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숙종
숙종(肅宗)(仁祖) | |
대표명칭 | 숙종(肅宗)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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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仁祖 |
생몰년 | 1661년 8월 15일-1720년 6월 8일(음) 재위 1674년 8월 23일-1720년 6월 8일(음) |
본관 | 전주 이씨(全州 李氏) |
호 | 휘 광(爌) → 순(焞) |
자 | 명보(明普) |
출생지 | 경희궁 회상전(慶熙宮 會祥殿) |
사망지 | 경희궁 융복전(慶熙宮 隆福殿) |
시대 | 조선 |
대표직함 | 왕 |
배우자 | 정비 인경왕후 김씨(仁敬王后 金氏) 제1계비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 閔氏) |
부 | 현종(顯宗) |
모 | 명성왕후(明聖王后) |
자녀 | 6남 2녀, 경종(景宗), 연잉군(延礽君), 연령군(延龄君) |
전임자 | 현종(顯宗) |
후임자 | 경종(景宗) |
능묘 | 명릉(明陵) 37.6248054, 126.8998871 |
성격 | 인물 |
유형 | 왕 |
목차
정의
조선의 제19대 왕이다.
내용
현종의 장자이다. 재위 내내 붕당정치로 인해 혼란스러웠다. 당파 간의 견제와 대립을 역이용하여 정국을 이끌어가려고 노력하였다. 대동법(大同法)을 전국에 실행하고 국경 방비를 강화하였다.
생애
1661년(현종 2)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1] 원자의 보양관(輔養官)으로 송시열(宋時烈)ㆍ송준길(宋浚吉) 등이 임명되었다.[2] 처음 이름은 '광(爌)'이었는데 전한(前漢)의 이광(李廣) 수양제(隋煬帝)와 음이 같다 하여 '순(焞)'으로 고쳤다.[3] 7세 때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며,[4] 1671년(현종 12) 김만기(金晩基)의 딸과 혼인하였다.[5] 1674년(현종 15) 14세 때 현종이 죽어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하였다.[6] 숙종의 즉위 직전에는 갑인예송(甲寅禮訟)에서 남인(南人)의 주장이 채택되어 정국을 주도하였다. 숙종 즉위 이후에도 이러한 정국이 유지되어 송시열 등이 귀양가고 남인의 권력이 공고해졌다.[7] 그러나 남인의 집권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당시 남인의 영수였던 허적(許積)의 서자 허견(許堅)이 복선군(福善君) 등과 역모에 연루되었기 때문이다.[8] 이 사건은 경신환국(庚申換局) 또는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라 불렸고, 남인들이 대거 축출되었으며 허적 등은 사사되었다.[9] 이 해에는 또한 인경왕후가 죽고 다음해에 서인 민유중(閔維重)의 딸을 중전으로 맞이하여 서인의 권력은 더욱 공고해졌다.[10]
경종의 탄생은 환국의 불씨가 되었다.[11] 경종은 왕비 소생이 아니었으나 이때까지 왕자가 없었으므로 원자(元子)책봉 논의가 일었다. 이때 노론의 영수였던 송시열이 원자책봉이 이르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12] 이로 인하여 탄핵을 받고 사사되었다. 또한 인현왕후가 폐비되었으며,[13]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정권을 장악했다. 이 사건이 기사환국(己巳換局)이다. 그러나 남인은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인현왕후가 복위되고,[14] 서인이 재집권한 뒤에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남인은 정권에서 멀어졌다. 말년에 숙종의 병세가 심해져서 왕세자였던 경종에게 대리청정을 맡겼는데, 이때 노론 김창집(金昌集), 이이명(李頤命) 등은 연잉군(延礽君)을 지지하였으므로 노소당쟁이 격화되었다.[15] 숙종의 재위기간은 환국으로 수많은 백관이 사사되었지만 국가체제가 정비되기도 하였다. 1678년(숙종 4)에는 상평통보(常平通寶)가 주조되었으며, 대동법이 전국으로 확대 실시되었다. 또한 대보단(大報壇)을 설치하여 명(明) 신종(神宗)을 기리고 단종(端宗)을 왕으로 추증하였으며 소현세자의 빈인 강씨의 신원을 회복시키는 등 대명의리의 천명과 왕실인물의 재평가 작업이 이루어졌다.[16]
사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475-92번지에 숙종과 첫 번째 계비인 인현왕후 민씨, 두 번째 계비인 인원왕후 김씨의 능인 명릉(明陵)이 있다. 1970년 5월 26일 경릉(敬陵)ㆍ창릉(昌陵)ㆍ익릉(翼陵)ㆍ홍릉(弘陵)이 있는 고양 서오릉(西五陵)이 사적 제 204호로 지정되었다.[17]
