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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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업(林慶業)
차문섭, "임경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대표명칭 임경업
한자표기 林慶業
생몰년 1594년-1648년
본관 평택(平澤)
시호 충민(忠愍)
고송(孤松)
영백(英伯)
시대 조선
유형 무신



정의

조선 후기 병자호란 때 활약한 명장이다.

내용

이괄의 난 평정

1618년(조선 광해군 10) 아우 임사업(林嗣業)과 함께 무과에 합격, 1620년 삼수의 소농보권관(小農堡權管)으로 부임하여 군량과 군기 구비에 세운 공으로 절충장군의 품계에 올랐다. 그 뒤 첨지중추부사로서 인조반정공신인 김류(金瑬)의 막하에 있었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 때 출정을 자원해 정충신(鄭忠信)의 휘하로 들어갔다. 이 때 세운 공으로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 1등이 되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1]
이듬해 행첨지중추부사 겸 우림위장(行僉知中樞府事兼羽林衛將)을 거쳐 방답첨사(防踏僉使)로 임명되었고, 1626년 전라도 낙안군수로 부임하였다.[2]

강화로 돌아선 출정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전라병사 신경인(申景禋)을 좌영장(左營將)에 임명하고 청군을 무찌르기 위하여 서울로 향하였다. 하지만 이때는 이미 주화파에 의하여 강화가 성립된 뒤여서 싸움 한번 하지도 못한 채 군졸을 이끌고 낙안군으로 돌아왔다. 이듬해 체찰부(體察府)의 별장이 되었다. 1629년 체찰부별장 겸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에, 이듬해에는 평양중군에 임명되었다. 1631년 검산산성(劒山山城) 방어사에 임명되어 정묘호란 이후 퇴락한 용골(龍骨) ∙ 운암(雲暗) ∙ 능한(凌漢) 산성 등을 수축하였으며, 정주목사에 승서되었다.[3]

백마산성 수축

1633년(인조 11) 2월 청북방어사(淸北防禦使)에 임명되고 곧 안변부사를 겸하였다. 이 때 백마산성(白馬山城)에 웅거하면서 이를 수축하고 방비를 튼튼히 하였다. 그 해 4월 명나라의 반장(叛將)인 공유덕(孔有德)·경중명(耿仲明)이 우가장(牛家莊) 앞 바다를 경유해 구련성(九連城)으로 들어가 후금군과 통하려고 하였다. 이에 의주부윤 윤진경(尹進卿)과 함께 이 사실을 명나라 대도독 주문욱(朱文郁)에게 연락해 이를 협격, 섬멸했으나 명나라 장군간의 싸움으로 반장을 사로잡는 데는 실패하였다. 이 공로로 명나라 황제로부터 화폐(花幣) 포상 과 함께 명나라 총병(摠兵) 벼슬을 받았다. 이 때부터 명나라에도 임총병으로 크게 알려졌다.[4]
1634년 의주부윤으로 청북방어사를 겸임할 때 주둔지인 백마산성과 의주산성을 유지하기 위해 조정에 도움을 청하여 은 1000냥과 비단 100필을 지원받아 명나라와 교역으로 물자를 확보했다. 하지만 명나라와 교역으로 지나친 이익을 추구했다는 모함을 받고 파직되었다.[5]

병자호란 중의 활약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송골·봉황의 봉화대에서 연락을 받고 산성을 굳게 지켜 적의 진로를 둔화시키는 데 진력하였다. 청군은 임경업이 지키는 백마산성을 포기하고 직접 서울로 진격하였으며,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결국, 이듬해 정월에 주화론자인 최명길(崔鳴吉) 등의 주장으로 굴욕적인 화의가 성립되었다. 그 뒤 청나라 태종은 조카 요퇴에게 300기의 정예기병을 이끌고 본국으로 돌아오라 명하였다. 임경업은 철수하는 요퇴군을 압록강에서 무찌르고 잡혀가던 우리 백성 남녀 120여 명과 말 60여 필을 빼앗는 전과를 올렸다.[6]

