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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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괄(李适) | |
대표명칭 | 이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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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李适 |
본관 | 고성(固城) |
자 | 백규(白圭) |
출생지 | 1587년 |
사망지 | 1624년 |
시대 | 조선 |
국적 | 조선 |
대표직함 | 형조좌랑, 함경북도병마절도사 |
성격 | 무신 |
목차
정의
조선 중기의 무신·반란자.
내용
인조반정의 주역
이괄은 무과 출신이었으나 문장과 서예에도 능하였다.[1] 1622년(광해군 14) 함경북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어 임지로 떠날 준비를 할 즈음, 평소 친분이 있던 신경유(申景裕)의 권유로 광해군을 축출하고 새 왕을 추대하는 계획에 가담해 1623년 3월의 인조반정 때[2] 주도적인 역할을 해내면서 큰 공을 세웠는데, 거병하였을 때 장졸들이 동요하자 '이귀(李貴)가 병사(兵使) 이괄을 추대하여 대장으로 삼은 다음 편대를 나누고 호령하니 군중이 곧 안정되었다'고 기록될 정도로 무인 이괄의 역량은 반정 성공에 확실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3] 그러나 반정 과정에서 주도 세력인 거의대장(擧義大將) 김류(金瑬)의 우유부단한 처사에 크게 반발하면서 불화가 생겨, 반정 뒤에 겨우 한성부판윤이 되었다.[4]
이괄의 난을 일으키다
이괄은 1623년(인조 1) 당시 변방에 병란의 조짐이 있다고 하여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 휘하에 부원수 겸 평안병사로 삼아 영변에 머물게 되었고, 이 해 윤10월 인조반정 때 공이 많았음에도 반정모의에 뒤늦게 참가하였다는 이유로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녹훈되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 부하 이수백(李守白), 기익헌(奇益獻) 등과 모의하여 1624년 1월 반란을 일으켜 서울을 점령하자 인조는 공주로 피난하였다.[5]
하지만 그날 안령(鞍嶺)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장만이 이끄는 토벌군에 크게 패하여 한밤중에 남은 병사들을 이끌고 광희문(光熙門)을 통해 경기도 이천(利川) 방면으로 퇴각하였다. 그리고 4월 1일(음력 2월 14일)에 경안역(慶安驛) 부근에서 한명련과 함께 부하 장수인 이수백ㆍ기익헌에게 살해되었다.[6]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이괄 | 인조반정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이괄 | 정사공신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이괄 | 이괄의 난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임경업 | 이괄의 난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이원익 | 이괄의 난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임경업 | 정묘호란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이괄의 난 | 정묘호란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이괄 | 이수백 | A는 B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 A edm:isRelatedTo B |
이괄 | 기익헌 | A는 B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 A edm:isRelatedTo B |
이수백 | 이괄의 난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기익헌 | 이괄의 난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 ↑ 하현강, "이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하현강, "이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태훈, "이괄의 난",
『한국사 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하현강, "이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조선의 공신』, 장서각, 2012, 168쪽.
- ↑ "이괄의 난",
『doopedia』online ,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