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 (明成皇后國葬都監儀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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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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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明成皇后國葬都監儀軌 |
주제 | 흉례(凶禮) |
작성주체 | 국장도감(國葬都監) |
의례담당자 | 조병세(趙秉世) |
작성지역 | 한성부 |
작성시기 | 1898년(광무 2년) |
소장처(원소장처) | 규장각한국학연구원(어람용)(강화부) |
판본 | 필사본 |
표기문자 | 한자, 이두 |
수량 | 어람용: 총 4책 813장(제1책 248장, 제2책 299장, 제3책 147장, 제4책 119장) |
크기 | 31.2×25.4 |
도설 | 118면(제2책 64면, 제3책 52면, 제4책2면)(채색) 반차도: 제2책 111면(채색) |
반차도 | 111면(제2책)(채색) 총 길이: 약 2,819㎝ |
목차
정의
1898년 10월 7일 새벽에 일어난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경복궁 곤녕합(景福宮 坤寧閤)에서 일본 수비대 군인의 지원을 받는 자객들의 칼을 맞고 45세의 나이로 목숨을 거둔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장례를 치르는 국장(國葬)[1]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내용
1895년 8월 20일(음력) 고종비 명성황후(明成皇后 閔氏 가 일본인들에 의해 시해 당한 뒤, 왕세자와 궁녀들을 불러 시신을 확인한 다음 곤녕합 뒤의 녹원으로 시신을 옮겨 석유를 뿌려 불태웠다. 날이 밝자 우범선(禹範善)은 타다 남은 유골을 향원정(香園亭) 연못에 버리려고 했으나 부하인 윤석우(尹錫宇)가 수상하게 생각해 오운각(景福宮 五雲閣) 부근에 묻었다. 김홍집(金弘集)은 왕비의 죽음을 발표하지 않고, 1898년 10월 10일 서인으로 폐위시켰다. 왕세자가 반발하자 ‘빈(嬪)’으로 승격시켰다가, 11월 26일에 다시 ‘왕비’로 복위시키고, 1895년 12월 1일 황후가 시행당한지 55일 만에 발표했다. 윤석우가 매장한 몇 개 안되는 유골을 다시 발굴하여 회를 발라 억지로 시신을 만들고, 빈전은 [[경복궁 태원전으로 정하고, 혼전은 문경전(文慶殿)으로 정했다. 1895년 12월 3일에 목욕(沐浴)ㆍ습(襲)ㆍ소렴(小斂), 12월 5일에 대렴(大斂), 12월 8일에 성복(成服)을 했다. 산릉은 현종의 숭릉(崇陵) 부근으로 정하고, 12월 29일부터 공사가 시작됐다.[2] 당시 국장의 총 책임자인 총호사(摠護使)에는 궁내부특진관 조병세((趙秉世)가 임명되었는데, 1896년 3월 14일 해임되고 그 자리에 김병시(金炳始)가 임명되었다가 4월 6일에 다시 교체되었다. 국장도감 제조에는 이재완(李載完)ㆍ조병호(趙秉鎬)ㆍ민영달(閔泳達)이 임명되었으나 홍순형(洪淳馨)ㆍ이정로(李正魯)ㆍ민병석(閔丙奭)ㆍ김종한(金宗漢)ㆍ조동면(趙東冕) 등과 교체되고 재임되다가 마지막에는 조병호ㆍ민영달ㆍ홍순형이 작업을 완료하였다. 1896년 1월 27일에 도감의 작업을 중단하였다가 7월 25일에 빈전을 경운궁 경효전(慶運宮 景孝殿)으로 이봉하고 12월 7일에 이르러서야 다시 [[국장을 거행하게 되었다. 이 기간은 대체로 을미개혁(乙未改革)이 실패하고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하는 등 정국이 불안정한 상태였으므로 정상적인 국장 거행이 힘들었던 것으로 보인다.[3] 고종은 황제등극의례를 준비하면서 왕비의 장례식을 다시 준비해 장지도 청량리의 홍릉으로 결정했다. 1897년 10월 12일 황제등극의례를 거행하고, 명성왕후는 명성황후로 격상되었다. 홍릉의 산릉 공사도 진전되어 1897년 11월 21일에 발인하고 11월 22일에 하관해 2년 2개월간의 장례식을 마쳤다. 기록에 의하면 본 의궤는 1897년 10월 28일부터 수정을 시작하여 1898년 5월 20일에 편찬을 완료하였는데, 당시 총 7건을 제작하여 규장각ㆍ시강원ㆍ의정부ㆍ비서원ㆍ장례원ㆍ강화부ㆍ강릉 오대산에 보관하였다.
목록
제1책: 시일(時日), 좌목(座目), 조칙(詔勅), 장계(狀啓), 조회(照會) 내조(來照), 장례원통첩(掌禮院通牒), 훈령(訓令), 보고(報告), 감결(甘結), 상전(賞典)
제2책: 일방(一房), 이방(二房)
제3책: 삼방(三房), 부전(附箋)
제4책: 우주소(虞主所), 지석소(誌石所), 별공작(別工作), 포진소(鋪陳所), 배설소(排設所)
해제
판본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규장각(奎 13879)·(奎 13880)·(奎 13881)·(奎 13883)·(奎 13884)·(奎 14868)
일본 궁내청: (305-87)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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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 |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A는 B에 소장되어 있다 | |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 | 목욕 | A는 B를 기록하였다 | 1895년 12월 3일 |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 | 습 | A는 B를 기록하였다 | 1895년 12월 3일 |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 | 소렴 | A는 B를 기록하였다 | 1895년 12월 3일 |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 | 대렴 | A는 B를 기록하였다 | 1895년 12월 5일 |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 | 성복 | A는 B를 기록하였다 | 1895년 12월 8일 |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 | 발인 | A는 B를 기록하였다 | 1897년 11월 21일 |
시간정보
시간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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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10월 7일 새벽 | 명성황후가 경복궁 곤녕합에서 시해당했다 |
1898년 5월 20일 |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가 편찬되었다 |
공간정보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주석
- ↑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장례는 국장(國葬)이라하며, 세자와 세자빈 이하는 예장(禮葬)이라 한다.
- ↑ 한영우, 『조선 왕조 의궤-국가의례와 그 기록』, 일지사, 2005, 702~719쪽.
- ↑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
참고문헌
더 읽을거리
- 김문식, 신병주 저, 『조선 왕실기록문화의 꽃 의궤』, 돌베개, 2005.
- 서울대학교 규장각, 『규장각소장 분류별의궤해설집』, 서울대학교 규장각, 2005.
- 서울대학교 규장각, 『규장각소장 의궤 해제집(3)』, 서울대학교 규장각, 2005.
- 신명호, 『조선 왕실의 의례와 생활 궁중문화』, 돌베개, 2002.
- 이현진, 『왕의 죽음, 정조의 국장』, 글항아리, 2015.
- 이현진, 『조선 왕실의 상장례』, 신구문화사, 2017.
- 한영우, 『조선 왕조 의궤-국가의례와 그 기록』, 일지사,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