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 초상
정약용 초상 | |
한자명칭 | 丁若鏞 肖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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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김호석 |
제작시기 | 2009년 |
소장처 | 다산기념관 |
유형 | 초상 |
크기(세로×가로) | 178×96㎝ |
목차
정의
조선후기의 실학자 정약용(1762~1836)의 모습을 그린 초상.
내용
초상의 제작 및 보관
다산기념관의 <정약용 초상>은 강진군의 의뢰로 전통 초상화법의 대가인 김호석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교수가 그린 작품이다. 다산의 유배지인 강진군은 원래 경기도 남양주시에 걸린 다산 영정을 복제해 다산초당 등 에 걸어왔다. 하지만 기존 영정의 관모나 의상이 다산이 살았던 시대와 맞지 않다는 점이 지적되자, 약 8000만원의 군비를 들여 2008년 3월부터 새 영정 제작에 들어가 2009년 4월 17일 완성, 공개하였다.[1] 이후 다산초당, 다산기념관 등 강진군내 다산 관련 유적, 전시관에서 1974년 장우성 화백이 그린 〈정약용 표준영정〉을 대체하여 전시되고 있다.
초상화를 직접 제작한 김호석 교수는 “실학을 집대성한 대학자이기 때문에 새로운 관점으로 그리고자 했으며, 과거의 기록을 샅샅이 뒤졌다. 무엇보다도 다산이 18년간 강진에 머물면서 역사상 가장 많은 저서를 저술했고 현재도 가장 존경받는 지식인의 표상이 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고 말했다. 다산 후손인 ‘나주 정씨 월헌공파 종회’를 찾아가 참석한 300여 명 후손들의 인상을 직접 관찰하기도 했고, 특히 다산의 직계 후손 4명의 인상을 자세히 관찰, 그 특징을 이번 초상화에 참고했다고 덧붙였다. 또한 『사암선생연보』 등에 나타난 기록 또한 직접적인 참고자료가 되었다고 밝힌 김교수는, 다산이 어릴 적 천연두를 앓은 흔적으로 인해 눈썹이 세 갈래로 갈라져서 ‘삼미자(三眉子)’라고 스스로 별호를 지었다는 기록이며, 방대한 독서량과 저술로 인해 시력이 많이 악화되었다는 기록 등이었다고 구체적으로 제시했다.[2]
<정약용 초상>이 새롭게 제작된 후 영정 제작에 자문을 한 명지대 이태호 교수는 “유배 초기의 고뇌를 덜고 점차 학문에 전념하면서 편안해진 모습이 작품에 잘 표현됐다”고 평했고 김호석 교수는 새 영정은 무엇보다 철저한 역사적 고증을 거쳐 제작됐다고 강조했다.[3]
하지만 강진군이 2009년 새로 만든 다산 새 영정의 정부가 법적 절차를 통해 지정한 표준영정을 무시한 채 강진 자체만으로 영정을 제작한 것이라는 문제가 있었다. 이 때문에 새 영정이 정부문서나 다산의 고향인 경기도 남양주시, 다산의 후손인 나주 정씨 월헌종파 종회에서 외면당했고 군비 8000만원을 들여 강진만의 표준영정을 제작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4]
허유가 그린 <김정희 초상> 전신상은 우의적 의미를 지닌 일종의 분장 초상화로서 우리나라에서는 매우 희귀한 예이다.[5] 중국 송나라의 소동파를 그린 <동파입극도>를 본떠 그린 것이다. <동파입극도>는 소동파가 혜주(惠州)로 귀양살이 갔을 때 갓 쓰고 나막신 신은 평복 차림의 처연한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허유는 제주도 유배시절 추사의 모습을 보고 추사의 처연한 자태를 소동파의 모습을 빌어 표현했다.
이 작품이 유배 기간 중 어느 시기에 그려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권돈인이 허유에게 부탁하여 <동파입극도>를 제작하게 하고 제를 붙여 추사에게 보낸 때가 1847년 음력 7월 16일이므로, 그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화폭 우측에 ‘완당선생해천일립상(阮堂先生海天一笠像)’, 좌측에는 ‘허소치필(許小癡筆)’이라는 표제가 있는데 이는 나중에 오세창(吳世昌)이 쓴 것이다.[6]
소동파의 모습을 차용한 이 <김정희 초상> 전신상은 거의 예가 전하지 않는 초상화의 형태로 그 희귀성이 주목되며, 특히 김정희 자신이 존경했던 소식이라는 인물에 가탁하여 그려진 초상이라는 점에서 각벽한 의미를 가진다.
