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귀당유집
전귀당유집(全歸堂遺集)
조선시대 학자 서시립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921년에 간행한 시문집.
2권 2책. 목판본. 1921년 후손 서석류(徐錫類)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유척기(兪拓基)의 서문이, 권말에 민겸(閔謙)·장석영(張錫英)의 발문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과 성균관대학교 도서관 등에 있다.
권수는 삼성록(三省錄), 권1은 시 11수, 잠(箴) 4편, 수록실기(手錄實記) 1편, 부록으로 상량문·행장·묘갈명 각 1편, 만(挽) 10편, 제문 4편, 봉안문·상향축문(常享祝文) 각 1편, 권2는 역시 부록으로 수창시(酬唱詩) 91수, 서찰 12편, 행록 1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삼성록」은 저자의 할아버지 서언겸(徐彦謙)이 임진왜란 때 온 가족을 데리고 피난했던 일을 기록한 것이다. 1592년 4월 20일부터 1595년 9월 3일까지 그 때의 참담했던 일들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시는 모두 차운(次韻)한 것으로, 수량은 얼마 되지 않으나 수준이 높다. 잠은 「효자잠(孝子箴)」·「우애잠(友愛箴)」·「권학잠(勸學箴)」·「수기잠(修己箴)」 등으로, 자손들에게 훈계할 목적으로 쓴 것이다. 「수록실기」는 임진왜란 때 자신이 겪었던 일과 남에게 들은 이야기를 종합해 기록한 글이다.
조선후기 어려서부터 효심이 지극했던 효자.
본관은 달성 서씨(達城). 자는 입지(立之), 호는 전귀당(全歸堂).
어려서부터 조부모 및 부모 섬기기에 지극한 정성을 다하였으니, 맛있는 음식을 얻으면 반드시 부모님께 가져다 드렸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성을 지키기 위하여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집을 떠나자 15살 어린 나이로 홀로 집에 남아서 조상의 사당을 지켰고, 할머니와 어머니를 모시고 공산(公山)의 삼성암(三省菴)에 피난하였다.
정유재란 때는 산속에 피신시켜 걸어서 동래까지 왕래하면서 쌀을 구하여 부모를 공양하였다. 부사가 이를 가련하게 여겨 이웃 고을의 세미(稅米)를 바꾸어주었다. 당시 이호민(李好閔)이 그 지역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그 효행의 지극함에 감동하여 진상할 밀과(蜜果)·어육(魚肉) 등을 내려 할머니를 봉양하게 하고, ‘全歸(전귀)’의 두자로써 당호(堂號)하게 하였다. 1639년(인조 17) 참찬관(參贊官) 이경증(李景曾)이 그의 효행을 추천하여 관직에 제수되기도 하였다.
전란으로 학문을 못다한 것을 탄식하면서 서사원(徐思遠)·정구(鄭逑)·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벼슬은 참봉에 이르렀다. 좌랑에 증직되고, 대구의 백원서원(百源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전귀당유집(全歸堂遺集)』이 있다.
팔공산 기슭에 서시립(徐時立'?∼1665)이라는 선비가 살고 있었어. 이 선비는 어렸을 때에 매우 인자한 어머니로부터 훌륭한 가르침을 받았어.
한번은 서시립의 집으로 이웃집 소가 들어와서 난동을 부렸어. 그 바람에 그만 장독이 깨어지고 말았지.
"아이고, 미안합니다. 장독 값을 물어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대답은 의외였어.
"소는 짐승이니 무슨 사리판단을 하겠습니까? 우리 집 장독이 깨어진 것은 우리의 운이 나빠서입니다. 괜찮습니다."
서시립은 이러한 어머니 밑에서 남을 위하는 마음을 길러 나갔어.
어느 해, 이웃집에서 상(喪)을 당했는데 때마침 내린 비로 물이 불어나 계곡을 건널 수 없었어. 이웃집 묘터는 건너편 산에 있었는데 말이야.
그때 묘터잡이가 마을 뒷산 기슭에 있는 서시립 선생의 밭을 가리키며 '이곳은 물 빠짐이 좋은 명당이오. 이곳에 묘를 쓰면 아주 길할 것이오'라고 했어.
그러자 상을 당한 집에서는 선생의 밭에 묘를 쓰게 해 달라고 청해 왔어.
"아니, 우리 집 밭인데 남의 집에서 묘를 쓰려 하다니!"
집안에서는 반대가 있었어.
그런데 선생은 선뜻 허락하였어.
"사람이 상을 당한 것만큼 슬픈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리하십시오."
이윽고 장례가 끝나고 이웃집에서 땅값을 주려고 하였어.
그러자 선생은 사양하였어.
"이웃집 어르신을 우리 밭에 모신 것은 도리어 우리 집의 영광입니다. 어찌 돈을 받겠습니까? 그냥 두십시오."
이뿐만 아니야. 양식이 떨어진 사람들이 곡식을 빌리러 오면 선생은 서슴없이 빌려주었어. 그런데 선생이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자 곡식을 갚는 사람도 있었지만 모른 척하는 사람도 있었어.
이를 본 선생은 마을 사람들을 모두 집으로 초청해 음식을 대접하며 말했어.
"이제 집안의 뜻에 따라 이웃마을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어찌 함께 살아온 여러분의 정을 잊겠습니까? 혹시 꾸어간 곡식은 갚지 않아도 되니 마음에 담아두지 마십시오."
이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부끄러워하며 모두 곡식을 가져왔어.
그러나 선생은 모두 돌려보내었어. 곡식을 모두 갚으면 굶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지.
그리하여 나중에 선생이 세상을 떠났을 때에는 온 마을 사람들이 모두 슬퍼하며 선생을 위한 서원을 짓는 데 힘을 보태었어. 이때 지어진 서원이 바로 백원서원(百源書院)인데 지금도 대구 도동에 남아 있단다.
어때, 어렸을 때부터 좋은 가르침을 받고 훌륭한 일을 한 사람은 세상을 떠나서도 존경을 받고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