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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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린(宗璘) | |
대표명칭 | 종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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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Jongrin |
한자 | 宗璘 |
생몰년 | 1127년(인종 5)-1179년(명종 9) |
시호 | 현오(玄悟) |
자 | 중지(重之) |
성씨 | 왕씨(王氏) |
승탑비 | 용인 서봉사지 현오국사탑비 |
목차
정의
고려시대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휘는 종린(宗璘), 자는 중지(重之), 속성은 왕(王)씨로 고려 17대 국왕 인종(仁宗)의 아들이다.[1]
스님의 휘는 종린(宗璘)이요, 자는 중지(重之)며 속성은 왕씨(王氏)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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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출가수행
13세에 승려가 되고자 하였다. 이에 의천(義天)의 유풍을 이을 사람이 없을까 염려하던 인종은 징엄(澄儼)에게 명하여 불일사(佛日寺)에서 1141년(인종 19) 수계(授戒)하게 하였다.[2]
활동
인종이 항상 궁궐 내 도량으로 종린을 초빙하여 강론을 들었다. 이후 의종이 즉위하자 종린을 1146년에 수좌(首座)로 진급시켰다. 그 후 귀신사, 국태사, 중흥사, 부석사 등에 주지하는 동안에도 검소하여 방장실 안에 10전(錢) 값어치의 저축물도 없었으므로 사부대중이 모두 존경하였다. 이에 임금이 승통(僧統)으로 추대하였다.[3]
1171년(명종 1) 임금이 만수가사(滿繡袈裟) 1벌을 하사하고 그해 겨울 백고좌회(百高座會)를 열고 스님을 청해 강설을 듣은 후 임금이 좌세(佐世)라는 호를 내리고, 내전에 불러서 가사 한 벌을 하사하였다. 이때 의종의 아우인 충희(冲曦)를 출가시켰다.[4]
신묘년(辛卯年) 가을에 내전(內殿)으로 초빙하여 만수가사(滿繡袈裟) 한 바탕을 하사하였다. 그 해 겨울에 이르러 백고좌회(百高座會)를 열고, 스님으로 하여금 (결락) 월(月)에 조금 몸이 불편하므로 문인(門人)이 의사를 청하니, 스님께서 이르되 (결락) 지(之) (결락) 의(矣) (결락) 미(未) (결락) 의사를 부르지 못하게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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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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