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례 화엄사
구례 화엄사 (求禮 華嚴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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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구례 화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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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Hwaeomsa Temple, Gurye |
한자 | 求禮 華嚴寺 |
주소 | 전라남도 구례군 마산면 화엄사로 539 |
문화재 지정번호 | 사적 제505호 |
문화재 지정일 | 2009년 12월 21일 |
관리자 | 구례 화엄사 |
교구정보 | 대한불교조계종 |
창건자 | 연기(緣起) |
경내문화재 | 구례 화엄사 각황전,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 구례 화엄사 대웅전, 구례 화엄사 동 오층석탑, 구례 화엄사 서 오층석탑, 구례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 구례 화엄사 원통전 앞 사자탑, 구례 화엄사 화엄석경, 구례 화엄사 대웅전 삼신불탱, 구례 화엄사 보제루, 구례 화엄사 영산회괘불탱, 구례 화엄사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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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전라남도 구례군 마산면에 위치한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이다.
내용
2009년 12월 21일 사적 제505호로 지정되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이다. 창건에 관한 상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으나 《사적기(寺蹟記)》에 따르면 544년(신라 진흥왕 5)에 인도 승려 연기(緣起)가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시대는 분명치 않으나 연기(煙氣)라는 승려가 세웠다고만 전하고 있다. 677년(신라 문무왕 17)에는 의상대사(義湘大師)가 화엄10찰(華嚴十刹)을 불법 전파의 도량으로 삼으면서 이 화엄사를 중수하였다. 그리고 장육전(丈六殿)을 짓고 그 벽에 화엄경을 돌에 새긴 석경(石經)을 둘렀다고 하는데, 이때 비로소 화엄경 전래의 모태를 이루었다.[두산]
화엄사의 창건에 관한 여러가지 설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시대는 분명하지 않으나, 연기(煙氣)라는 승려가 세웠다"고만 기록하고 있다.
- 중관대사 해안(中觀大師 海眼)이 1636년(인조 14년)에 쓴 『호남도구례현지리산대화엄사사적(湖南道求禮縣智異山大華嚴寺事蹟)』 등의 모든 사적기들은 “544년(진흥왕 5) 인도의 승려인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세웠다”고 기록한다.
- 『구례속지(求禮續誌)』에는 “진흥왕 4년에 연기조사가 세웠으며, 백제 법왕이 3,000명의 승려를 주석하게 하였다”고 부연하고 있다.
그러나 삼국시대에는 백제 땅에 속하였던 화엄사를 자장(慈藏)이 중건할 수 있었을까 하는 점, 797년(원성왕 13)에 번역된 『정원본사십화엄(貞元本四十華嚴)』이 의상(義湘)에 의하여 석각(石刻)되어 장륙전의 사방 벽에 장식될 수 없다고 하는 점, 그리고 양식으로 보아 현존 화엄사의 석조물이 모두 8세기 후반부터 9세기에 걸쳐 조성되었다고 하는 점 등에 의하여, 창건과 중건에 대한 의문이 일찍부터 제기되어 왔다.
