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서당
옥천서당(玉川書堂)
경상북도 경산시 중방동에 있는 조선 후기 서당.
옥천서당(玉川書堂)은 조선 후기 문신 서사선(徐思選)[1579~1651]을 제향하기 위해 1786년(정조 10)에 옥천서원으로 건립되었다. 서사선의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정보(精甫), 호는 동고(東皐)이다. 종형 서사원(徐思遠)을 비롯하여 장현광(張顯光)·곽재겸(郭再謙)·손처눌(孫處訥)·정경세(鄭經世)에게 학문을 배웠다. 1613년(광해군 5)에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 당시 경상도관찰사 정경세와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난을 평정한 후 거두어 모은 병기와 양식들을 국가에 바쳤다. 1636년(인조 14)에 예빈사참봉(禮賓寺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사임한 후 동고정사(東皐精舍)를 건립하였고, 동고정사와 고산서원(孤山書院) 등지에서 학문을 닦으며 후학 양성에 힘썼다.
옥천서당은 경상북도 경산시 도심에 위치해 있다. 경산오거리에서 북서쪽으로 약 180m 가량 떨어진 주택가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옥천서당은 1604년(선조 37) 서사선이 처가가 있는 경산현 상방동(上方洞)[현 경상북도 경산시 상방동]으로 이거하면서 세운 동고정사(東皐精舍)가 모체이다. 동고정사를 바탕으로 1786년(정조 10)에 지역 사림들이 경산현 북쪽 동산(東山) 아래[현 경산시청 주변]에 서사선을 제향하는 옥천서원(玉川書院)을 설립하였으나, 1868년(고종 5)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1869년 방호리(芳湖里)에 있는 서사선의 사묘(私廟) 인근에 옥천서원 옛 건물의 부재를 활용하여 강당을 건립한 후 편액을 ‘옥천서당’이라 하였다. 이후 건물이 쇠락하자 문중 부로(父老)들이 회합하여 1948년 현재 위치에 강당과 사당, 동재·서재를 갖춘 옥천서당을 새롭게 재건하였다. 2009년에 서재를 참고하여 동재를 새롭게 건립하였다.
옥천서당은 서원의 일반적인 배치인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이다. 외삼문인 이연문(怡然門)을 들어서면 정면에는 강당, 양쪽에는 동재와 서재가 각각 위치한다. 이연문은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홑처마 솟을지붕 건물로, 가구 형식은 3량가이다. 강당은 정면 6칸, 측면 3칸의 홑처마 팔작기와지붕 건물로, 가구 형식은 5량가이다. 중앙의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2칸씩 두었다. 정면에 툇마루를 설치하여 대청과 이어지며, 건물의 좌우 측면과 배면에 쪽마루를 설치하여 동선을 편리하게 하였다. 동재와 서재는 모두 홑처마 맞배지붕에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이다. 전면에 반 칸 규모의 툇간을 두었다. 사당인 옥천사(玉川祠)는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가구 형식은 3량가이다.
옥천서당은 사당인 옥천사에서 매년 음력 7월 17일에 서사선 불천위(不遷位) 제사를 지내며, 매년 음력 3월 17일에는 부인 진산진씨(珍山陳氏)의 제사를 봉행한다. 또한 매년 5월 첫째 주에 후손들의 모임인 달성 서씨동고공종친회(達城徐氏東皐公宗親會)의 정기총회가 열린다.
옥천서당은 17세기 경산 지역을 대표하였던 서사선의 제향처로 조선 후기에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또한 지역 유림의 공의로 서사선이 불천위로 지정된 후 지금까지 이곳에서 불천위 제사를 지내고 있어 역사적 가치와 상징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전형적인 전학후묘 배치 형태 등 조선 시대 서원 건축물을 이해하는 데에도 좋은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