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위 인각사지
군위 인각사지 (軍威 麟角寺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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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군위 인각사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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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軍威 麟角寺址 |
주소 | 경상북도 군위군 고로면 삼국유사로 250(화북리 612) |
문화재 지정번호 | 사적 제374호 |
문화재 지정일 | 1992년 05월 28일 |
교구정보 | 대한불교조계종 |
건립시기 | 642년 |
경내문화재 | 군위 인각사 보각국사비, 군위 인각사 보각국사탑, 군위 인각사 삼층석탑, 군위 인각사 미륵당 석불좌상, 군위 인각사 석불좌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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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경상북도 군위군 고로면 화북리에 있는 고려시대 절로 동화사의 말사이다.[1][2]
내용
역사
인각사의 창건과 관련해서는 두 가지 설이있다. 하나는 642년에 의상이 창건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643년에 원효가 창건했다는 것이다.[3][4] 1284년에는 인각사가 일연의 하산소[5]로 지정되었다. 일연은 인각사에 5년간 머무르면서 나라의 후원을 받아 절을 크게 중창하였고[6], 두 번에 걸쳐 구산선문회를 열면서 인각사가 구산선문의 중심사찰이 되도록 하였다.[7] 또한 이곳에서 삼국유사를 저술하기도 하였다. 1362년(공민왕 11)에는 본당 뒤에 무무당이 건립되어 총림법회가 열리기도 했다.
1407년에는 인각사가 조계종의 자복사찰[8]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이후 점점 사세가 기울어[9], 1555년에는 인각사의 토지가 임고서원에 이속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대부분의 전각이 불에 타서 폐사상태에 이르렀고, 1721년에 다시 중수하였다.[10][11] 1890년에는 일연의 승탑지에 조상의 묘를 쓰려다 실패한 황보씨에 의해 일연선사 비와 전각이 파괴되었다. 1992년 이후 5차에 걸친 발굴조사를 마쳤고, 이를 토대로 2010년부터 2017년까지 8년간 국비 등 총 113억 원을 투입하여 인각사 복원사업을 추진중이다.[12]
지리
인각사는 화산(華山)의 서북쪽 기슭 평지에 자리하고 있다. 화산의 능선이 끝나는 곳에는 개울이 있는데 이 개울을 건너면 절이 자리한 인각 마을이 있다. 개울 맞은편에는 깎아지는 듯한 절벽이 있는데 그 정상은 학소대(鶴巢臺)라고 한다. 절 이름과 마을 이름에 공통적으로 들어간 '인각(麟角)'이라는 명칭은 이러한 주변 지형과 관련이 깊다. 이 지역은 기린(麒麟)이 노닐다가 뿔이 암벽에 걸려서 떨어진 곳이라고 하는데 인각마을의 위치가 그 뿔의 지점에 해당되기 때문에 인각 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13]
인각사 화산(華山) 동네 어귀에 있는데 석벽이 깎아지른 듯하다. 속담에 전하기를,“옛날 기린이 이 석벽에 뿔을 걸쳤다 해서 이렇게 불렀다.”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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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신증동국여지승람』제 27권 경상도 의흥현[14] |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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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위 인각사 보각국사비 | 군위 인각사지 | A는 B에 있다 | |
군위 인각사 보각국사탑 | 군위 인각사지 | A는 B에 있다 | |
군위 인각사 삼층석탑 | 군위 인각사지 | A는 B에 있다 | |
군위 인각사 미륵당 석불좌상 | 군위 인각사지 | A는 B에 있다 | |
군위 인각사 석불좌상 | 군위 인각사지 | A는 B에 있다 | |
일연 | 군위 인각사지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
군위 인각사 보각국사비 | 일연 | A는 B를 위한 비이다 | |
삼국유사 | 군위 인각사지 | A는 B와 관련있다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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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4년 | 일연이 군위 인각사에 주석하며 삼국유사를 저술하였다 |
1289년 | 일연이 군위 인각사에서 입적하였다 |
1362년 | 군위 인각사에 무무당이 건립되었다 |
1407년 | 군위 인각사가 자복사찰로 지정되었다 |
1890년 | 군위 인각사 보각국사비가 훼손되었다 |
1992년 | 군위 인각사에 대한 발굴조사가 시작되었다 |
2010년 | 군위 인각사에 대한 복원사업이 시작되었다 |
주석
- ↑ "군위인각사지,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문화재청에서 지정한 정식명칭은 '군위 인각사지'이지만 2010년부터 복원사업이 추진되면서 절터가 아니라 이제 하나의 사찰로 볼 수도 있다. "인각사",
『조선왕조실록사전 』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642년이면 의상(625~702)이 불과 18세 때이고, 원효(617~686) 648년에 황룡사에서 출가한 것으로 알려져있어 두 가지 설 모두 신빙성이 떨어진다. 사찰문화연구원, 『전국사찰총서16 - 경북의 전통사찰Ⅲ』, 사찰문화연구원, 2001, 136쪽.
- ↑ 하지만
1991년 말 경북대학 박물관에서 실시한 발굴조사를 통해 대웅전터로 추정되는 기단부에서 통일신라시대의 유구가 확인되어 신라 말기에는 이미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군위 인각사지",
『두산백과』online . - ↑ 왕사로 책봉되어 주석한 곳을 말한다. "인각사",
『조선왕조실록사전 』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용검에게 절을 수리하게 한뒤 토지 백여경을 하사하였다. 박기용, 『문학:명저의 탐방; 삼국유사의 산실 인각사』, 선비문화 1권 0호, 2004, 58쪽.
- ↑ "인각사",
『조선왕조실록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왕실의 기복을 비는 사찰이다. 당시 인각사가 의흥 지역을 대표하는 명찰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사찰문화연구원, 『전국사찰총서16 - 경북의 전통사찰Ⅲ』, 사찰문화연구원, 2001, 136쪽.
- ↑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지금은 병속에 새 찾을 곳 없고, 낙조 속에 비바람에 씻긴 비석만 남아있네"라는 조선시대 초기 문장가인 유호인(1445~1494)이 쓴 글이 인용되는데, 이를통해 당시 인각사의 사세가 매우 기울어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사찰문화연구원, 『전국사찰총서16 - 경북의 전통사찰Ⅲ』, 사찰문화연구원, 2001, 136쪽.
- ↑ "⑬군위 인각사" 『금강신문』, 작성일: 2009년 3월 20일.
- ↑ 「강설루중수기」에 따르면 당시 대웅전과 극락전 두 전각의 기둥이 기울고 지붕이 새 비바람을 가리지 못하니 그 안에 모셔진 장륙존상도 훼손이 심했으며 경내도 수풀이 우거져 황폐화 되었다고 한다. 이에 따라 법당의 불상을 새로 조성하고 종루인 강설루와 요사를 개수하였다고 한다. 사찰문화연구원, 『전국사찰총서16 - 경북의 전통사찰Ⅲ』, 사찰문화연구원, 2001, 139쪽.
- ↑ "인각사",
『조선왕조실록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사찰문화연구원, 『전국사찰총서16 - 경북의 전통사찰Ⅲ』, 사찰문화연구원, 2001, 136쪽.
- ↑ 이민수(역), 『신증동국여지승람』제 27권 경상도 의흥현, 1969. 온라인 참조: "의흥현", 신증동국여지승람 제 27권 경상도 의흥현,
『한국고전종합DB』online , 한국고전번역원.
참고문헌
- 김진덕, 「군위 인각사지 5차발굴조사 개보」, 신라사학보 15호, 2009, 271~296쪽.
- 황원갑, 『고승과 명찰』, 바움,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