이와 같은 의문은 1978년에 신라 경덕왕 대의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新羅白紙墨書大方廣佛華嚴經)』이 발견됨으로써 완전히 풀렸다. 이 사경의 발문에 의하여 연기는 황룡사(皇龍寺)의 승려로서 754년(경덕왕 13) 8월부터 화엄경사경을 만들기 시작하여 이듬해 2월에 완성시켰던 실존인물임이 밝혀졌다. 그리하여 창건 연대가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 신라 제24대 왕) 때가 아닌 경덕왕(재위 742-765, 신라 제35대 왕) 때이고, 아울러 자장 및 의상의 중수 또한 사실이 아님이 입증되었다. 다만, 8세기보다 앞선 어느 시기부터 이 터에 가람이 있었고 그것이 연기조사 대에 이르러 대가람으로 확장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중수
이 절은 신라 말 도선(道詵)에 의하여 크게 확장되었고, 고려 광종 때에 홍경선사(洪慶禪師)가 퇴락한 건물을 중수하였으며, 문종이 전라도 및 경상도에서 이 절에 매년 곡물을 헌납하는 것을 허락함으로써, 이를 저장하기 위한 2채의 큰 창고를 일주문 밖에 짓기도 하였다. 또한, 인종은 정인왕사(定仁王師)로 하여금 이 절을 중수하게 하고, 1172년(명종 2) 도선국사의 비를 세우도록 하였으며, 충숙왕 때에는 조형왕사(祖衡王師)가 대대적인 보수를 하였다. 조선시대의 화엄사는 1424년(세종 6)에 선종대본산(禪宗大本山)으로 승격되었지만, 임진왜란의 병화로 완전히 불타버렸고, 석경(石經)마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이에 각성(覺性)은 1630년(인조 8)에 중건을 시작하여 7년 만인 1636년에 대웅전을 비롯한 약간의 건물을 이룩하였고, 1649년 선종대가람(禪宗大伽藍)으로 승격되었다. 1702년(숙종 28)에는 각성의 뜻을 이어받은 성능(性能)이 장륙전을 중건하였는데, 숙종은 이를 각황전(覺皇殿)이라 사액(賜額)하고 선교양종대가람(禪敎兩宗大伽藍)으로 격을 높였다. 이후에도 부분적인 보수가 계속 이루어졌지만 대규모의 중수는 없었다. 1757년(영조 33) 대웅전을 중수했고, 1769년 각황전을 중수했다. 1798년(정조 22)과 1827년(순조 27)에 각각 적조당과 보제루를 중수했다. 1977년 각황전 해체보수를 완료했으며, 1984년부터 만월당·일주문을 세웠다. 1989년 원융료·청풍당을 짓고, 연기암을 복원했다.[민백]
사지(寺誌)에서는 당시의 화엄사는 가람 8원(院) 81암(庵) 규모의 대사찰로 이른바 화엄 불국세계(佛國世界)를 이루었다고 한다. 신라 말기에는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중수하였고 고려시대에 네 차례의 중수를 거쳐 보존되어 오다가 임진왜란 때 전소되고 승려들 또한 학살당하였다. 범종은 왜군이 일본으로 가져가려고 섬진강을 건너다가 배가 전복되어 강에 빠졌다고 전한다. 장육전을 두르고 있던 석경은 파편이 되어 돌무더기로 쌓여져오다가 현재는 각황전(覺皇殿) 안에 일부가 보관되고 있다. 1630년(인조 8)에 벽암대사(碧巖大師)가 크게 중수를 시작하여 7년 만에 몇몇 건물을 건립, 폐허된 화엄사를 다시 일으켰고, 그 뜻을 이어받아 계파(桂波)는 각황전을 완공하였다.[두산]
대개의 절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가람을 배치하지만, 이 절은 각황전이 중심을 이루어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주불(主佛)로 공양한다. 주요 문화재로는 국보 제12호인 석등(石燈), 국보 제35호인 사사자삼층석탑(四獅子三層石塔), 국보 제67호인 각황전이 있으며, 보물 제132호인 동오층석탑(東五層石塔), 보물 제133호인 서오층석탑, 보물 제300호인 원통전전 사자탑(圓通殿前獅子塔), 보물 제299호인 대웅전이 있다. 부속 암자로는 구층암(九層庵)·금정암(金井庵)·지장암(地藏庵)이 있다.[두산]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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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 화엄사 | 연기 | A는 B가 창건하였다 | A ekc:founder B |
구례 화엄사 각황전 | 구례 화엄사 | A는 B에 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 | 구례 화엄사 | A는 B에 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구례 화엄사 동 오층석탑 | 구례 화엄사 | A는 B에 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구례 화엄사 서 오층석탑 | 구례 화엄사 | A는 B에 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구례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 | 구례 화엄사 | A는 B에 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구례 화엄사 원통전 앞 사자탑 | 구례 화엄사 | A는 B에 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구례 화엄사 보제루 | 구례 화엄사 | A는 B에 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구례 화엄사 영산회괘불탱 | 구례 화엄사 | A는 B에 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구례 화엄사 대웅전 | 구례 화엄사 | A는 B에 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구례 화엄사 대웅전 삼신불탱 | 구례 화엄사 대웅전 | A는 B에 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구례 화엄사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 | 구례 화엄사 대웅전 | A는 B에 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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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가 화엄사를 창건하였다 |
시각자료
영상
- 대한불교조계종조계사, "구례 화엄사", YouTube, 게시일: 2012년 7월 13일.
주석
참고문헌