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명효황후 민씨
정의
여흥 민씨 민태호의 딸로 1882년 조선 순종과 혼례를 올렸다. 1987년 황태자비로 책봉되었으나 1904년 경운궁의 강태실에서 33세의 나이로 죽었다.[1]
내용
순명효황후의 생애
순명효황후 민씨는 대제학을 지낸 민태호의 딸로 1882년, 11세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된다. 순종의 어머니인 명성황후는 자신의 집안인 여흥 민씨의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같은 집안 출신인 순명효황후 민씨를 간택한다.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순명효황후의 아버지 민태호가 살해당하고 그녀의 오빠 민영익이 크게 다치는 등 그녀의 집안은 큰 화를 입게 된다. 게다가 임신하지도 못해 궁중생활이 순탄지 못했으며, 1895년 그녀의 버팀목이었던 명성황후의 죽음(을미사면)으로 충격을 받아 마음의 병을 앓는다. 조선 순종이 즉위하기 전인 1904년 33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한다. 조선 순종이 즉위한 1907년에 황후로 추대되었다. [2]
순종과 순명효황후 민씨의 결혼
1882년 조선 순종과 순명효황후 민씨의 결혼식(가례)이 열렸다. 조선 순종의 첫번째 가례로 당시 세자빈 후보의 명단인 간택단자에 그녀의 이름이 나온다. 당시 혼례에 쓰인 물품이나 예식의 진행상황을 상세히 적어 기록한 발기가 여러개 전해져 온다. 그 중 상궁이나 나인들이 보기 위해 한글로 작성된 것들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왕세자빈 의대 발기, 각색 인문보 발기, 왕세자 가례 차비관 발기, 왕세자 흉배 패물 발기, 왕세자 관례 상차림 발기, 왕세자 관례 상격 발기 등이 있다.
김상덕과 한글편지
순명효황후 민씨이 김상덕에게 보낸 11편의 편지가 경주김씨 직각종택에 소장되어 있다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기증되었다. 김상덕은 순종의 세자 시절 스승으로 순명효황후 민씨에게도 글을 가르쳐주었기 때문에 그녀는 김상덕을 친아버지처럼 따르며 여러번 편지를 보냈다. 시어머니 명성황후의 영향을 받아 글씨가 아름답고, 당시 혼란스러운 나라를 걱정하는 내용이 자주 등장한다. 대표적인 것이 순명효황후 한글편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