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호
최무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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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최무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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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발명가, 무신 |
유형 | 화약,무기제조 |
개요
우리나라에서 화약과 화약을 이용한 무기를 처음 제작, 사용하였다. 무관인 그는 고려 말기에 한창 기승을 부리던 왜구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화약(火藥)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중국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무역항 벽란도에 가서 중국 강남 지역에서 온 상인들에게서 정보를 수소문했다. 그리고 이원(李元)이라는 상인에게서 화약을 만드는 데 필수적인 염초(焰硝) 제조법을 배워 화약 개발에 성공했다.
그 뒤 최무선은 여러 차례 조정에 건의해 1377년(우왕 3)에 화통도감(火筒都監) 설치를 이끌어냈으며, 우리나라에서 화약과 화약무기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하였다.
이처럼 화약과 화기 제작을 주도한 최무선은 1380년(우왕 6)에 왜구가 금강 하구의 진포로 쳐들어오자 부원수(副元帥)로 임명되어 상원수(上元帥)나세(羅世)와 함께 각종 화기로 무장한 전함을 이끌고 나아가 싸워 격파시키는 큰 공을 세웠다. 1383년(우왕 9)에도 관음포대첩에서 왜구를 물리치는 데 공을 세웠으며, 1389년(창왕 2)에는 박위와 함께 쓰시마 정벌에도 참여했다.
최무선이 개발한 화기를 사용하면서 고려는 왜구와의 해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으며, 화기를 해안 지역에 배치하면서 왜구의 침입에 대한 방어체제도 정비하였다. 이러한 공으로 고려에서는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라는 벼슬까지 올랐으며, 조선 초에는 나이가 많아 등용되지는 못하였으나, 죽은 후에 그의 공을 생각하여 의정부 우정승(議政府右政丞)과 영성부원군(永城府院君)으로 추증되었다.
아들 최해산과 손자 최공손도 화약과 화기 연구에 참여하였으며, 저서로는 화약의 제조법과 염초(焰硝)의 채취 방법 등을 기술한 《화약수련법》을 남겼으나 전하지 않고 있다.
민족기록화와의 연관성
최대섭의 1979년 민족기록화 작품 최대섭-화포와 화약을 제조하는 최무선의 중심 인물로 등장한다.
고려 말 왜구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적극적으로 화약을 비롯한 무기 연구 및 제조에 힘썼으며, 우리나라 무기제조사와 전쟁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노드 및 관계 테이블
노드 | 관계 | 노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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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섭-화포와 화약을 제조하는 최무선 | ~을 소재로 한다 | 최무선 |
최무선 | ~과 관련된다 | 이원 |
최무선 | ~의 아버지다 | 최해산 |
최무선 | ~와 관련된다 | 나세 |
최무선 | ~와 관련된다 | 심덕부 |
최무선 | ~에 의해 찬양되었다 | 권근 |
최무선 | ~에서 활동했다 | 화통도감 |
최무선 | ~를 제조했다 | 화포 |
최무선 | ~를 제조했다 | 화전 |
최무선 | ~를 제조했다 | 주화 |
최무선 | ~를 제조했다 | 대장군포 |
최무선 | ~를 제조했다 | 피령전 |
최무선 | ~을 지휘했다 | 진포대첩 |
최무선 | ~에 기록되어 있다 | 고려사 |
최무선 | ~에 기록되어 있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
최무선 | ~에 기록되어 있다 | 조선왕조실록 |
최무선 | ~에 기록되어 있다 | 양촌집 |
최무선 | ~의 소재이다 | 소설 최무선 |
최무선 | ~의 소재이다 | 드라마 예성강 |
최무선 | ~와 관련된다 | 최무선장군추모비 |
최무선 | ~와 관련된다 | 최무선장군추모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