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효세자책례도감의궤
문효세자책례도감의궤 (文孝世子冊禮都監儀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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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문효세자책례도감의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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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文孝世子冊禮都監儀軌 |
주제 | 책례(冊禮) |
작성주체 | 책례도감(冊禮都監) |
의례담당자 | 서명선(徐命善) |
작성지역 | 한성부 |
작성시기 | 1784년(정조 8년) |
소장처(원소장처) | 국립중앙박물관(어람용) 규장각한국학연구원(오대산) |
판본 | 필사본 |
표기문자 | 한자, 이두 |
수량 | 어람용: 총 1책 198장(어람용) 태백산: 총 1책 196장 |
크기 | 어람용: 49.7×34.1 태백산: 47.0×33.3 |
도설 | 14면(채색) |
반차도 | 어람용: 12면(채색) 총 길이: 약 408㎝ 태백산: 11면(채색) 총 길이: 약 363㎝ |
목차
정의
1784년(정조 8) 문효세자(文孝世子)를 왕세자로 책봉한 책례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내용
정조는 정비인 효의왕후로부터 후사를 얻지 못해 1778년(정조 2) 6월에 혜경궁 홍씨의 뜻에 따라 홍낙춘(洪樂春)의 딸이자 홍국영(洪國榮)의 누이를 후궁으로 맞았으나 이듬해 죽었다. 그후 의빈 성씨(宜嬪 成氏)에게 1782년(정조 6) 9월 7일에 원자를 얻었다. 31세에 원자를 얻은 정조는 크게 기뻐하여 대왕대비와 혜경궁 홍씨에게 치사(致詞)를 올리고 원자의 태실을 경상도 예천에 조성하였으며, 원자의 생일에는 백성을 구휼하는 윤음을 내리기도 했다. 정조의 기쁨을 알아차린 백관들은 1784년(정조 8) 정월 초하루에 정조에게 신년하례를 드리면서 3세가 된 원자를 왕세자로 책봉할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정조는 과거 원자가 보통 7~8세 때에 왕세자 책례 의식을 거행했고, 자신도 8세에 왕세손이 된 점을 이유로 들어 기다리라고 하였다. 한동안 왕세자 책봉 문제는 잠잠했는데, 정조의 생신이 가까워 오면서 백관들이 다시 왕세자 책봉 문제를 꺼냈다. 그 배경에는 1779년(정조 3)에 홍국영이 종친 상계군 이담(常溪君 李湛)을 '가동궁(假東宮)'으로 부르면서 왕으로 추대하려는 역심을 품었다가 축출된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왕세자 책봉을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1784년(정조 8) 7월 2일에 원자 보양관 좌의정 이복원(李福源)을 비롯한 백관들이 왕세자 책봉을 권유하는 말을 꺼냈다. 정조가 동의를 하면서 비로소 왕세자 책봉 준비가 시작되었다.[1]
정조는 왕세자 책봉 의식을 간소화하되 '9가지 규례'는 지키라고 당부하였다. 그 내용은 책봉하는 길일을 선택하여 종묘에 고할 것, 대청에 나가 책문을 선포할 것, 신하들이 하례하는 전문을 올릴 것, 왕비에게 조알할 것, 백관들이 진하하는 전문을 올릴 것, 백관들이 동궁에게 하례할 것, 길일을 택하여 종묘에 배알할 것, 백관을 모아 연향례(宴享禮)를 치를 것, 내명부와 외명부를 모아 연향례를 치를 것 등 9가지이다. 1784년(정조 9) 7월 2일 문효세자의 왕세자 책봉을 위해 책례도감 운영의 여러 규정을 제정한 '책례도감사목(冊禮都監事目)'을 정조에게 올렸다. 8월 1일 예행연습인 습의(習儀)를 창덕궁 중희당에서 치뤘다. 중희당은 세자교육인 서연(書筵)을 위해 정조가 6년에 걸쳐 건설한 세자궁이었다. 책봉의식은 정조가 먼저 창덕궁 인정전에 나아가 책봉 사자(使者)[2]에게 죽책문을 주면 사자가 받아서 창덕궁 중희당에 있는 왕세자에게 전달하여 왕세자가 받는 수책례(受冊禮)의 의식으로 진행되었다.[3]
목록
전교(傳敎), 좌목(座目), 계사(啓辭), 예관(禮關), 의주(儀註), 이문(移文), 내관(來關), 품목(稟目), 감결(甘結), 서계(書啓), 상전(賞典), 의궤(儀軌), 일방(一房), 이방(二房), 삼방(三房), 별공작(別工作)
해제
김남윤, "문효세자책례도감의궤", 의궤 검색,
김남윤, "[1]", 의궤 검색,
판본
국립중앙박물관: 어람용(2651)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오대산본(奎 13200)
연계 자원 보러 가기 |
• 회화 문효세자책례계병(文孝世子冊禮契屛) |
