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에서 건국한 비류 백제
문학산에서 건국한 비류 백제(文鶴山-建國-沸流百濟)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 전해지는 백제 건국 신화에 대한 설화. 비류와 온조왕은 각각 미추홀과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였다. 하지만 비류가 도읍을 정한 미추홀은 비류는 땅이 기름지지 못하고 메말라 살기에 적당치 않았다. 비류는 비류국을 세웠으나 13년 만에 멸망하여 십제에 병합되었다.
1999년 8월에 인하 대학교 국문학과 설화 채집반이 문학산 일대의 전설과 민담의 수집을 했다. 당시 지도 교수인 최인학과 대학원생 염희경, 심명숙, 신세윤 등 네 명이 답사하여 채록했다. 비류와 온조(온조왕)은 삼각산에 올라가 서로 살 곳을 정하기로 했다. 형인 비류는 바닷가에 살기를 원했으므로 미추홀의 문학산에 성을 쌓고 살게 되었고, 동생인 온조왕는 한강 남쪽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여 십제를 세웠다. 그런데 비류가 세운 곳은 땅이 기름지지 못하고 메마르며, 물이 짜서 사람 살기에 적당치 않았으므로 나라의 기틀이 잡히지 않았다. 어느 날 비류는 동생 온조가 세운 십제에 가 보았다. 그곳은 땅이 기름지고 넓어 사람들이 잘 살고 나라의 기틀이 잡혀 있었다. 이에 비류는 의기소침하여 미추홀에 돌아와서 그만 죽고 말았다. 이런 이유로 비류의 능을 에분(恚墳)[분해서 죽은 사람의 무덤]이라 불렀다. 비류의 능이 문학산 정상에 있을 것이라고 하나 그 위치를 알 수 없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에 의하면, 비류와 그의 동생 온조는 주몽이 북부여에서 낳은 아들이 찾아와 태자에 봉해지자 위협을 느껴 열 명의 신하와 많은 백성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온다. 새 국가 건설을 위해 고구려를 떠나 남쪽으로 내려온 비류는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자 아우인 온조와 결별한다. 이 과정에서 비류는 고구려에서 함께 남하한 신하들의 간언을 물리침으로써 이들과도 갈라서게 된다. 비류를 따르는 신하가 없었다는 것은 장차 미추홀에서의 국가 경영이 어려움에 처하게 될 것임을 예견하는 상징적인 사건이라 하겠다. 비류는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미추홀로 옮겨가 자리를 잡는다. 비류가 문학산 주변을 근거지로 하여 새로운 국가를 건설했다는 것은 미추홀이 한 나라의 도읍지였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비류가 정착한 미추홀은 지리적 여건상 ‘땅이 기름지지 못하고 메마르며 물이 짜서 사람 살기에’는 부적합한 곳으로 묘사되어 있다. 미추홀이 백성들이 살기에 부적합한 지역으로 묘사된 것은 온전한 국가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으로, 비류가 국가의 경영에 실패했음을 보여준다. 결국 비류는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자결하며, 그의 백성은 온조의 십제에 흡수된다. 비류의 자결과 백성들의 귀의는 온조의 십제가 비류의 미추홀을 흡수·병합하는 과정에 정당성을 부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