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 달성서씨(達城徐氏)
창원 달성서씨(達城徐氏)
서진(徐晉)을 시조로 하고 서사일을 입향조로 하는 경상남도 창원시 세거 성씨.
달성 서씨는 시조 서진(徐晋)이 고려 시대에 봉익대부(奉翊大夫)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내면서 서씨를 성으로 받게 되었다. 그의 아들 서기준(徐奇俊)과 손자 서영(徐穎)에 이르기까지 3대가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달성에 세거(世居)하며 관향(貫鄕)을 달성으로 하게 되었으며, 후대로 내려와 현감 공파(縣監公派)·학유 공파(學諭公派)·판서 공파(判書公派)·감찰 공파(監察公派) 등 9파로 갈라져서 세계(世系)를 이었다. 약 350년 전쯤에 서사일(徐思逸)이 호란을 당하여 벼슬을 버리고 회산(檜山) 오곡(梧谷)에 은거하였다. 이곳은 지금의 창원시 의창구 북면 외산리 현도 마을이다. 안종두(安鍾斗)가 쓴 『영모재기(永慕齋記)』에는 서씨의 입향 경위를 “우리 인조 임금과 효종 임금 때에 오은(梧隱) 서사일 공은 달성의 세계이다. 대대로 벼슬을 하여 고관 대작이 서로 이어져 울연히 영남의 큰 문벌이 되었다. 대대로 공산(公山) 아래 살았는데 공께서 일찍이 남쪽 바닷가를 유람하다가 회산의 오곡에 이르러 그 산수의 아름다움과 민속이 순박한 것을 보고 그것을 사랑하여 그곳에 살고자 하였다. 돌아가 온 집안을 다 거느리고 이사하였다.”라고 기록해 놓았다. 달성 서씨는 창원의 북면 외산리 현도 마을, 북면 마산리, 창원시 성산구 대방동 등에 집성을 이루고 있었으나, 대방동은 창원 공단 지구 개발로 인하여 이주하면서 흩어져 버렸다. 현재 창원시 의창구 북면 외산리 현도 마을에 달성 서씨의 재실인 영모재가 있다. 이곳 영모재의 편액은 백당 정기헌의 글씨로 새겨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