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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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유관
(遠遊冠)
[[file:|360px|thumb|center|오륜대 순교자기념박물관 소장.]]
대표명칭 원유관
한자표기 遠遊冠
착용신분 왕, 왕세자
착용성별



정의

조선시대 왕세자조복(朝服)을 입을 때 착용하는 관모이다.

내용

복식 구성

착용신분

조선에서는 황태자, , 왕세자, 왕세손이 착용했다.[2]

착용상황

조회를 지낼 때 입는 복식 일습인 조복을 착용할 때 쓰는 관이다.

형태

조선의 원유관은 흑색 라로 만들고, 9량이다. 매 양에는 18개의 옥이 있는데 앞에 9개, 뒤에 9개의 옥이 황(黃)색, 창(蒼)색, 백(白)색, 주(朱)색, 흑(黑)색이며 금비녀를 꽂고, 주색끈 2개를 양 끝에 붙여 턱 아래에서 묶고 나머지를 늘어뜨린다.[3]
조선의 왕세자원유관은 모라(毛羅)로 싸고 양끝에는 주색 끈이 있어 전하의 관과 같다. 8량이며 매 양에는 앞뒤로 각 8개의 옥을 3가지 색으로 한다.[4]
조선의 왕세손원유관은 7량이며 앞뒤로 각 7개의 옥을 3가지 색으로 한다.[5]
대한제국 황태자원유관은 오사(烏紗)로 덮고, 앞뒤 각 9봉(縫)이 있으며 매 봉마다 다섯 가지 옥을 9봉 부착하며, 양 옆에 주색 영을 매고 금잠을 꽂으며, 잠을 꽂는 부분과 영을 매는 주위는 모두 금으로 장식한다. [6]
대한제국 고종황제로 등극하면서 통천관(通天冠)을 착용했기 때문에, 이 착용한던 9량 원유관은 황태자가 착용했다.[7]

기타

유래
진(秦)이 통일을 한 후 신하들에게 점령국 군주의 관을 나눠주면서 생겨났으며, 우리나라에는 고려시대 공민왕 19년(홍무 3년) 5월 명 태조가 7량 원유관과 강사포 사여하면서 전래되었다.[8] 조선시대에는 세종 20년 10월 4일 9량 원유관복 사여된 기록이 있다.[9]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대명집례 원유관 A는 B를 기록한다
대명회전 원유관 A는 B를 기록한다
송사 원유관 A는 B를 기록한다
진서 원유관 A는 B를 기록한다
고려사 원유관 A는 B를 기록한다
국조오례의서례 원유관 A는 B를 기록한다
원유관 조복 A는 B의 일습이다
황태자 원유관 A는 B를 착용한다
원유관 A는 B를 착용한다
왕세자 원유관 A는 B를 착용한다
왕세손 원유관 A는 B를 착용한다

시각자료

갤러리

영상

주석

  1. 오륜대 한국순교자박물관관 소장.
  2. 『晉書』 s「輿服志 第35」, “逺逰冠, 傅玄云: 秦冠也, 似通天, 而前無山述, 有展筩横于冠前. 皇太子及王者․後帝之兄弟․帝之子․封郡王者服之. 諸王加官者自服其官之冠服, 惟太子及王者後常冠焉, 太子則以翠羽爲緌, 綴以白珠, 其餘但青絲而已.”
  3. 『國朝五禮儀序例』 卷2, <冠服圖說>, “冠以羅爲之, 其色玄, 九梁, 每梁十八玉, 前九玉後九玉, 五采先黃次蒼次白次朱次黑, 金簪, 用朱組二屬之於兩旁, 結之頷下, 而垂其餘.”
  4. 『國朝續五禮儀補序例』, 卷2, 「王世子遠遊冠服圖說」, “冠以毛羅裹之, 兩旁朱組制同殿下冠, 而惟冠梁八, 每梁前後各八玉三采.”
  5. 『國朝續五禮儀補序例』, 卷2, 「王世子遠遊冠服圖說」, “王世孫冠梁七, 每梁前後各七玉三采.”
  6. 『禮服』 ,「皇太子遠遊冠絳紗袍」, “冠制: 冠烏紗冒之, 前後各九縫, 每縫五采玉九縫, 及冠武並貫簪繫纓處 皆飾以金 金簪朱纓.”
  7. 최규순, 「황제와 황후의 복식, 어떻게 변화했나」, 『대한제국 잊혀진 100년 전의 황제국』, 2010, 264~269쪽.
  8. 『高麗史』, 卷72, 「志輿服 1」, ‘1370년 5월 미상(음), 공민왕 19년’, “恭愍王 十九年五月: 太祖高皇帝, 賜遠遊冠七梁, 加金博山, 附蟬七首, 上施珠翠, 犀簪導. 絳紗袍, 紅裳, 白紗中單, 黑領靑緣袖, 裙, 襦, 紗蔽膝, 白假帶, 方心曲領, 紅革帶, 金鉤䚢, 白襪黑舃, 受群臣朝賀服之.”
  9. 『朝鮮王朝實錄』 「世宗 20年 10月4日」, “藝文大提學洪汝方齎勅及欽賜冠服, 回自京師, 上率百官迎勅如儀. 其勑曰: ‘今賜王遠遊冠服, 至可領也.’ 賜汝方鞍馬, 設宴慰之.”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더 읽을거리

유용한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