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창섭-정약용과 저술 관련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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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섭-정약용과 저술 관련 기사() | |
대표명칭 | 정창섭-정약용과 저술 관련 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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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정의
민족기록화 정창섭-정약용과 저술 관련 기사 고증과 관련된 자료들을 모은 기사
내용
다산초당 관련 오류
작품의 배경은 ⑤ 다산초당으로, 다산(茶山)은 초당이 있는 뒷산을 지칭하며 차나무가 많이 자생하였다고 한다.
해당 작품에서 다산초당은 기와집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다산이 거처했던 1808년~1818년에는 작은 초가집이었다고 한다.
1936년에 완전히 해체돼 폐허가 된 다산초당은, 1957년 다산유적보존회가 출범하면서 해남 윤씨와 강진 관내 유지들의 성금으로 지금의 기와집으로 새롭게 지어졌다.
다산초당이 있던 곳에 세워진 기와집은 5칸 도리단층으로 지어졌는데, 이는 작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곽재우는 그의 아버지인 곽월(郭越)이 명나라에 동지사(冬至使)로 갔을 때 황제가 하사한 붉은 비단의 철릭(帖裏)을 입고 정암진싸움에 임했다고 한다.
재우는 그 아비가 명나라 북경에 갔을 때에 황제가 하사한 붉은 비단 철릭을 입고서, 지금 장사(將士)들을 거느리고 의령현의 경내 및 낙동강 가를 마구 누비면서 왜적을 보면 그 수를 불문하고 반드시 말을 달려 돌격하니, 화살에 맞는 적이 많아서 그를 보면 바로 퇴각하여 달아나 감히 대항하지 못합니다. | ||
출처: 『선조실록』 선조 25년(1592년) 6월 28일. 온라인 참조: '경상우도 초유사 김성일이 의병이 일어난 일과 경상도 지역의 전투 상황을 보고하다', |
철릭은 저고리와 치마가 연결되어 있는 형태로, 허리 아래를 넓게 한 치마에 잔주름이 잡혀 있는 것이 특징이다.[2] 그러나 김태의 <김태-홍의장군 곽재우> 속에 묘사된 곽재우는 철릭 형태의 군복을 입고 있지 않다.
정약용 관련 오류
왜군들은 붉은 옷을 입은 곽재우의 모습을 보고 그를 홍의 장군(紅衣將軍)이라 불렀는데, 곽재우는 이 점을 역이용하여 자신과 몸집이 비슷한 부하들을 가려 뽑아 붉은 옷을 입혀 자신으로 위장해 곳곳에 배치했다고 한다.[3]
그러나 실제 작품에는 모든 병장들이 붉은 군복을 입고 등장한다.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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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 ↑ 『선조실록』 선조 25년(1592년) 6월 28일. 온라인 참조: '경상우도 초유사 김성일이 의병이 일어난 일과 경상도 지역의 전투 상황을 보고하다',
『조선왕조실록』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철릭",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문화콘텐츠닷컴』online , 한국콘텐츠진흥원. - ↑ "곽재우는 이 점을 역이용하여...배치했다고 한다." : "곽재우-홍의(紅衣) 장군, 민초들의 지킴이",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문화콘텐츠닷컴』online , 한국콘텐츠진흥원.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사료
- 『선조실록』 선조 25년(1592년) 6월 28일. 온라인 참조: '경상우도 초유사 김성일이 의병이 일어난 일과 경상도 지역의 전투 상황을 보고하다',
『조선왕조실록』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선조실록』 선조 25년(1592년) 6월 28일. 온라인 참조: '경상우도 초유사 김성일이 의병이 일어난 일과 경상도 지역의 전투 상황을 보고하다',
- 웹 자원
- "철릭",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문화콘텐츠닷컴』online , 한국콘텐츠진흥원. - "곽재우-홍의(紅衣) 장군, 민초들의 지킴이",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문화콘텐츠닷컴』online , 한국콘텐츠진흥원.
- "철릭",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유용한 정보
- 강신철, "민족기록화 대부분 사실과 달라", 『경향신문』, 작성일: 1980년 02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