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선원사지
강화 선원사지 (江華 禪源寺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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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강화 선원사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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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江華 禪源寺址 |
주소 | 전남 함평군 해보면 광암리 |
문화재 지정번호 | 사적 제259호 |
문화재 지정일 | 1977년 11월 29일 |
관리자 | 강화군 |
건립시기 | 고려시대 |
창건자 | 최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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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인천광역시 강화군 선원면에 있는 고려시대의 절터.
내용
선원사는 고려시대에 몽골의 침략을 받아 강화도로 도읍을 옮긴 후 1245년(고종 32) 최우(崔瑀)가 자신의 원찰(願刹)이자 대몽항쟁의 정신적 지주로 삼고자 창건한 곳이다.[1]
강화도 피난 당시 국찰(國刹)의 격을 갖던 사찰이었으며, 충렬왕 때에는 임시 궁궐로 사용하기도 했다.[2]
대장도감(大藏都監)을 설치하여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목판을 조각, 봉안하기도 했고, 고려시대에는 선원사는 순천 송광사(順天 松廣寺)와 함께 2대 선찰(禪刹)로 손꼽혔으나 1398년(태조 7) 이후 아무런 기록이 없으며, 그 터는 잊혀져 흔적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3]
발굴조사결과
1976년 동국대학교 강화학술조사단에 의해 조사된 선원사지는 당시 보상화문이 새겨진 전돌, 막새기와, '옴마니반메훔'의 범자(梵字)가 새겨진 치미 등의 조각들이 출토되었다. 500 불상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4]
1996년부터 4차례에 걸친 발굴조사(동국대학교박물관) 결과 건물터, 축대, 배수시설 유구와 연화문 기와, 금동탄생불, 청동나한상, 탄화된 금니사경, 묵서사경 등이 출토되어 절터와 관련된 유적으로 규명되고 있으나, 「조선왕조실록」에서 전하는 고려 팔만대장경을 판각했던 선원사(禪源寺)터로 볼 수 있는 고고학적 자료가 확인되지 않아 이에 대하여는 장기적인 조사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5]
사역이 크게 네 구역으로 구분되어 층단식(層段式)으로 대지가 마련되어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며, 남한지역에 현존하는 고려시대 사찰 터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6]
관련문화유산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강화 선원사지 | 강화 선원사 | A는 B의 터이다 | A edm:isRelatedTo B |
동국대학교박물관 | 강화 선원사지 | A는 B를 발굴조사했다 | A edm:isRelatedTo B |
시각자료
주석
- ↑ 손신영, "강화 선원사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7 - 경기남부와 남한강』, 돌배게, 2012. 온라인참조:"선원사터", 답사여행의 길잡이: 경기남부와 남한강,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손신영, "강화 선원사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7 - 경기남부와 남한강』, 돌배게, 2012. 온라인참조:"선원사터", 답사여행의 길잡이: 경기남부와 남한강,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강화 선원사지",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 - ↑ 손신영, "강화 선원사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 손신영, "강화 선원사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7 - 경기남부와 남한강』, 돌배게, 2012. 온라인참조:"선원사터", 답사여행의 길잡이: 경기남부와 남한강,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강화 선원사지",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 - "강화 선원사지",
『두산백과』onlin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