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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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미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8월 9일 (수) 21:07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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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서명응(1716∼1787)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내용

생애

본관은 대구(大邱). 자는 군수(君受). 보만재(保晩齋)라는 호를 정조로부터 내려 받았다. 판서 서성(徐渻)의 5세손이고, 남원부사 서정리(徐貞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참찬 서문유(徐文裕)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서종옥(徐宗玉)이며, 어머니는 이집(李㙫)의 딸이다. 영의정 서명선(徐命善)의 형이다.

활동사항

1754년(영조 30)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부제학(副提學)·이조판서를 거친 뒤, 청나라 연경(燕京)에 사행하여 다녀왔다. 그 뒤 대제학을 거쳐 상신(相臣: 정승)에 오르고 봉조하(奉朝賀)에 이르렀다. 박학강기(博學强記)로 이름났으며 역학(易學)에도 조예가 깊었다. 정조가 동궁에 있을 때 빈객(賓客)으로 초치되어 학문 수련에 큰 도움을 주었다. 정조 즉위 직후 규장각이 세워졌을 때 제학(提學)에 첫번째로 임명되었으며, 죽을 때까지 규장각 운영에 절대적인 찬획(贊劃: 영향)을 끼쳤다. 흔히 북학파(北學派)의 비조(鼻祖)로 일컬어지며,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추구하는 학문 정신은 아들 서호수(徐浩修), 손자 서유구(徐有榘)에로 이어져 가학(家學)의 전통이 세워지기도 하였다. [1]

악보 편찬

1759년(영조 35) 당시 왕명으로 진행된 악보 편찬사업을 주관하였으며, 장악원(掌樂院)의 악사들과 함께 세종·세조 때의 궁중음악의 악곡들을 수집·정리하여 『대악전보』와 『대악후보』를 편찬했다. 『대악전보』는 1894년(고종 31) 청일전쟁 때 없어졌다. 7권 7책의 『대악후보』에는 세조 때의 악곡들이 전한다. 영조(1724~1776) 때 그는 홍계희(洪啓禧)와 함께 궁중의식을 위한 악장집인 『국조악장』(國朝樂章)을 편찬하였다. [2]

조선후기 방대한 분량의 악서를 남겼고, 이미 영조 때 『동국문헌비고』의 악고(樂考)를 지었다. 정조대의 『시악화성』(詩樂和聲)·『국조시악』(國朝詩樂)·『악통』(樂通)과 같은 음악이론서는 모두 서명응이 정조의 명을 받들어 저술한 악서(樂書)이다. 정조가 악학에 조예가 깊었고, 또한 학문의 여러 분야에 정통한 것은 모두 동궁시절 스승이었던 서명응의 영향에 기인한다.[3]
  1. "서명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송방송, 『한겨레음악대사전』, 보고사, 2012. 온라인 참조:"서명응",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3. 송방송, 『한겨레음악대사전』, 보고사, 2012. 온라인 참조:"서명응", 『네이버 지식백과』onl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