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태종무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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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무열왕(新羅 武烈王)
"선현의 표준영정", 『한민족정보마당』online한국문화정보원.
대표명칭 신라 무열왕
한자표기 新羅 武烈王
생몰년 603년-661년
이칭 김춘추(金春秋),태종(太宗)
시호 무열(武烈)
시대 신라
국적 신라
배우자 문명부인(文明夫人)
김용춘(金龍春)
천명부인(天明夫人)
자녀 법민(法敏),인문(仁問)
전임자 진덕여왕(眞德女王)
후임자 문무왕(文武王)
능묘 경주 무열왕릉
성격



정의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켜 삼국통일의 기초를 마련한 신라 제29대 왕.[1]

내용

재위 654∼661. 성은 김씨. 이름은 춘추(春秋). 진지왕의 손자로 이찬(伊飡) 용춘(龍春 또는 龍樹)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천명부인(天明夫人)으로 진평왕의 딸이다. 비는 문명부인(文明夫人)으로, 각찬(角飡, 角干) 김서현(金舒玄)의 딸, 즉 김유신(金庾信)의 누이동생 문희(文姬)이다.[2]재위한지 8년째 59세의 나이로 죽었으며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장사를 지냈다.

재위 전

삼국사기』에 따르면, 무열왕은 풍채가 영준하고 거동이 위엄 있었으며 어려서부터 세상을 다스리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642년에 딸인 고타소가 백제군에게 죽임을 당하자 직접 고구려로 가서 원병을 요청해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갚으려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고구려 사신으로 간 무열왕은 마목현죽령을 돌려달라는 고구려의 요구를 거절했다가 목숨을 빼앗길 위기에 놓여 있었는데, 고구려 왕의 총신인 선도해(先道解)에게 가져간 청포(靑布) 300보(步)를 뇌물로 주어 풀려날 방도를 구해 빠져나왔다. 이 때 선도해가 무열왕에게 알려준 계책으로 전해지는 것이 〈토끼전〉 등의 기원이 된 ‘구토설화(龜兔說話)’이다.[3]
진덕여왕이 즉위한 뒤에는 이찬(伊湌)의 직위에 있었는데, 648년(진덕여왕 2)에는 당나라에 사신으로 건너가 백제를 공격할 원병을 요청하여 당나라의 출병 약속을 받았다. 『삼국사기』에는 당시 당나라 왕제가 그의 풍채를 보고 신성한 인물이라며 곁에 두려고 했으나, 이를 사양하고 돌아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에는 무열왕이 당에 가서 황제에게 의대(衣帶)를 받아온 뒤부터 신라에서 당의 의복제도를 따르게 되었다고 나온다.[4]

재위 후

654년 진덕여왕이 후사가 없는 상태에서 죽자 이찬 알천(閼川)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다.[5]
무열왕은 즉위하던 해에 우선 아버지 용춘을 문흥대왕(文興大王)으로, 어머니 천명부인을 문정태후(文貞太后)로 추증하여 왕권의 정통성을 확립하였다. 그리고 이방부격(理方府格) 60여 조를 개정하는 등의 율령정치(律令政治)를 강화하였다.
655년(태종무열왕 2)에 원자(元子)인 법민(法敏)을 태자에 책봉함으로써 왕권의 안정을 꾀하였다. 한편, 아들 문왕(文王)을 이찬으로, 노차(老且 또는 老旦)를 해찬(海飡)으로, 인태(仁泰)를 각찬(角飡)으로, 지경(智鏡)과 개원(愷元)을 각각 이찬으로 관등을 올려줌으로써 자기의 권력기반을 강화시켰다.
656년에는 당나라로부터 귀국한 김인문(金仁問)을 군주(軍主)에, 658년에는 당나라로부터 귀국한 문왕을 집사부 중시(中侍)에 새로이 임명하여 직계 친족에 의한 지배체제를 구축하였다.
그리고 그의 즉위에 절대적인 기여를 한 김유신에 대해서는 660년에 상대등으로 임명해 왕권을 보다 전제화(專制化)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태종무열왕이 즉위하기 전인 중고시대의 상대등은 귀족회의의 대표자로서 왕권을 견제하는 존재이거나 왕위계승 경쟁자로서의 자격이 있었다.[6]

삼국통일의 기틀

655년에 고구려가 백제·말갈(靺鞨)과 연합해 신라 북경지방의 33성을 공취하자 신라는 당나라에 구원병을 청하였다. 이에 당나라의 정명진(程名振)과 소정방(蘇定方)의 군사가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또한 659년에는 백제가 자주 신라의 변경지방을 침범하므로 당나라의 군사를 청해 660년부터 본격적인 백제정벌을 추진하였다. 3월에 소정방을 비롯한 수륙(水陸) 13만명이 백제를 공격하여, 5월에 왕은 태자 법민유신·진주(眞珠)·천존(天存) 등과 더불어 친히 정병(精兵) 5만명을 이끌고 당군의 백제공격을 응원하였다.
7월에는 김유신황산벌[黃山之原]전투에서 계백(階伯)이 이끄는 5,000명의 백제군을 격파하고 당군과 연합해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泗沘城)을 함락시켰다. 이어서 웅진성(熊津城)으로 피난했던 의자왕과 왕자 부여 융(扶餘隆)의 항복을 받음으로써 마침내 백제를 멸망시킬 수 있었다. 이는 신라의 숙원이던 백제를 병합함으로써 반도통일(半島統一)의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신라 태종무열왕 김용춘 A는 아버지 B가 있다 A ekc:hasFather B
신라 태종무열왕 문명부인 A는 B의 남편이다 A ekc:hasWife B
신라 태종무열왕 법민 A는 아들 B를 두었다 A ekc:hasSon B
신라 태종무열왕 김인문 A는 아들 B를 두었다 A ekc:hasSon B
신라 태종무열왕 김유신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신라 태종무열왕 삼국사기 A는 B에 언급되었다 A ekc:isMentionedIn B
신라 태종무열왕 삼국유사 A는 B에 언급되었다 A ekc:isMentionedIn B
신라 태종무열왕 백제 의자왕 A는 B와 대립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신라 태종무열왕 신라 선덕여왕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신라 태종무열왕 신라 진덕여왕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1. "태종무열왕", 『doopedia』online, 두산백과.
  2. "태종무열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태종무열왕", 『doopedia』online, 두산백과.
  4. "태종무열왕", 『doopedia』online, 두산백과.
  5. "태종무열왕", 『doopedia』online, 두산백과.
  6. "태종무열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인용 및 참조

  1. 웹자원
    • "태종무열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태종무열왕", 『doopedia』online, 두산백과.
    • "김춘추", 네이버캐스트-인물한국사, 『네이버 지식백과』onl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