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사현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8월 26일 (토) 18:10 판
승형(承逈) |
|
|
대표명칭 |
승형 |
한자 |
承逈 |
생몰년 |
1172년(명종 2)-1221년(고종 8) |
시호 |
원진(圓眞) |
호 |
혜월(慧月) |
휘 |
승형(承逈) |
자 |
영회(永廻) |
성씨 |
신씨(申氏) |
승탑 |
포항 보경사 원진국사비 |
정의
고려시대의 승려
내용
성은 신씨(申氏). 자는 영형(永逈). 아버지는 통한(通漢)이며, 경상북도 상주 출신. 세살 때 고아가 되어 숙부인 시어사(侍御史) 광한(光漢) 밑에서 자라났다. 그리하여 스님은 3살 때 고아(孤兒)가 되어 숙부(叔父)인 시어사(侍御史) 광한(光漢)에 의해서 국양(鞠養)되었다
|
스님의 휘는 승형(承逈)이요, 자는 영회(永廻)이며, 속성은 신씨(申氏), 상락(上洛)의 산양(山陽)출신이다. 선대(先代)는 대대로 유가(儒家)이었다.아버지의 이름은 통한(通漢)이니, 이(以) (결락) 내급사(內給事)로 있다가 금성(錦城)군수(郡守)로 부임(赴任)하여 재임(在任) 중에 순직하였고,어머니도 또한 일찍 돌아가셨다.
|
|
출처:
|
출가수행
13세 때 문경 봉암사(鳳巖寺)에서 선사 동순(洞純)을 은사로 득도(得度)하였고, 이듬해 김제 금산사(金山寺) 계단(戒壇)에게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
7살 때 운문사(雲門寺) 연실선사(淵實禪師)를 은사로 하여 스님이 되었다. 모든 언행(言行)과 거지(擧止)가 모두 다른 아이들과 달랐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이 희세(希世)의 신동(神童)이라고 입을 모았다. 13살 적에 경상북도 문경군 가은면 원북리(院北里) 희양산(曦陽山) 봉암사(鳳嵓寺) 동순(洞純)스님을 은사로 하여 스님이 되었다. 다음 해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사(金山寺) 계단(戒壇)에서 비구계(比丘戒)를 받았다.
|
|
출처:
|
활동
1197년(명종 27) 스승 동순이 죽자 승과(僧科)를 포기하고 수도에 정진하였으나, 명종이 그의 뛰어난 도행을 듣고, 특별히 초선(初選)을 치르게 하였다.
|
정사년(丁巳年)봄 해마다 연례적(年例的)으로 개최하는 보제사(普濟寺) 담선법회(談禪法會)에 참석하고 있는 중, 순공(純公)이 입적하였다는 부고를 받고,장례식에 떠나기 전 시어사(侍御史)인 숙부(叔父)를 찾아가서 여쭙되, 인생은 마치 아침 이슬과 같고, 부귀는 또한 뜬 구름과 같아서, 저는 세상 살이가 마치 밀을 씹는 것과 같나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 스님께서 입적(入寂)하였으므로 곧 떠나서 나의 초지(初志)를 성취하리라 하고는, 석장(錫杖)을 짚고 곧바로 떠났다. 이때 명종(明宗)임금이 조회(朝會) 때 신하들로부터 스님의 도행(道行)이 고매하다는 보고를 듣고, 유사(有司)에게 조칙(詔勅)을 내려 스님의 도행을 초록(抄錄)하였으니, 이는 상례(常例)를 벗어난 조치인 것이다.
|
|
출처:
|
그 뒤 조계산 수선사(修禪社)의 지눌(知訥)에게서 법요(法要)를 받고 강릉 오대산에서 문수보살(文殊菩薩)에게 예배한 뒤 크게 감응을 얻었다. 또, 청평산에서 이자현(李資玄)의 유적을 찾다가 ‘『수능엄경(首楞嚴經)』은 마음의 본바탕을 밝히는 지름길’이라는 『문수원기(文殊院記)』를 읽고 마음 깊이 감명을 받아 『능엄경』을 열람하였다.