문헌에 기록된 외모
김정희의 외모에 관해서는 상유현(尙有鉉)이 13세 때 죽기 5개월 전의 추사를 만난 기록이 전한다. 상유현은 추사를 아래와 같이 묘사하였다.
키나 몸집은 작고 수염은 하얗고 눈동자는 빛났으며 머리카락은 없고 안색에도 붉은 기운이 돌았다. 또한 팔과 손가락은 가늘고 섬세하여 마치 아녀자같았다 | ||
출처: 유홍준, 『완당평전』2권, 학고재, 2002, 756~757쪽.[7] |
초상에 묘사된 모습
<김정희 초상> 완당선생해천일립상은 머리에는 삿갓을 쓰고 나막신을 신었다. 비스듬히 서서 한 손으로는 수염을 쓸어내리듯 잡고, 또 한 손으로는 옷자락을 잡고 있는 약간 어색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동파입극도> 중 왕춘파본을 차용한 모습이다. 허유는 <동파입극도 왕춘파본>에서 소동파의 상징적 지물과 포즈를 그대로 차용하고 얼굴 모습만 김정희의 얼굴로 바꾸어 초상을 그렸다. 김정희가 입은 옷은 거친 필치로 그려졌지만 얼굴은 부드러운 미소의 깔끔한 얼굴의 미남자로 그려져 유배생활의 풍파는 찾아볼 수 없는 이상화된 모습이다.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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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 초상(전신상) | 초상 | A는 B에 해당한다 | A dcterms:type B | ||||||
김정희 초상(전신상) | 김정희 | A는 B를 묘사하였다 | A ekc:depicts B | ||||||
김정희 초상(전신상) | 허유 | A는 B가 그렸다 | A dcterms:creator B | ||||||
김정희 초상(전신상) | 아모레퍼시픽 미술관 | A는 B에 소장되어 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
김정희 초상(전신상) | 동파입극도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
동파입극도 왕춘파본 | 허유 | A는 B가 그렸다 | A dcterms:creator B | ||||||
동파입극도 왕춘파본 | 소동파 | A는 B를 묘사하였다 | A ekc:depicts B | 권돈인 | [[동파입극도
|
추사방현기 | 김정희 | A는 B를 묘사하였다 | A ekc:depicts B |
전수만록 | 추사방현기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
상유현 | 전수만록 | A는 B가 썼다 | A dcterms:creator B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
공간정보
위도 | 경도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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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2600081 | 127.1080256 | 김정희 초상(전신상)은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에 소장되어있다. |
시각자료
주석
- ↑ 송하훈, "안경 쓴 다산 초상화 완성 공개",
『강진고을신문』online , 작성일: 2009년 04월 22일. - ↑ 조경륜, "다산 정약용 초상화, 강진서 고증 거쳐 새로 태어나다",
『광주일등뉴스』online , 작성일: 2009년 04월 17일. - ↑ 정대하, "돋보기안경 쓴 다산",
『한겨레』online , 작성일: 2009년 04월 17일. - ↑ 주학춘, "다산영정 이대로 갈 것인가<하>",
『한겨레』online , 작성일: 2003년 07월 30일. - ↑ 조선미, 『한국의 초상화, 形과 影의 예술』, 돌베게, 2009, 369쪽.
- ↑ 조선미, 『한국의 초상화, 形과 影의 예술』, 돌베게, 2009, 370쪽.
- ↑ 유홍준, 『완당평전』 2권, 학고재, 2002, 756~757쪽.
참고문헌
더 읽을거리
- 전시도록
- 국립중앙박물관, 『초상화의 비밀』, 국립중앙박물관, 2011.
- 단행본
- 문화재청, 『한국의 초상화- 역사 속의 인물과 조우하다』, 눌와, 2007.
- 논문
- 이가원, 「阮堂肖像小攷」, 『미술자료』 7호, 국립중앙박물관, 1963.
- 김상엽, 『小癡 許鍊(1808~1893)의 生涯와 繪畵活動 硏究』,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예술철학 박사학위논문,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