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창폐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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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창폐불(會昌廢佛) | |
대표명칭 | 회창폐불 |
---|---|
한자표기 | 會昌廢佛 |
시대 | 842년-846년 |
관련인물 | 무염(無染), 범일(梵日) |
정의
중국 당(唐)나라 무종(武宗)의 회창 연간(會昌年間)에 있었던 불교 탄압.[1]
내용
개요
폐불(廢佛) 또는 파불(破佛)은 중국에서 있었던 불교 탄압을 말한다.[2] 도교 신봉자인 당 무종(武宗, 재위 840-846년)은 중국의 사대법난(四大法難) 중 가장 심한 '회창(會昌)의 폐불'을 일으켜 모두 4천 6백여 곳의 사찰을 폐찰하고 26만 5백명의 승려를 환속시켰으며 사원에 소속된 논밭을 몰수하여 많은 종파가 쇠락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3]
무종의 파불 상황에 대해서는 정사(正史)인 『구당서(舊唐書)』나 『자치통감(資治通鑑)』, 그리고 일본 승려인 엔닌(圓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상술되어 있다.[4]
신라 유학승과 폐불
낭혜화상 무염(朗慧和尙 無染, 801-888)은 821년(헌덕왕 13)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마곡산(麻谷山) 보철화상(寶徹和尙)에게서 법맥(法脈)을 이어받았다.[5] 이후 중국의 여러 곳을 다니면서 고독한 사람, 병고를 겪고 있는 사람, 가난한 사람들을 보살피다가,[6] 845년(문성왕 7) 폐불로 인해 신라에 귀국하였다.[7]
통효대사 범일(通曉大師 梵日)은 831년(흥덕왕 6) 당나라로 건너가 중국의 여러 고승들을 찾아 공부하였다.[8] 그러던 중 844년 회창폐불을 겪게 되고, 반년간 은거하면서 선정을 닦는 등 고난의 시기를 보내다가, 남종선(南宗禪)의 조사(祖師)인 혜능(慧能)의 영탑에 참배하기도 하였다.[9]
지식관계망
"그래프 삽입"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회창폐불 | 무염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회창폐불 | 범일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성주산문 | 무염 | A는 B가 개창하였다 | A ekc:founder B |
사굴산문 | 범일 | A는 B가 개창하였다 | A ekc:founder B |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 ↑ "회창의 폐불",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폐불",
『위키백과』online . - ↑ "파불",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장미란, 「당 무종의 불교정책과 선종」, 『한국선학』 Vol.25, 한국선학회, 2010, 238쪽.
- ↑ 김위석, "무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6년 5월 2일. - ↑ 한국사사전편찬회, 『한국고중세사사전』, 가람기획, 2007. 온라인 참조: "무염", 한국고중세사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최연식,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III,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온라인 참조: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금석문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 국립문화재연구소. - ↑ "범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정동락, 「통효 범일(810-889)의 생애에 대한 재검토」, 『민족문화논총』 Vol.24,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01, 74-7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