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 소윤공 서한(大丘徐氏始祖 少尹公徐閈) 대구서씨 원조(遠祖)
예산 소윤공 서한(大丘徐氏始祖 少尹公徐閈) 대구서씨 원조(遠祖)
서한(徐閈) 선생 묘(충남 예산군 대흥면 하탄방리 산16)
高麗國朝奉大夫軍器寺少尹大丘徐公神道碑銘幷序(고려국조봉대부군기사소윤대구서공신도비명병서)
高麗朝奉大夫軍器少尹徐公閈之墓 淑夫人金氏祔左(고려조봉대부군기소윤서공한지묘 숙부인김씨부좌)
대구서씨 원조 서한(徐閈) 선생
서한(徐閈)은 고려 때 조봉대부(朝奉大夫) 군기소윤(軍器少尹)을 지냈고 대구서씨 원조 이다.
고려 때 봉익대부(奉翊大夫) 판도판서(版圖判書) 등을 지내고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진 서진(徐晉)을 시조로 하는 달성 서씨와 근원이 같지만
분파된 시기는 확실히 고증할 수 없다.
한양에 올라와 벼슬을 한 서한의 후손들과
고향에 남아 세거한 서진의 후손들이 각각 경파(京派)와 향파(鄕派)로 갈라져
근원이 같고 달성이 대구의 옛 이름이기도 하여 혼동되기도 하지만
엄연히 본관이 다르고 대동보(大同譜)도 따로 만들고 있다고 한다.
7세 서익진(徐益進)은 고려 때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를 지냈고,
8세 서의(徐義)는 호조전서(戶曺典書)를 지내다가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하자 은거하였다.
9세 서미성(徐彌性)이 새 왕조에 출사하여 안주목사(安州牧使)를 지냈으며,
이후 조선시대에 상신 9명, 대제학 6명, 왕비 1명을 비롯하여 많은 명신과 학자를 배출한 명문 거족으로 번성하였으며,
후손들은 만사공파·전첨공파·첨추공파·도위공파·봉사공파·사가공파·서흥파·춘헌공파·승사랑공파·장원공파·훈련봉사공파·배산파 등 12개 파로 나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