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서씨
임성태자(琳聖太子) (생몰년도 미상) ㅡ일본 서씨(日本徐氏) 시조
백제의 왕족으로 성은 부여씨(夫餘), 이름은 의조(義照)이다. 참고로 '義'는 토요타 가문이 쓰던 돌림자이기 때문에 원래 이름은 그냥 '조(照)'다. 일본의 성씨 오우치씨(大內)와 토요타(豊田)씨,후지와라씨의 시조이다. 26대 성왕 혹은 27대 위덕왕의 셋째 아들로 추정된다. 오우치씨 가문 족보 서문에 백제 성왕 또는 위덕왕을 '백제국 마한황제제왕'(百濟國 馬韓皇帝齊王)이라고 서술한 것이 눈에 띈다.
《일본서기》에는 등장하지 않고, 족보에만 기록된 인물인데, 스이코 덴노 19년(611) 일본으로 망명했다는 것이 성왕 또는 위덕왕의 아들로 추정되는 아좌 태자와 일치하기 때문에 동일인일 가능성이 있다. 행적[편집]
위덕왕 붕어 1년 전 일본에 사절단으로 파견되었다. 일본에서 타타라(多々良)씨를 하사받았으며, 칠성신 신앙을 비롯해 제철기술을 전파하고, 불교를 확산시켰다고 한다. 일설에는 일본 쇼토쿠 태자가 법명여래의 화신이라는 소문을 듣고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일본 고류지에는 임성태자가 세웠다는 5층 탑과 백제 왕에게서 받았다는 검이 남아 있다고 한다.
임성태자(琳聖太子[1], 577년 ~ 657년 11월(오우치 가문의 주장, 생몰년도 미상))는 일본 오우치씨의 족보에 등장하는 남부여의 귀족으로, 조선왕조때 만들어진 간양록과 지봉유설, 난중잡록 등의 기록이 전부다. 성씨는 부여씨(扶餘), 이름은 의조(義照)다.
토요타씨 족보 계보
初代 百済國大祖 都慕大王[2]、第二代 直支王(전지왕)、第三代 阿美王(아신왕)、第四代 腆支王(전지왕)、第五代 久爾辛王(구이신왕)、第六代 毘有王(비유왕)、第七代 蓋圖王(개로왕)、第八代 文園王(문주왕)、第九代 三斥王(삼근왕)、第十代 東城王(동성왕)、第十一代 武寧王(무령왕)、第十二代 聖王(성왕)、第十三代 威徳王(위덕왕)、第十四代 惠王(혜왕)、第十五代 法王(법왕)、第十六代 辰爾王(진이왕)、第十七代 武王(무왕)、第十八代 義慈王(의자왕)、第十九代 豊璋王(부여풍)、第廿代 禅廣(부여선광(여선광)
오우치씨 족보에서의 기록
《삼국사기》에는 무왕이 법왕의 아들이지만, 위덕왕 사후 혜왕과 법왕이 연이어 사망하는 이변이 발생했다. 위덕왕의 뒤를 이은 혜왕의 재위기간이 2년, 법왕의 재위기간이 1년밖에 되지 않고, 뚜렷한 행적이 보이지 않는 등 석연치 않은 점이 존재한다. 또한 이전부터 무왕은 위덕왕의 아들설과 손자설이 모두 있었으며, 《삼국유사》에서는 강가에 사는 과부가 검은 용과 통정하여 얻은 아들이 서동, 그러니까 무왕이라고 기록했다.
중국 《북사》에서는 무왕을 위덕왕의 아들로 대충위덕왕의 아들로 일본으로 건너간 아좌 태자가 무왕의 아버지로 추정되기도 했다.
무왕과 서동에 대한 여러 이설이 존재하는 가운데 1398년 일본의 호족 오우치 요시히로가 자신이 임성태자의 후손임을 주장하며 조선 조정에 족보를 보내오면서 진이왕의 존재가 처음 알려졌다. 일본 토요타씨 계보와 《신찬성씨록》 등에는 법왕과 무왕 사이에 나타난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 정식 국왕으로 인정되지 않았고, 시호도 없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가 섭정이나 찬탈 형태로 올랐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를 고려하면 법왕과 무왕 사이에 공위기가 있었고, 왜국측에서는 백제왕신사의 제사장인 그를 정통성있는 백제 국왕으로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