탈출과 망명

전쟁이 끝나고 청북지역과 주둔지의 재건을 위해 청나라 심양과 교역을 하자 또다시 탄핵되어 평안도 철산으로 유배형을 받았다. 청나라는 명을 치기 위해 조선에 끝임없이 원병을 요청하였다. 임경업은 1638년에 다시 복관되고 조방장(助防將)으로 임명되어 청나라 지원에 동원되었으나 명나라 군과 비밀리에 교섭하여 전투는 회피하였다. 인조는 그의 공로를 인정하고 의주 부윤에 복귀토록 하였다.[7]
그후 안주목사(安州牧使)로 승진하였다가 1640년 청나라의 요청에 따라 주사상장(舟師上將)이 되어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또다시 출병하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명나라 군과 내통하여 군사기밀을 알려주고 청나라 군에 협조하지 않았다.[8]
그러나 명나라 장수 홍승주가 대패하여 청나라 군에 생포되자 임경업의 이런 행적이 모두 알려지게 되었다. 청나라는 조선에 압박하여 임경업을 체포하여 심양으로 압송을 요구하였다. 1642년 청으로 끌려가던 임경업은 심기원(沈器遠)의 도움으로 금교역(金郊驛)에서 탈출하였다. 그의 탈출로 대신 가족이 심양으로 압송되었는데 그의 처는 심양 감옥에서 자결하였다. 임경업은 양주 회암사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가 1643년 명나라로 망명하여, 등주도독(登州都督) 황종예(黃宗裔)의 총병인 마등고(馬騰高)의 휘하에 들어갔다. 명은 그를 평로장군(平虜將軍에 임명하였다.[9]

조선으로 압송과 옥사

그러나 청나라가 산해관을 넘어 북경을 함락시키자 명의 위세는 급격히 위축되어 등주도독 황종예는 남경으로 달아나고 마등고는 청나라에 투항하였다. 1645년 임경업은 명 나라 장수 마홍주(馬弘周)의 군영에 남았다가 생포되어 북경으로 압송되어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10]
이 때 국내에서는 좌의정 심기원(沈器遠)의 모반 사건이 일어났는데, 항간에 임경업 연루설이 나돌았다. 1646년 인조(仁祖)는 임경업 처단을 위해 청나라에 요청하여 그를 송환하였다. 친국(親鞫)을 받던 임경업은 김자점의 밀명을 받은 형리(刑吏)에게 장살(杖殺)되고 말았다. 1697년(숙종 23) 복관(復官)되어 충주 충렬사(忠烈祠) 등에 배향되었다.[11]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임경업 이괄의 난 A는 B과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백마산성 임경업 A는 B가 수축하였다 A ekc:reconstructor B
임경업 병자호란 A는 B과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임경업 양주 회암사 A는 B과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임경업 심기원 A는 B과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임경업 김자점 A는 B과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임경업 충주 충렬사 A는 B에 제향되었다 A ekc:isEnshrinedIn B

시각자료

영상

주석

  1. 차문섭, "임경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차문섭, "임경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임경업", 『국어국문학자료사전』online, 한국사전연구사.
  4. 차문섭, "임경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5. "임경업", 『doopedia』online, 두산백과.
  6. "임경업", 『국어국문학자료사전』online, 한국사전연구사.
  7. "임경업", 『doopedia』online, 두산백과.
  8. "임경업", 『doopedia』online, 두산백과.
  9. "임경업", 『doopedia』online, 두산백과.
  10. "임경업", 『doopedia』online, 두산백과.
  11. "임경업", 『doopedia』online, 두산백과.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1. 웹 자원
    • 차문섭, "임경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임경업", 『국어국문학자료사전』online, 한국사전연구사.
    • "임경업", 『doopedia』online, 두산백과.
    • "임경업", 『문화콘텐츠닷컴』online, 한.국콘텐츠진흥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