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사
면사 (面紗)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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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면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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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面紗 |
구분 | 관 및 쓰개 |
착용신분 | 왕비, 왕세자빈, 왕세손빈, 왕녀, 외명부 |
착용성별 | 여성 |
정의
조선시대 상류층 여자들의 얼굴을 가리는 내외용 쓰개이다.[1]
내용
'면사(面紗)'는 '얼굴[面]을 가리는 사(紗)'라 하여 붙여졌다. 왕비, 왕세자빈, 왕세손빈 등 왕실 여성들은 가례와 같은 궁중 행사에 참석하거나 외출할 때 착용한다. 사각 보자기 모양이며 금박으로 길상(吉祥) 무늬를 입혀 장식한다. 면사의 중심부분을 머리 위에 얹어 늘어뜨리면 어깨를 가릴 정도의 길이이며, 『가례도감의궤(嘉禮都監儀軌)』와 『상방정례(尙方定例)』의 기록에 따르면 왕실 여성들의 면사는 빈 공간이 생겨 비쳐 얇고 비쳐보이는 직물인 라(羅)나 사(紗)로 제작하였다. 왕비와 왕세자빈, 왕세손빈은 자적색, 후궁ㆍ왕녀ㆍ군부인은 남색, 평민의 면사는 흑색이다.[2] 면사는 너울에 드리워진 얇은 천 부분을 지칭하기도 하여 조선 초기에는 너울과 혼용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후기에는 면사와 너울이 뚜렷이 구별되어 나타나고 있으며, 용도도 축소되어 혼례시 신부가 착용한 사실만 기록으로 남아있다. 『세종실록』3년(1421) 6월 기록과 『성종실록』2년(1471) 5월 기록에서 보면, 당시의 양반부녀자들은 외출 시 내외용으로 반드시 면사를 드리워야 했으며, 그렇지 않으면 기녀(妓女)로 오인받기도 했다. 평민들이 혼례에 착용한 면사는 개화기에 이르러서야 그 사례가 발견된다. 공주나 옹주의 예복이 평민들의 혼례에까지 확대되면서 이때 면사도 함께 허용되었으리라 추측하고 있다. 오늘날 신부의 베일을 '면사포'라고 하는 것도 여기서 유래한다. 우리나라의 전통 굿거리에서 무녀의 복식 중에 '너울가지'라 하여 면사와 같은 형태의 쓰개를 찾아볼 수 있다.[3]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왕비 | 면사 | A는 B를 착용하였다 | A ekc:wears B |
왕세자빈 | 면사 | A는 B를 착용하였다 | A ekc:wears B |
왕세손빈 | 면사 | A는 B를 착용하였다 | A ekc:wears B |
면사 | 홍장삼 | A는 B와 같이 착용하였다 | A ekc:goesWith B |
면사 | 의궤 | A는 B에 기록되어 있다 | A ekc:mentions B |
시간정보
공간정보
시각자료
갤러리
대례복에 면사를 착용한 모습.[4]
영상
주석
- ↑ 국립고궁박물관, 『왕실문화도감』, 국립고궁박물관, 2013, 223쪽.
- ↑ 국립고궁박물관, 『왕실문화도감』, 국립고궁박물관, 2013, 223쪽.
- ↑ 강순제·김미자·김정호·백영자·이은주·조우현·조효숙·홍나영, 『한국복식사전』, 민속원, 2015, 300쪽.
- ↑ 배화여자대학교 전통의상과 소장.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高美娟, 「韓國女性의 頭飾에 관한 硏究 -朝鮮時代를 中心으로-」, 숙명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3.
- 김아람, 「복식 고증을 통한 복온공주 혼례 친영반차도 구현」,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2.
- 김향선, 「조선시대의 내외용 쓰개류에 관한 고찰」, 세종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7.
-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海南尹氏 橘井公派 廣州出土 遺物』, 단국대학교 출판부, 2009.
- 류보영, 임상임, 「조선시대 여성 폐면용 쓰개의 특징 -박물관 유물을 중심으로-」, 『한국의류학회지』 26권 9·10호, 한국의류학회, 2002.
- 柳寶英, 「우리나라 女性의 쓰개에 관한 硏究-현존 유물을 중심으로-」, 원광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6.
- 李順成, 「朝鮮王朝時代 女性의 內外用 쓰개類에 關한 硏究」, 세종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9.
- 洪那英, 「여성 쓰개(蔽面)에 관한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