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안성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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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KS장동룡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8월 16일 (수) 01:38 판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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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안대첩(延安大捷)
대표명칭 연안대첩
한자표기 延安大捷
이칭 연안성싸움
유형 전투
시대 조선
날짜 1592년(조선 선조 25)
관련인물 이정암,김대정
관련장소 연안읍성 (황해남도 연안군 연안읍)


정의

임진왜란 때 초토사 이정암(李廷馣)이 의병을 이끌고 황해도 연안성(延安城)에서 왜군을 맞아 물리친 싸움.

내용

임진왜란 당시 이조참의였던 이정암은 관직에서 해직된 뒤에도 개성유수인 아우 정형(廷馨)과 개성을 지킬 것을 다짐하였으나 임진강의 방어선이 무너지자 이를 포기하고 연안성으로 들어갔다. 연안 부사로 재직한 적이 있는 이정암을 따라 부민들이 모여 들어 500여명을 의병을 조직하였다.
왕세자인 광해군으로부터 초토사로 임명된 이정암은 의병 약속(義兵約束)으로 8개 항을 제시하였다.
첫째, 적진에 임하여 패하여 물러가는 자는 참수한다. 둘째, 민간에게 폐를 끼치는 자는 참수한다. 셌째, 주장(主將)의 일시의 명령이라도 어기는 자는 참수한다. 넷째, 군기를 누설한 자는 참수한다. 다섯째, 처음에 약속했다가 후에 가서 배반하는 자는 참수한다. 여섯째, 논상할 때 적을 사살한 것을 으뜸으로 하고 목을 베는 것을 그 다음으로 한다. 일곱째, 적의 재물을 얻은 것은 모두 상금으로 준다. 여덟째, 남의 공을 빼앗은 자는 비록 공이 있다 해도 상을 주지 않는다.
1592년 8월 27일 해주에 본거지를 둔 왜장 구로타(黑田長政)가 5,000여명의 군대를 이끌고 침입하여, 4일 밤낮으로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진 끝에 왜군은 크게 패하여 무수한 인명 피해, 병기·군량 등의 손실을 보았다.
초토사 이정암은 대첩의 상보(詳報)를 올리지 않고 단지 "모일(某日)에 성을 포위했다가 모일에 풀고 갔다(某日圍城某日解去)"라는 여덟 글자만 행재소에 전하였으나, 사실이 곧 알려져 초토사 이하 유공장병은 상직을 받고, 이정암은 본도 순찰사에 임명되었다.
이 승리로 황해도를 떠돌던 백성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도피한 수령들도 본읍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또한 조선 선조가 머물던 행재소와 단절되었던 충청도, 전라도와 연락망이 재개되었다.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이정암 연안성싸움 A은 B에 참가하였다 1592년
김대정 연안성싸움 A은 B에 참가하였다 1592년
장응기 연안성싸움 A은 B에 참가하였다 1592년
조종남 연안성싸움 A은 B에 참가하였다 1592년
조서룡 연안성싸움 A은 B에 참가하였다 1592년
봉요신 연안성싸움 A은 B에 참가하였다 1592년
연안성싸움 연안읍성 A는 B를 배경으로 한다 1592년
조헌 연안성싸움 A는 B과 관련이있다
신각 연안성싸움 A는 B과 관련이있다
연성대첩비 연안성싸움 A는 B를 기념한다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주석

  1. "연성대첩비", 『네이버지식백과』online조선향토대백과.
  2. "연성대첩비", 『원각사성보박물관』online원각사.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1. 웹자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