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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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리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8월 14일 (월) 22:05 판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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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철(惠哲)
BHST Monk1.png
대표명칭 혜철
한자 惠哲
생몰년 785년(원성왕 1)-861년(경문왕 1)
시호 적인(寂忍)
혜철(慧徹)
법명 혜철(惠哲)
탑호 조륜청정(照輪淸淨)
체공(體空)
이칭 동리화상(桐裏和尙)
성씨 박씨(朴氏)
출신지 경상북도 경주
승탑 곡성 태안사 적인선사탑



정의

신라시대의 승려

내용

혜철은 어려서 출가하여 영주 부석사(浮石寺)에서 화엄학을 배우고, 806년(애장왕 7) 22세에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1] 선법이 전해지기 전인 814년(헌덕왕 6)에 당나라로 갔으며, 마조(馬祖)의 제자이자 남종선(南宗禪) 계통의 선사인 지장선사(地藏禪師) 문하에서 선법(禪法)을 전해 받았다.[2][3]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제9권의 기록에 의하면, 지장의 법통을 전수받은 자 넷 가운데 셋이 신라인으로서 계림의 도의선사(道義禪師), 신라국의 홍직선사(洪直禪師)와 혜선사(慧禪師)라고 적고 있으며, 혜철의 탑비에는 그가 지장을 만나서 한 말이 기록되어 있다.[4]

Quote-left.png 지장대사는 여래장을 열어 보살심을 얻고 오랫동안 西堂에 머물며 여러가지로 오는 자를 가르치니 대략 만 명을 헤아렸는데 하나를 배워 열을 알지 아니함이 없었다. 선사가 말하기를 “소생은 외국에서 태어나 천지 간에 길을 물어 중국을 멀다 아니하고 찾아와서 배우기를 청합니다. 다만 훗날 無說之說과 無法之法이 바다 밖(신라)에 유포되면 그것으로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대사는 (선사의) 뜻이 이미 굳고 품성이 잘 깨달을 만함을 알고 한 번 보고도 옛날부터 안 것 같아 비밀히 심인을 전하였다. 이에 선사는 이미 赤水에서 잃은 구슬을 얻은 듯 마음에 환히 깨달으니 태허의 끝없이 넓음과 같았다. 무릇 오랑캐와 중국의 말이 다르지만 중심되는 실마리와 숨은 이치는 도끼자루를 베는 데 도끼를 잡지 않는다면 누가 이에 함께 할 수 있겠는가. Quote-right.png
출처:


지장이 입적하자 공공산(龔公山)을 떠나 중국의 명산대찰(名山大刹)을 두루 순례하다가, 서주(西州) 부사사(浮沙寺)에 자리잡고 3년 동안 대장경을 열람한 다음 839년(문성왕 1)에 귀국하였다.[5] 귀국 후 쌍봉사(雙峰寺)에서 하안거(夏安居)를 지냈으며,[6] 대안사(大安寺)에서 법회를 베풀어 동리산파(桐裡山派)의 개조(開祖)가 되었다.[7]

지식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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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1. 곽철환,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 온라인 참조: "혜철", 용어해설,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2. 김영길, "혜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곽철환,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 온라인 참조: "혜철", 용어해설,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4. 김영길, "혜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5. 김영길, "혜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6. 곽철환,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 온라인 참조: "쌍봉사", 용어해설,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7. "혜철",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참고문헌

  • 이지관, "곡성 대안사 적인선사 조륜청정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신라편,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74-93쪽.
  • 한국고대사회연구소, 「대안사 적인선사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제3책 통일신라,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온라인 참조: "대안사 적인선사탑비 해석문",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