거행 의례
숙종왕세자책례도감의궤[18], 숙종인경왕후가례도감의궤[19], 숙종인현왕후가례도감의궤, 숙종인원왕후가례도감의궤 [20]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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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숙종 | 인경왕후 | A는 B의 남편이다 | A ekc:hasWife B |
조선 숙종 | 인현왕후 | A는 B의 남편이다 | A ekc:hasWife B |
조선 숙종 | 인원왕후 | A는 B의 남편이다 | A ekc:hasWife B |
조선 숙종 | 왕 | A는 B에 해당한다 | A dcterms:type B |
조선 숙종 | 책례 | A는 B를 거행하였다 | A ekc:participates B |
조선 숙종 | 즉위 | A는 B를 거행하였다 | A ekc:participates B |
시간정보
시간 | 내용 |
---|---|
1667년 1월 22일 | 숙종의 왕세자 책례를 거행하였다 |
1674년 8월 23일 | 숙종은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
공간정보
위도 | 경도 | 내용 |
---|---|---|
37.578814 | 126.991084 | 창덕궁 인정문에서 숙종의 왕세자 책례를 거행하였다 |
37.578814 | 126.991084 | 창덕궁 인정문에서 숙종의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
시각자료
갤러리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인 명릉.[21]
주석
- ↑ 『顯宗實錄』 2년(1661) 8월 辛酉: 「元子生」
- ↑ 『顯宗實錄』 6년(1665) 6월 戊辰: 「引見大臣及備局諸臣」
- ↑ 『顯宗實錄』 7년(1666) 3월 乙巳: 「元子名改定以今御諱」
- ↑ 『顯宗實錄』 8년(1667) 1월 丁酉: 「上出御仁政殿冊封元子爲王世子如儀」
- ↑ 『顯宗實錄』 12년(1671) 3월 癸酉: 「上具遠遊冠絳紗袍御崇政殿冊金氏爲王世子嬪」
- ↑ 『肅宗實錄』 즉위년(1674) 8월 甲寅: 「王世子卽位於仁政門」
- ↑ 『肅宗實錄』 1년(1675) 1월 辛未: 「上御晝講」
- ↑ 『肅宗實錄』 6년(1680) 4월 甲子: 「鄭元老姜萬鐵上變書」
- ↑ 『肅宗實錄』 6년(1680) 5월 己亥: 「禁府啓曰」
- ↑ 『肅宗實錄』 7년(1681) 5월 甲寅: 「上御仁政殿遣正使金壽恒副使李䎘行冊妃禮」
- ↑ 『肅宗實錄』 14년(1688) 10월 丙寅: 「王子生」
- ↑ 『肅宗實錄』 15년(1689) 2월 己亥: 「奉朝賀宋時烈封疏二本使家人呈之」
- ↑ 『肅宗實錄』 15년(1689) 5월 己亥: 「頒敎于中外」
- ↑ 『肅宗實錄』 20년(1694) 6월 丁酉: 「上御仁政殿行冊妃禮」인정전
- ↑ 『肅宗實錄補闕正誤』 43년(1717) 7월 辛未: 「命王世子聽政」
- ↑ 『肅宗實錄』: 「行狀」
- ↑ "명릉", 문화재 검색,
『문화재청』online , 문화재청. - ↑ "숙종왕세자책례도감의궤", 의궤 검색,
『외규장각 의궤』online , 국립중앙박물관. - ↑ "숙종인경왕후가례도감의궤", 의궤 검색,
『외규장각 의궤』online , 국립중앙박물관. - ↑
"숙종인원왕후가례도감의궤", 의궤 검색,
『규장각한국학연구원』online ,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 "고양시 명릉", 문화재 검색,
『문화재청』online , 문화재청.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현종실록』
- 『숙종실록』
- 『숙종실록보궐정오』
- 김성우, 「17세기의 위기와 숙종대 사회상」, 『역사와 현실』 25, 한국역사연구회, 1997.
- 노대환, 「숙종ㆍ영조대 大明義理論의 정치ㆍ사회적 기능」, 『韓國文化』 32, 서울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 2003.
- 서성호, 「숙종대 정국의 추이와 정치세력」, 『역사와 현실』 9, 한국역사연구회, 1993.
- 성락훈, 「한국당쟁사」, 『한국문화사대계』 Ⅱ, 고려대학교민족문화연구소, 1965.
- 송양섭, 「숙종조의 재정ㆍ부세정책」, 『한국인물사연구』 9, 한국인물사연구소, 2008.
- 신지혜, 「조선조 숙종대 혼전조성과 그 특징에 관한 연구: 창경궁 문정전을 중심으로」, 『건축역사연구』 19, 한국건축역사학회, 2010.
- 이상식, 「숙종 초기의 왕권안정책과 경신환국」, 『朝鮮時代史學報』 33, 조선시대사학회, 2005.
- 이정철, 『대동법: 조선 최고의 개혁』, 역사비평사, 2010.
- 이태진 편, 『조선시대 정치사의 재조명』, 범조사, 1985.
- 주기평, 「『肅宗春坊日記』에 나타난 숙종의 세자 생활」, 『규장각』 33,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