|
조계산(曹溪山)으로 가서 보조국사(普照國師)를 참방하고 법요(法要)를 물은 다음, 강원도 강릉군 오대산(五臺山)으로 가서 문수보살님 앞에서 예배기도(禮拜 祈禱)를 하고 명감(冥感)을 받았다. 이어 춘천(春川) 청평산(淸平山)으로 진락공(眞樂公)의 유적을 답사하면서 김부철(金富轍)이 지은문수사기(文殊寺記)를 살펴보니, 공(公)이 문인(門人)들에게 이르기를, 수능엄경(首楞嚴經)은 심종(心宗)을 증인(證印)한 것이므로, 불교의 진리를 발명(發明)함에 있어 중요한 내객(內客)이다라는 말을 보고, 크게 감동을 받았다.
|
|
출처:
|
1210년(희종 6)에 연법사(演法寺) 법회의 법주(法主)가 되어 선풍(禪風)을 떨치고, 1213년(강종 2)에 삼중대사(三重大師), 1214년(고종 1)에 선사(禪師)가 되었다.
|
태화(泰和) 8년 무진(戊辰)에 왕명으로 개골산(皆骨山) 유점사(楡岾寺)에 주지(住持)토록 하였다. 경오년(庚午年) 가을 당시 귀척(貴戚)들이 경기의 연법사(演法寺)에서 법회를 개설하고, 왕에게 주청(奏請)하여 스님을 법사(法師)로 모시기로 하고, 편지를 보내어 고청(固請)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경사(京師)로 나아갔다. 지금의 상국(相國)인 청하공(淸河公)이 문하(門下)의 잠리(簪履)수천 명을 데리고 나와 도성의 동쪽에 있는 곽주사(郭注寺)로 영접하되, 기꺼이 경개(傾盖)로 환대하고 구의(摳衣)의 예를 다하였으니, 마치 돌로써 물에 던짐에 문연(脗然)히 상합(相合)함과 같았다. 청하공(淸河公)은 이때부터 더욱 선풍(禪風)을 중(重)히 여겨 조계종의 법유(法乳)로 하여금 우리나라에 진작(振作)하는데 진력(盡力)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숙연(宿緣)의 소감(所感)이 아니겠는가?
강종 임금이 즉위한지 3년째 되던 해에(1213) 삼중대사(三重大師)의 법계를 비수(批受)케 함에 스님께서는 굳게 사양하여 피하고자 하였으나, 당시 진강공(晉康公)이 정승(政承)인 영상(領相)으로 있었고, 희종(熙宗) 임금도 스님에 대한 총애가 지극하였으므로 부득이(不得已) 비직(批職)을 받았다. 그리고 이 해 겨울에 임금께서 비전(秘殿)으로 스님을 초빙하여 선록(禪錄)을 점파(點破)함으로써 더욱 존경하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중사내시(中使內侍)대관서령(大官署令) 소경여(邵敬輿)를 보내어 스님이 주지(住持)하는 정사(精舍)를 중수하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스님께서 어느 때 풍악산(楓嶽山) 보덕굴(普德崛)에서 지낼 때, 특이(特異)한 꿈을 꾼 적이 있는데,지금에 미치고서야 그 꿈을 징험(徵驗)하게 되었다. 계유년(癸酉年)에 이르러 지금의 고종(高宗) 임금께서 천조(踐祚)하고 선왕(先王)인 강종의 뜻을 계승하여 2년 갑술(甲戌)에 곽주사(郭注寺)를 중수하여 낙성법회(落成法會)를 열어 선지(禪旨)를 크게 천양(闡揚)하고 선사(禪師)의 법계를 비수(批授)하였다.그리고 이 해 봄에 또 고종 임금이 스님을 비전(秘殿)으로 초청하여 상의직장(尙衣直長)동정(同正) 서치(徐稚)의 아들로써 자기 대신 삭발하여 스님이 되게 하였다. 다음 해 가을에 또 대선사(大禪師)의 법계를 비가(批加)하고, 조칙(詔勅)을 내려 동경(東京) 이내(理內)인 청하현(淸河縣) 보경사(寶鏡寺)에 주지(住持)토록 하였다
|
|
출처:
|
이듬해에 대선사(大禪師)가 되어 영일군 보경사(寶鏡寺)에 머물렀다. 1220년에는 희종의 넷째아들인 경지(鏡智)의 은사가 되었다.
입적
국사(國師)로 추증되었으며 비는 보경사에 있다. 시호는 원진(圓眞)이다.
지식관계망
"그래프 삽입"
관련항목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