李廷燮)의 딸 전주 이씨
자녀 서유구, 서유본


정의

서호수(徐浩修, 1736-1799)

내용

생애

서호수는 정조 동궁시의 빈료(賓僚)로서 정조의 즉위에 공로를 세운 서명응(徐命膺)의 아들로 가학(家學)을 계승하고 후대에 전달하였으며, 북학파의 학자로 규장각의 각종 편찬사업에 중추적 역할을 다하였다. 둘째아들인 서유구(徐有榘)가 가학을 계승, 다음 시대 북학자로 활약하면서 많은 업적을 쌓았다. 시호는 정헌(靖憲)이며 묘지명은 아우인 서영수(徐詠修)가 짓고 아들 서유본(徐有本)이 추기(追記)하였다.[1]

저술 및 편찬활동

1765년 식년 문과에 장원하였다. 1770년에는 영의정 홍봉한(洪鳳漢)과 함께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뒤 대사성·대사헌 등 청관직(淸官職)을 거쳐 당대 문화사업의 핵심 기관이었던 규장각의 직제학이 되었다. 이후 규장각의 여러 편찬사업에 주도적 역할을 다하였다.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의 기초가 된 『어제춘저록(御製春邸錄)』의 간행을 주관하기도 하였다.[2] 이 외에도 『해동농서』, 『국조역상고』 등의 책을 저술하였다.

두 차례의 사행

1776년에 사은부사(進賀兼謝恩副使)로서 이은(李溵)과 함께 청나라에 다녀왔다. 남인(南人)으로 우의정의 자리에 있던 채제공(蔡濟恭)과 소론(少論)의 명문이었던 그의 집안과의 갈등으로 일시 휴직했다가 1790년(정조 14)에 다시 진하 겸 사은부사로 두 번째 청나라에 사행(使行)하였다. 이 때의 여행일기가 『연행기(燕行紀)』이다.[3]
  1. 정옥자, "서호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정옥자, "서호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정옥자, "서호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