• 회화 수교도(受敎圖) |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문효세자책례도감의궤 | 문효세자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문효세자책례도감의궤 | 왕세자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문효세자책례도감의궤 | 책례 | A는 B를 기록하였다 | A ekc:documents B |
문효세자책례도감의궤 | 국립중앙박물관 | A는 B에 소장되어 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문효세자책례도감의궤 |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A는 B에 소장되어 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시간정보
시간 | 내용 |
---|---|
1784년 8월 2일 | 문효세자의 책례가 거행되었다 |
1784년 8월 2일 | 문효세자의 수책례가 거행되었다 |
1784년 | 『문효세자책례도감의궤』가 편찬되었다 |
공간정보
위도 | 경도 | 내용 |
---|---|---|
37.579721 | 126.992259 | 창덕궁 중희당에서 문효세자의 책례 의식이 거행되었다 |
시각자료
가상현실
왕세자의 행렬
번호 | 이미지 | 대상 | 설명[4] | 복장/복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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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금(金) | 징 | 홍건(紅巾) 홍의(紅衣) | |
1-2 | 고(鼓) | 북 | 홍건(紅巾) 홍의(紅衣) | |
2 | 상마대(上馬臺) | 말에 탈 때 딛고 올라서는 발판 | 홍건(紅巾) 홍의(紅衣) | |
3 | 청개(靑蓋) | 푸른 비단으로 만든 양산 모양의 의장물 | 홍건(紅巾) 청의(靑衣) | |
3 | 청일산(靑日傘) | 청색 일산 | 청건(靑巾) 청의(靑衣) | |
4 | 연(輦)-문효세자(文孝世子) | 왕실에서 사용하는 지붕이 있는 가마로, 문효세자(文孝世子)가 타고 있다. | 왕세자의 대례복 | |
4 | 연배군(輦陪軍) | 왕의 가마를 메는 군사 | 흑건(黑巾) 흑의(黑衣) | |
5 | 청선(靑扇) | 청색 부채 | 청건(靑巾) 청의(靑衣) | |
6 | 별감(別監) | 호위를 맡았던 하급 군관 | 조건(皁巾) 직령(直領) |
도감 관원의 행렬
번호 | 이미지 | 대상 | 설명[5] | 복장/복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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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사령(使令) | 각 관청의 관원이 부리던 하인으로 호위와 시종을 담당함 | 백관의 융복 | |
1 | 서리(書吏) | 중앙 관아에 근무하던 하급 관원 | 무각평정건 단령 세조대 | |
2 | 도제조(都提調) | 육조의 속아문이나 군영 등에 두었던 정1품 관직으로, 문효세자 책례의 총책임자는 서명선(徐命善)이었다. | 백관의 조복 | |
3 | 제조(提調) | 당상관 이상의 관원이 없는 관아에 겸직으로 임명하여 각 관아를 실질적으로 통솔하던 직책 | 백관의 조복 | |
4 | 도청(都㕔) | 임시 관서인 도감의 관직 | 백관의 조복 | |
5 | 낭청(郎㕔) | 각 관서에서 차출하여 겸임시켰던 당하관의 실무 담당 관직 | 백관의 조복 | |
6 | 감조관(監造官) | 여러가지 왕실행사의 실무를 감독하는 관원 | 백관의 조복 | |
6 | 별공작(別工作) | 임시관서인 도감에 소속되어 각종 물건을 만들던 관서 | 백관의 조복 |
주석
- ↑ 한영우, 『조선왕조 의궤-국가의례와 그 기록』, 일지사, 2005, 389~390쪽.
- ↑ 어떤 사명을 맡아서 심부름을 하는 사람.
- ↑ 한영우, 『조선왕조 의궤-국가의례와 그 기록』, 일지사, 2005, 390~391쪽.
- ↑ 제송희, "문효세자책례도감의궤",
『외규장각 의궤』online , 국립중앙박물관. - ↑ 제송희, "문효세자책례도감의궤",
『외규장각 의궤』online , 국립중앙박물관.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김지영, 김문식 외 4명, 『즉위식, 국왕의 탄생』, 돌베개, 2013.
- 김문식, 신병주 저, 『조선 왕실기록문화의 꽃 의궤』, 돌베개, 2005.
- 서울대학교 규장각, 『규장각소장 분류별의궤해설집』, 서울대학교 규장각, 2005.
- 서울대학교 규장각, 『규장각소장 의궤 해제집(3)』, 서울대학교 규장각, 2005.
- 신명호, 『조선 왕실의 의례와 생활 궁중문화』, 돌베개, 2002.
- 한영우, 『조선왕조 의궤-국가의례와 그 기록』, 일지사,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